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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교리 상식: 관상 수도회가 활동 수도회보다 더 뛰어난 수도생활일까요?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5-07-24 조회수36 추천수0

[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관상 수도회가 활동 수도회보다 더 뛰어난 수도생활일까요? 관상적 삶과 활동적 삶 사이에는 우열이 존재하나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시중 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보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마리아가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39-42)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이 구절을 읽으며 마리아로 대변되는 관상적 삶(vita contemplativa, 비타 콘템플라티바)과 마르타로 대변되는 활동적 삶(vita activa, 비타 악티바)에 대해서 논해 왔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수도 생활 쇄신에 관한 교령 <완전한 사랑>은 관상적 삶과 활동적 삶에 대해서 다룹니다. 관상적 삶은 “온전한 관상을 지향하여 … 고독과 침묵 가운데 끊임없이 기도하고 기꺼이 보속하며 하느님께만 자신을 봉헌”하는 삶이며 “교회의 자랑이며 천상 은총이 솟아나는 샘”(7항)입니다. 이에 비해 활동적 삶은 “거룩한 봉사와 사랑의 고유한 활동을 교회의 이름으로 실천”하여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자라나”(8항)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형태의 삶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우월한 것인지에 대해서 공의회는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관상적 삶이 “그리스도 신비체에서 언제나 뛰어난 몫을 맡는다.”(7항)라고 하고 있지만 활동적 삶과 비교해서 더욱 뛰어나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두 형태의 삶 사이에 우열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13세기의 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문제에 대해 나름 답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여러 상이한 수도생활의 형태들을 논하는데, 이를 통해 관상적 삶을 지향하는 수도회가 활동적 삶을 지향하는 수도회보다 더 뛰어난지에 대해 다룹니다.(2-2부 188문 6항 참조)

 

아퀴나스는 여러 수도회 사이에 발견되는 차이들이, 일차적으로는 수도회의 목적에서, 이차적으로는 그들이 수행하는 활동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수도회가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을 하느님께 두고 있으므로, 결국 수행하는 활동에서 차이와 우열이 발생하게 됩니다. 토마스는 활동적 삶을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활동으로서 관상의 충만함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마치 어떤 것이 혼자 빛나는 것보다 다른 물건을 비추어 주는 것이 더욱 가치가 있듯, 단순히 혼자 관상하는 것보다 관상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더 탁월한 활동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선을 베풀거나 손님을 환대하는 등 외적인 일에 종사하는 것으로 이는 관상적 삶보다는 낮은 가치를 지닙니다.

 

정리하자면, 아퀴나스가 보기에 관상적 삶을 충만히 살아가며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가르치고 설교하는 활동이 가장 높은 단계이고, 관상적 삶 자체가 그다음 단계이며, 가장 낮은 단계가 자선과 환대 같은 외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활동적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단서가 붙습니다. 현실에서 생존이 달린 긴급한 문제일 때에는 활동적 삶이 더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마르타의 집은 손님을 초대할 수 있을 정도이니 당장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충족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 또 듣고 전하는 것이 “필요한 것 한 가지”(루카 10,42)였을 것입니다.

 

[2025년 7월 20일(다해)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서울주보 5면, 김상욱 가브리엘 신부(사목국 기획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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