[생활교리] 고해성사 ② 고해성사는 왜, 필요한가요? 첫째, 하느님과의 만남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기 위함이다. 신앙 여정은 하느님과 만남의 연속이며, 그 최종 목적 역시 지복직관(visio beatifica), 곧 ‘하느님을 직접 만나 뵙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성경과 성사-기도 생활, 그리고 사랑실천 등을 통해 하느님과의 복된 만남을 이어나가고 있다. 다만 하느님과의 ‘만남’은 죄로 인해 ‘단절’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교회는 부디 모든 이가 ‘화해’의 만남인 고해성사 안에서 죄의 용서를 통해 하느님과의 여정을 다시 이어가기를 초대한다. 사실 하느님께서 항상 제자리에 계신 분이고, 더욱이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는 분이라면, 고해성사는 하느님과의 끊어진 만남을 다시 엮어주고 이어주는 영적 끈으로써, 우리가 그분께로 멀어진 만큼 다시 되돌아가고, 그분께로 더욱더 친숙하고 가까워지도록 해주는 영적인 도구이자 방법이다. 둘째, 정화의 시간은 지금, 여기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죽음 이후의 연옥은 하느님과의 최종적 만남을 위한 ‘마지막’ 정화이다. 다만,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한 준비, 곧 정화의 시간은 죽음 이후 마지막 때에 이르러서가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사실 신약학자 G.로핑크의 말처럼 고해성사는 “우리가 죽을 때 하느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앞당기며, “우리가 죽을 때 받게 될 하느님의 심판 아래 이미 서” 있도록 해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일 년에 두 차례 이루어지고 있는 판공(判功, 공로를 헤아려 판단) 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교회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스스로 일종의 ‘영적 결산’을 해보면 좋겠다. 이를테면 내가 받은 은총에 따른 기쁘고 감사한 일은 무엇인지, 반대로 복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잘못과 허물은 무엇인지 스스로 따져봄으로써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채워야 할 것은 채워보자! 분명 고해성사는 하느님과의 최종적인 셈을 앞둔 우리를 하느님과의 화해-정화의 길로 인도해 줄 것이다. 셋째, 신앙생활의 참 변화와 기쁨을 누리기 위함이다. 사람을 강압으로 인한 단기적인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이고 전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감동일 뿐이다. 성경의 백미로 꼽히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서 둘째 아들의 변화는 아버지로부터 전해진 감동이었다고 본다. 곧 인륜을 거스르고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르며 떠난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떠나지 않고 늘 기다리며, 다시금 아들이 돌아오자 조건 없이 품에 안는다.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과 용서는 아들을 벅찬 감동 속에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사실 고해성사의 기쁨은 단지 나의 허물을 밖으로 끄집어냈다는 홀가분함에서 그칠 수 없고, 오히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를 사랑스런 자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주시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 체험에 있다. 실제로 고해성사를 통해 얼마나 수많은 이가 하느님 사랑에 압도되어 뜨거운 눈물 속에 참 변화와 충만한 기쁨의 길로 나아가는 ‘기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분명 이 놀라운 기 적은 고해성사의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2024년 9월 8일(나해) 연중 제23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8면, 윤태종 토마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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