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학] ‘용서’보다 더 어려운 게 있나요? 어릴 때 읽었던 동화 중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서로를 미워하는 두 염소가 있었는데, 이 둘은 서로가 너무나 미워서 가장 뜨거운 여름엔 서로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상대를 괴롭히기 위해서입니다. 가장 추운 겨울엔 서로에게 도움을 주지 않으려 멀리 떨어져 살다가 결국 각각 얼어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미워하는 마음, 증오하는 마음은 결국 자기를 죽게 합니다. 우리는 용서가 필요하고 중요하며 가장 큰 사랑이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하지만 때로 용서를 실천하기 너무 어렵다는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당시 유다교 율법은 3번 용서의 의무를 강조했으나, 베드로는 이를 넘어 자랑스럽게(?) 7번의 용서를 제시했지만, 예수님은 놀랍게도 77번, 즉 ‘완전한 용서’를 요구하십니다. 하지만 용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누구나 잘 압니다. 특히 큰 상처를 받아 본 적이 있는 사람, 그리고 이전에 참된 용서를 해 본 사람은 잘 압니다. 내게 상처 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대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받은 상처가 너무 깊거나 혹은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경우, 그리고 내게 상처 준 사람은 나만큼 힘들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원망이란 내가 독을 마시고 상대방이 죽기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미워하기는 쉽지만 용서하기는 참 힘듭니다. 용서하는 것이 때로 불가능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용서란 내 마음에서 독을 빼내는 수술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근본적으로 상대방이 아니라 내 영혼을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토록 어려운 용서를 실천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은 더 클 것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루카 1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5) 물론 아직 용서할 준비가 충분하지 않은데, 용서에 대한 강박이 심해서 준비되지 않은 채 용서한다면 더 큰 화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용서하기 위해 너무 서두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언제나 기도와 참된 회개를 전제합니다. 용서하기 위해 먼저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참된 회개는 우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인간의 죄가 사라졌음을 깨닫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함께하심을 느끼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언제나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회개의 출발점이고, 신앙의 시작점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깊게 체험한 사람만이 참된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2025년 6월 8일(다해) 성령 강림 대축일 서울주보 5면, 조한규 베네딕토 신부(가톨릭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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