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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회사에서 희년을 보다: 교황 보니파시오 9세와 마르티노 5세의 희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16:05 조회수5 추천수0

[교회사에서 희년을 보다] 교황 보니파시오 9세와 마르티노 5세의 희년

 

 

1400년의 희년은 교황 보니파시오 9세 재임 중 두 번째로 거행된 희년으로, 서방 교회의 대분열(1378-1417년)이라는 혼란 속에서 기념되었습니다. 1400년이 다가올 때 아씨시에 있던 보니파시오 9세는 이미 1390년에 희년이 거행되었음을 고려하며, 로마 시민들이 자신에게 완전히 복종하기 전까지는 1400년에 희년을 기념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따라서 교황이 1400년의 희년에 대해 공식적으로 칙서를 공포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게다가 아비뇽과 베네딕토 13세를 지지한 프랑스 국왕은 프랑스인들이 로마로 순례를 떠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순례자가 로마를 찾았고, 이들 중 대부분은 프랑스 교황주의자들(Ultramontani)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순례길은 중부 이탈리아의 모든 도시에서 발생한 전염병과 강도들의 극심한 만행으로 인해 방해를 받았습니다. 또한 전염병에 대한 공포로 ‘백의(白衣)의 참회자들’이 흰색 옷을 입고 “영원하신 하느님께 자비(misericordia eterno Dio)”를 외치며(Laudi de’Bianchi), 이탈리아 도시들을 행렬했습니다. 이는 흑사병 시대의 편타고행(鞭打苦行)을 연상케 했으며, 이러한 행렬이 우려스러운 결과를 초래하자, 교황은 이를 금지했습니다.

 

그 후, 서방 교회의 대분열을 종식한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년)에서 선출된 교황 마르티노 5세(1417-1431년)가 1425년에 희년을 기념했습니다. 이는 대분열 이후 통합된 로마 교회에서 처음으로 열린 희년으로, 우르바노 6세 교황의 결정에 의해 1390년을 시작으로 한 33년 주기의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주기에 따르면 1423년에 희년이 열려야 했지만, 1425년에 기념된 것은 준비 기간의 필요성이나 일정 조정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희년에도 수많은 순례자가 로마를 방문했으며, 교황사를 집필한 루드비히 폰 파스토르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포조 브라치올리니(Poggio Bracciolini, 1380~1459년)는 당시를 회고하며, ‘야만인들’이라 불렸던 비(非)이탈리아인 순례자들이 로마를 오물과 쓰레기로 가득 채웠다고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1425년 희년은 상징적으로도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라테라노 성 요한 대성당에서 “거룩한 문(Porta Sancta)”을 여는 예식이 처음으로 시행되었으며, 이는 이후 희년의 주요 의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의식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교회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을 상징하며 전대사를 얻게 합니다. 벽으로 막혀 있던 성문을 열 때 무너진 벽돌을 순례자들이 신성한 유물로 여겨 집으로 가져갈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2025년 3월 9일(다해) 사순 제1주일 수원주보 4면, 황치헌 요셉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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