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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학] 신음하는 세상, 변하지 않는 우리 한 겨울, 어머니의 손을 잡고 성당에 복사를 서러 가던 길이 생각납니다. 날이 너무 추워서 장갑 낀 손을 귀에 대고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곤 했습니다. 요즘 겨울은 그러한 추위를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확실히 여름은 더욱 뜨거워지고 길어지고 있으며, 봄과 가을은 짧아지고 겨울은 따뜻해져 갑니다. 겨울이 예전보다 따뜻해져 좋다고 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반짝이는 여름의 태양을 좋아하는 저의 입장에서도 여름이 길어진 것이 퍽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거시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러한 기후 변화는 개인의 취향으로 판단할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우리가 사소하게 여러 계절을 지나치는 동안 이와 관련된 지구촌의 피해는 나날이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020년 1월 7일, 제주도 최고 온도가 23.6도를 기록했던 것은 인도양 쌍극 현상(Indian Ocean Dipole)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호주에는 끔찍한 산불이 발생했고, 무려 한국 면적의 두 배 이상의 지역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숲의 약 14%가 전소되었고, 수억 마리에 이르는 동물들이 죽거나 피해를 보았습니다. 같은 시기 동아프리카 지역은 평균 대비 두 배 이상의 강수량을 기록했고, 홍수와 산사태로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의 집은 기후 변화라는 동일한 문제 앞에서 서로 연결되어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셈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뒤, 인간이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십니다. 하지만 이것이 세상을 마음대로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2장 15절을 보면 다스림에 대한 다른 표현이 나오는데, 그것은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일구는 것은 밭을 경작하거나 밭일을 하는 것, 돌보는 것은 보살피고 보호하며 감독하고 보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위임은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야 하는 의무를 인간에게 맡기셨음을 의미합니다. 이에 지성을 지닌 인간은 세상의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정교한 균형을 유지하고자 애써야 합니다. 아마도 이러한 글을 보면서, ‘이미 기후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나 혼자 노력한다고 변화될 문제인가?’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대부분의 카페는 종이 빨대를 사용하거나 재생 플라스틱을 사용합니다. 많은 음식점이 국가의 정책에 따라 일회용품을 최대한 사용하지 않습니다. 세계는 탄소 중립을 위해 협약을 맺고 공동의 목표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기후 위기가 나아지지 않는 이유는, 계속해서 공동의 집이 신음하고 있는 이유는, 환경에 무관심한 개개인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2025년 11월 30일(가해) 대림 제1주일 서울주보 5면, 방종우 야고보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윤리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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