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읽는 단편 교리] 병오박해 오늘 의정부교구의 모든 본당에서는 교구 주보(主保)이자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를 봉헌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나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체포로 시작되어 그 순교로 끝난 1846년 병오박해는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중 하나입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끝난 후, 한국 천주교회는 박해가 잦아들면서 대체로 평온한 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하지만 헌종이 기해년에 내린 교서 「척사윤음」(斥邪綸音)은 천주교 박해에 관한 법적 근거가 되었고, 이로써 언제든 박해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조선과 중국의 국경에선 감시가 심해졌기에, 외국 선교사들은 육로를 통해 조선에 입국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는 해로(海路) 개척에 나섰고, 마침내 1845년 10월 12일, 죽을 위험을 넘어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충청도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들이 입국한 경로는 매우 위험하였기에, 페레올 주교는 1846년 봄이 되자 김대건 신부에게 장차 중국에 있는 매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입국할 수 있도록 새로운 바닷길을 개척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는 마포, 연평도, 백령도 등지를 항해하며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본인이 직접 그린 해로도(海路圖)와 편지를 중국에 전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5일, 순위도에서 배 주인 임성룡과 사공 엄수 등과 함께 체포되고 맙니다. 그리고 6월 10일,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가 6월 21일에는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40여 차례 문초를 받게 됩니다. - 1925년 7월 5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한국 순교자 79위의 시복식
이렇게 시작된 병오박해로 인해 금위영의 군인이던 남경문 세바스티아노가 붙잡히고, 교우회장 현석문 가롤로를 비롯하여 한이형 라우렌시오, 우술임 수산나, 김임이 데레사, 이간난 아가타, 정철염 가타리나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임성룡의 부친으로 훗날 옥에서 요셉으로 세례받는 임치백도 자수하여 붙잡혔습니다. 이밖에 많은 천주교 신자가 체포되었다가 배교하여 풀려나는데,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 새남터에서 26세의 나이로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9월 19일, 현석문도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고, 그다음날 남경문과 임치백은 매를 맞다가, 한이형, 이간난,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은 매를 맞은 다음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바친 병오박해 순교자 김대건 신부와 평신도 8명은 기해박해 순교자 70명과 함께 1925년 7월 5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복되었습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2025년 7월 6일(다해) 연중 제14주일 의정부주보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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