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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른 종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9-24 조회수2,851 추천수0

[궁금해요 가톨릭교회 교리!] 다른 종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1)



들어가는 말

베드로 성인이 하늘나라 문 앞에서 그리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충고하는 말이 있었다. “이제부터는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으세요. 이곳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여기에 자기들만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가톨릭 신자들은 당연히 그런 줄로 알았다. 가톨릭 신자들은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고,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고,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일하고 가톨릭 신자들끼리 어울렸으며, 가톨릭 신자와 결혼하였다. 이러한 전통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원주의 시대다. 국가들과 신앙들이 공존하고, 문화들이 쉽게 어우러진다. 이제 다른 이들의 가치관과 신앙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지적인 사치가 아니라,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혁신적인 움직임들 가운데 하나는 가톨릭교회가 다른 종교들에 대하는 태도의 변화다. 다른 종교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지침, 나아가 갈라져 나간 교회들과의 일치에 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생각을 간추려 본다.


역사에 나타나는 가톨릭과 타종교들 사이의 일들

그리스도교회 초기부터 믿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점들이 있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다인들의 모임에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이방인이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기 전에 먼저 유다인이 되어야 하느냐는 문제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사도 15장 참조). 성 베드로도 처음에는 유다인들이 이방인과 어울리거나 금지된 음식을 먹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시로 “사람을 속되다거나 더럽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사도 10,29)을 확신하게 되었다.

교회는 다양한 문화들 속에서 전파되어 나갔다. 그러면서 안팎으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는 반대들에 부딪쳤다. 신앙 내용들과 진리들을 다양하며 서로 일치하지 않는 방식으로 설명하다 보니 교회의 판단과 결정에 불복하는 이단들 혹은 종파들이 생겨났다.

이어서 이슬람교가 그리스도교회에 대응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622년에 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732년에 유럽을 침공한 이슬람 세력을 프랑크 왕국의 칼 마르텔이 물리치지 못했다면, 유럽은 아마도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했을 것이다(그랬다면 유럽의 역사 자체가 달라졌을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이념적인 차이들이 더욱 심화되었고, 마침내 1054년에 교회는 오늘날 ‘정교회’로 알려져 있는 동방 교회와 로마 중심의 서방 교회로 갈라지고 말았다. 그 얼마 뒤에는 이슬람 침략자들에게서 이스라엘 성지를 되찾기 위한 십자군 운동(1095-1270년)이 시도되었으나 끝내는 실패하고 말았다.

교회는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열어 교회법을 정비함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시도했지만,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는 관용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오랫동안 고립되어서 자기들만의 사회에서 자기들만의 전통을 따라서 살아야 했던 유다인들은 이제 더욱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교회가 유다인들을 배척하고 그리스도인들과 유다인들 사이의 교류를 교회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의 역사를 놓고 볼 때 당혹스러운 부분이고,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랑과 관용으로 보상할 필요가 있는 결정이었다.

중세기에는 개혁을 시도한 많은 이들을 교회가 용인하지 않았다. 요한 후스(John Hus)는 성경을 일반 신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화형에 처했다. 교회는 종교개혁 시기까지 단호한 불관용의 자세로 일관했다.

다른 종교들을 모두 오류로 간주하였고, 교회 밖의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이단에 버금가는 행위로 여겼다. 이 시기에 가톨릭 신자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 사이의 결혼은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이렇듯 폐쇄적인 태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불관용이 수백 년에 걸쳐서 워낙 뿌리 깊이 스며들어 있었기에, 교회나 신자들이 새로운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가톨릭 신자들은 새로 장만한 옷을 입듯이 쉽사리 교회 일치를 위한 운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 반대로 새 신발을 사서 길들어서 익숙해질 때까지 아프고 물집이 잡히는 고생을 겪듯이 고통스럽고 어색한 시기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일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이해는 다른 종교들에게 더욱 큰 관용과 개방성을 보이도록 이끌었다.

아직은 다원주의가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 일치의 필요성과 그 희망에 공감하고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는 데에 그다지 불편해 하지 않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몇몇 문헌들은 교회 일치에 대한 관심사를 다룬다.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은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하고 자신이 봉행하는 종교를 선택할 개인의 권리를 존중한다. “이 자유는, 모든 인간이 개인이나 사회단체의 강제, 온갖 인간 권력의 강제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곧 종교 문제에서 자기의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도록 강요받지 않아야 한다.”(2항)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교회 공동체들을 아우르는 ‘그리스도교회’(교회의 자기 이해)와 교황과 주교들을 통한 제도적 완전성을 갖춘 ‘가톨릭교회’(가톨릭의 정체성)를 구분한다. 이 헌장에 의하면 그리스도교회는 눈에 보이는 가톨릭교회보다 큰 실재다.

이 공의회는 이와 같은 혁신적 태도로 가톨릭이라는 조직 밖에서도 성화(聖化)와 진리의 많은 요소가 발견되며, 그 요소들이 그리스도 교회의 보편적 일치를 재촉한다고 인정한다(8항).

또한 그 기원상 그리스도교회와 가톨릭의 깨어질 수 없는 연속성 때문에 그리스도의 계시의 완전성이 가톨릭교회 안에서 발견된다고 말하는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다른 교회 공동체 안에도 살아 있음을 인정한다. 이제는 다른 종교들을 이단이나 오류로 여기지 말 것이며 그들의 가치를 인식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 공의회는 교회 일치 정신을 확대시켜 기도와 신앙 체험의 공유를 통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열린 대화를 격려한다.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은 성령의 역사(役事)를 방해하지 않도록 경고하면서 실천적인 원칙들과 지침들을 제공한다.

또한 이 공의회는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을 통하여 그리스도교가 아닌 종교들(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등)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 마음의 불안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며 그 길을 가르친다.”고 그 가치를 인정한다(2항). “가톨릭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2항) 특히 유다교는 그리스도교의 바탕이요 뿌리이며 그리스도교회와 유산을 공유한다고 인식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11월호, 이석규 베드로(가톨릭출판사 문화총서 편집간사, 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궁금해요 가톨릭교회 교리!] 다른 종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2)


교회 일치를 향한 개방성과 대화의 결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 일치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신학적 대화들이 활발해졌고, 그리스도교와 유다교의 관계 개선을 위한 대화들도 많아졌다. 교회 일치와 종파들 간의 관계 증진을 위한 부서들이 교황청에, 그리고 국가와 지역에 속속 개설되었다.

여러 종파의 성서학자들이 공동으로 번역한 성경이 (우리나라에서는 1977년에) 발행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외국을 순방할 때마다 여러 종교들의 지도자들을 만났고, 또한 적극적인 대화를 권장했다.

이러한 뜻과 정신은 일반 신자들에게도 차츰 확산되었다. 지역에서 본당들은 기도 모임, 시설 공유, 제휴 등으로 다른 교회들과 협력했다. 신자들은 장례식, 결혼식 등에서 타종교인들, 타종파인들과 자유롭게 만나 어울렸다. 가톨릭의 성령 운동은 개신교의 오순절 운동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제 가톨릭 신자들, 개신교 신자들, 유다교 신자들이 모든 사람들 사이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공동의 관심사를 위해 더불어 일하게 되었다.


교회 일치 정신을 고취하고 강화하려면?

제2차 세계 대전 때 가톨릭의 사제, 개신교의 목사, 유다교의 랍비가 같은 지역에서 군목 활동을 했다. 그들은 혹시라도 전투 중에 그들 중 한 사람이 죽으면 다른 두 사람이 장례를 치러 주기로 약속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때 랍비가 전사했다. 남은 두 사람은 약속대로 랍비를 묻어 줄 곳을 찾아 나섰다. 유다인들의 묘지가 없는 곳이었기에, 두 사람은 그 지역 본당의 주임 신부에게 가서 죽은 랍비를 그 본당의 묘지에 매장할 수 있는지 물었다. 주임 신부는 “규정상 그를 본당 묘지에 매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묘지 구역 밖에다 매장할 수는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죽은 랍비를 묘지 구역 밖에다 매장했다. 몇 년 후에 두 성직자가 랍비의 묘소를 방문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그 연유를 묻자, 주임 신부가 대답했다. “나는 자주 그 무덤을 살펴봤지요. 아주 외롭고 추워 보이더군요. 규정집을 다시 살펴보았는데, 어디에도 담장을 옮겨서는 안 된다는 규정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담장을 옮겼지요.”

담장들 : 우리는 다른 사람과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담장’을 옮겨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언제나 유일하거나 최선의 대답일 수는 없다. 하느님은 당신의 선물을 당신의 뜻대로 나누어 주신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들에서도 영성적 가치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고정관념이라는 담장은 우리가 다른 종교들을 객관적으로 대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 우리는 어떤 개인 또는 집단을 일반화해서는, 예컨대 유다인들은 누구나 율법에 따른 정결한 음식만 먹는다거나 가톨릭 신자들은 모두 묵주기도를 바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미묘한 담장들은 대부분 편견이다. 편견은 어떤 사람 또는 이념에 대한 유감을 포함한다. 사람의 마음 깊숙이 새겨져 있는 생각들은 적절한 때가 올 때까지 잠재해 있다가 한순간에 폭발하는데, 그것이 노골적인 증오가 될 수 있다. 편견들은 무지에서 비롯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사고방식을 많이 알면 알수록, 그만큼 우리는 관대해지고 이해심이 커진다.

다리들 : 담장들은 수용, 이해, 관용이라는 다리[橋]들로 대체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신념을 그가 표현하는 대로 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신성하게 여기는 것은 단지 그것이 거룩하다는 이유만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는 방식이 설령 특이하고 생소해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믿는 사람은 언제나 옳다’고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차원의 하느님으로 우리의 삶이 채워질 것이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교회 일치를 지향하는 태도가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신앙이라는 바다에서 우리 나름의 신앙과 가치관이라는 구명조끼를 입고 헤엄칠 수 있을 것이다. 파도를 헤치며 자유로이 떠다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록 평범한 가톨릭 신자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신앙에 대해 대화할 수 있을 정도는 알 필요가 있다.

교회 일치 정신은 사람들 사이에 종교적 차이점과 편향성이 존재하고, 그에 따른 민감한 쟁점들이 마찰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 차이점과 편향성은 대개 나름의 관점과 해석에 근거해서 생겨난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것에 대한 물음들을 받아들이고 신(하느님)의 다양한 면모들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종교적인 물음에 무관심한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현존에 대해 온갖 종교들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를 막는 것이다. 종교적인 차이가 종교적인 무관심만큼 비참하지는 않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가톨릭 신자는 말 그대로 보편적인 사람, 하느님의 진리와 선성(善性)에 열려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선교하는 교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그리스도의 명령(마태 28,19)을 진지하게 수행해 온 교회는 항상 ‘선교하는’ 교회였고 계속 ‘선교하는’ 교회여야 한다.

오늘날에는 ‘개종시키는 것’이 꼭 누군가를 교회로 데려와 세례를 주고 성사들을 베푸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개종시킨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 누군가를 그 사람 나름의 신앙으로 이끌고 격려하여 살게 하는 것이다. 이때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회유가 아니라 표양으로써 신앙으로 이끄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것을 복음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철저히 삶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우리가 생전 처음 읽는 유일한 성경일 수도 있다.

우리의 복음화 노력은 먼저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이탈한 신자들을 되돌아오게 하는 데에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초대의 범위를 넓혀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들을 돕는 데에 배려되어야 할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복음화를 어떤 사람에게서 기존의 신앙이나 종교를 뽑아내고 가톨릭을 옮겨 심는 것이라고만 보지는 않는다. 가톨릭교회는 다른 사람이 거룩하게 여기는 바를 존중한다.

참된 선교 활동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주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에게서 종교심을 이끌어내고 키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개방적이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서로 바라보게 하고, 그럼으로써 평화와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이가 다양한 믿음을 가지고 서로 풍요롭게 해 주는 가운데 한 마음이 되는 것, 이것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라고 기도하신 뜻일 것이다. 우리가 꼭 똑같은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평화와 이해와 사랑으로 조화를 이루는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12월호, 이석규 베드로(가톨릭출판사 문화총서 편집간사, 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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