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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신자들은 무엇을 믿는가?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9-23 조회수3,104 추천수0

[궁금해요 가톨릭교회 교리!] 가톨릭 신자들은 무엇을 믿는가? (1)

 

 

성 아우구스티노가 하루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바닷가를 거닐었다. 삼위일체의 신비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던 참이었다. 마침 어린 아이 하나가 백사장에 작은 구덩이를 파 놓고는 바닷물을 퍼 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성인이 아이에게 무얼 하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저 바닷물을 이 구덩이에 옮겨 담는 중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성인이 “얘야, 너는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하고 묻자, 아이는 “아저씨는 지금 아저씨 머릿속에 있는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라고 대답하고는 사라졌다.

 

이 일화는 믿음과 관련해서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준다. 하느님에 관한 것은 인간이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다. 우리는 그저 하느님께서 그분 자신에 대해서 알려 주시는 몇 가지 방법들을 통해서만, 즉,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삶과 행적을 통해서,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분의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서 그분에 관해 알 수 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하고 물으면, 참으로 다양한 대답이 나올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교의와 교리를 믿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아는 신경을 읊어댈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신심 깊은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말로 대답할 수는 없지만, 나는 내 신앙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답니다.” 우리의 생각이 이렇듯 각양각색이기에, 믿음이란 것에 대해서 여러 차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믿음이란

 

모든 종교는 삶(인생)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노력한다. 하느님(신, 초월적 존재, 절대자)이란 개념이 한편으로는 인간을 압도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도록 추상적이기에,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제시되어야 한다. 그래서 믿음은 말, 시, 신화, 상상, 비유 등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인간적 수단들을 통해서 표현된다. 

 

종교는 이러한 표현 수단들을 통하여 믿음의 내용을 타당하게 정리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예컨대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이시면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하신다는 복잡 난해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는 데에 ‘위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신비를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제법 정연하게 진술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종교적인 개념들을 표현하고 신(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표현하고자 하는 필요성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나름대로 영적인 실재를 느끼고 체험하고 믿는다. 그런데 그 내용은 사실성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가 있다. 이러한 한계와 약점 때문에 종교는 권위 있는 자료(자원)들을 바탕으로 믿음을 합리적이고 타당하고 일관되게 설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믿음과 가톨릭교회

 

가톨릭교회의 신앙은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서 세세대대로 오늘날까지 전해져 왔다. 그런 가운데 전혀 변경되지 않은 채로 전해진 것들이 있고, 변화와 변경이 이루어진 것들이 있으며, 또한 새롭게 해석된 것들도 있다. 가톨릭 신앙을 전하는 단일한 전달 수단은 교도권(교회의 가르칠 권리)이다. 교도권은 신경, 신앙 정식, 교의, 공의회, 그 밖의 교의적 진술들을 통해서 신앙을 선언하고 전한다. 그리고 이 신앙에 입각해서 교회와 신자들을 이끌고 지도한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가 믿는 모든 것이 성경에 낱낱이 나와 있거나 신앙의 모든 것이 소소하고 세세하게 교리서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믿음은 성경과 교도권의 가르침 외에 성전(聖傳, 또는 전승)을 통해서도 신자들의 삶 안에서 면면히 그리고 온전히 전해진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그 뿌리를 두는 만큼, 그 진리들을 복음 정신에 충실한 방식으로 전달하고자 노력해 왔다. 

 

그리하여 성경, 성전,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에 들어 있는 전체 믿음의 내용들 중에서 어떤 진리들은 교회의 직접적인 선언이나 오랜 전통에 의해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진리들을 타당하고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일부 요소들이 변경되기도 했는데, 이는 신앙의 바뀔 수 없는 본질적인 것들로부터 바뀔 수 있는 부분들을 가려낼 줄 아는 교도권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다.

 

교황이 교회의 공식적인 수장으로서 교회와 일치하여 어떤 믿음의 진리를 ‘성좌(聖座)에서’(ex cathedra)라는 단서를 붙이거나 또는 무류성을 발동하여 선포하면, 이는 교회가 그것을 절대 불변의 진리로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가톨릭 신자들이 믿어야 하는 오류 없는 진리, 곧 교의(dogma)가 된다. 교의는 완성된 상태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또한 교황의 개인적인 영감의 소산도 아니다. 교의는 교회 안에 받아들여진 믿음으로서 존재해 온다.(참조 삼아 말하자면, 교회 역사상 교황이 무류권을 발동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가톨릭교회에는 교의 외에 신앙을 설명하거나 신앙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교의처럼 절대적이고 권위적으로 정의되지는 않으며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고 변화될 수 있는, 좁은 의미로 교리(doctrine)라고 하는 진리도 있다. 이를테면, 신학적인 연구나 조사의 결과는 신학적인 설명일 뿐이고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에 속하지는 않는데, 이렇게 신앙과 신앙생활에 보조 역할을 하는 것들 중에는 세월이 흐르면서 신앙을 분명히 하고 더욱 의미 있게 만드는 데 가치 있다고 입증된 것들이 그에 속한다. 이와 관련해서, 가톨릭 신자들은 일반(세속) 출판사에서 발행된 종교나 신학 관련 도서가 탁월한 신학적 견해를 제시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교회의 공식 입장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가톨릭 신앙에서 믿음의 진리가 모두 다 똑같은 정도로 중요하지는 않다. 예컨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구세주시라는 것은 성 요셉이 하늘나라에서 강력한 중개자 역할을 한다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진리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들어 있는 신앙 진리들은 하느님께서 신앙적으로 우리에게서 뜻하시고 원하시는 바를 바탕으로 하여 믿음의 핵심을 이룬다. 그런데 믿음의 핵심에는 신비가 놓여 있다. 그러므로 신앙적인 가톨릭 신자는 자신의 종교에 대한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속속들이 이해한다면, 그것으로 우리가 또 다른 신들이 될 수도 있겠기에 말이다.

 

우리가 ‘신경’의 뜻을 묵상하며 기도하듯 정성스럽게 신경을 읽거나 외운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은혜로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이제는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게 된 진리들을 우리가 새삼스럽게 알아보게 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어쩌면 새로운 계시일 것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9월호, 이석규 베드로(가톨릭출판사 문화총서 편집간사, 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궁금해요 가톨릭교회 교리!] 가톨릭 신자들은 무엇을 믿는가? (2)



신앙 내용의 변화와 발전

 

신앙 내용에는 변화될 수 있는 면과 절대 변화될 수 없는 면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 안에서 교의와 교리가 형성된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교의들과 교리들은 특정한 역사적 환경 안에서 발전하였다. 이 발전 과정은 여섯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100-300년)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은 간단한 문제였다. 회개하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기본적인 요구사항(사도 2,38 참조)을 자기 삶을 다한 투신으로 실행하면 되었다. 차츰 그리스도교 신앙이 널리 전파되면서, 회개한 사람들은 사도행전 10장 34-43절에서 보듯이 사도들의 복음 선포 활동(케리그마)을 통해서 교육을 받았다. 차츰 사도들의 이러한 가르침에서 발전한 간단한 신앙 공식이 교리교육의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사도신경’의 기초가 되었다.

 

2. 교의 형성과 이단의 시대(300-500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열정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는 데 좋은 방법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어휘들로 예수님의 사명, 그분과 하느님 아버지의 관계 등을 설명하고자 하였고, 그러다 보니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게 되었다.

 

해석들이 구구하고 많아지는 가운데 이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교회는 신앙을 보존하고 그 내용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에페소, 콘스탄티노폴리스, 니케아 등지에서 공의회를 열었고, 그 공의회들에서 하느님, 삼위일체,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명, 교회,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에 관한 기본적인 그리스도교 진리들을 정의하였다. 이 기본적인 신앙 내용들을 간추려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고백으로 받아들이고 외우게 된 것이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다. 이렇게 교리 공식들이 표준화되었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공식들에 신학적인 설명을 덧붙인 신앙 진리 개요집을 편찬하였다. 그는 예컨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악을 향하는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원죄’라는 용어를 만들기도 했다.

 

3. 중세 시대(1200-1500년)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가 분리된 이후, 서방 교회는 체계화된 방식으로 신앙 내용을 해설하는 데 집중했다.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성사들과 관련된 의식(儀式)들과 규정들을 정비했다. 다른 교회들에서 거행되는 의식들과 관습들은 교회법에 바탕을 둔 로마 교회의 법적 체계에 비추어서 설명되었다.

 

이제 위대한 학자들이 나와서 그리스 철학의 사상과 용어들을 빌려서 신앙 내용을 해설하기 시작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입각해서 신앙의 진리들을 훌륭하게 설명하였다.

 

4. 종교 개혁(1500-1600년)

 

‘종교개혁’이란 서방 그리스도교회가 여러 갈래로 갈라진 분열을 말한다. 이 복잡하고 가슴 아픈 사건은 수많은 역사적,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지성적 상황들로 해서 일어났다. 종교개혁의 주된 요인은 교회 안의 타락과 권력 남용이라고 말하지만, 그 외에도 신앙과 신학의 분리, 국가주의 또는 민족주의의 발흥, 그리고 루터, 츠빙글리, 칼뱅, 헨리 8세와 같은 개인들의 신앙적 이념 등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다.

 

5.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의 대응(1545-1563년)

 

종교개혁에 대응하여 가톨릭교회는 트렌토 공의회를 열어 이미 정의되어 있던 신앙 진리들을 보호했다. 교의와 교리를 반복하여 강조하고, 그 내용들을 범주화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보증하기 위한 기준과 지침을 만들어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파문으로 견제했다.

 

이제 신앙 진리들은 온전히 보존되고 신자들에게 명확한 형태로 전달되었다. 간결한 물음과 대답 형태로 신앙 내용을 설명하는 교리문답이 개발되었다. 이는 당시에 아주 유용한 교수 방법이었다. 왜냐하면 진술이 명쾌했고, 가톨릭 신자들은 자기들에게 요구되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교리를 배운 신자들은 ‘천주교 요리문답’에 나오는 내용을 달달 외우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외우는 것으로는 개인의 영적인 성장과 발달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신앙 진리들이 추상적이고 지루한 공식 안에서 얼어붙어 있었으니 말이다.

 

6.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가톨릭 신앙이 현대인들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자리 잡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해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신앙이 신자들 사이에서 역동적이고 세상에 살아 있는 실재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교회를 재 활성화하고자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취지와 요지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공의회에서 나온 16개 문헌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다행스럽게도 현재 이 잡지에 공의회 문헌 해설이 연재 중이니 크게 참고가 될 것이다). 이 문헌들은 오늘날 교리적인 지침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따르기를 요구하기보다는 융통성 있게 작용하기를 권한다.

 

 

맺는 말 : 가톨릭 신자의 삶에서 믿음의 역할

 

믿음은 세례 때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중요한 세 가지의 덕목들 중 하나다. 궁극적으로 믿음(신덕)은 우리의 삶에서 주도권을 행사하시는 하느님의 선물(은총)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믿고 신앙 진리에 자유로이 투신할 수 있는 재량을 주신다. 개중에는 “나는 믿고 싶은데, 믿을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신덕을 선물로 받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신앙을 남에게 줄 수 없다. 부모가 자녀를 세례 받게 하고 신앙적으로 양육하는 것은 그 기본을 주는 것이고, 그들의 믿음은 유산처럼 자녀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그 믿음이 자녀에 의해 성장하지 않으면, 자녀가 그 믿음을 받아들이고 선택하지 않으면, 부모로서 더는 어찌할 수 없다. 부모가 신앙생활의 분위기를 제공했다면, 그것으로 자기들이 할 바를 다한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발전해야 하고, 그러려면 그 믿음에 대해 당사자가 자유로이 응답해야 한다. 신앙은 씨앗과 같아서 자양분을 필요로 하며, 그것을 공급 받지 못하면 죽고 말 것이다.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도 신앙생활을 시작할 수는 있다. 신앙은 외적인 계명이나 규정을 준수하는 것을 넘어선다. 심지어 지성적인 동의를 대체하기도 한다.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농부가 교황청에서 일하는 추기경보다 뛰어난 신앙을 가질 수 있다. 신앙은 의식(儀式)이 아니라 마음가짐과 가치관에 좌우된다. 신앙은 삶을 다채롭게 하고 일상생활에 영성적인 의미를 가져다준다. 다행히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급격하게 찾아온 변화를 적절히 그리고 충분히 설명함으로써 신자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게 해 주었다. 그리하여 신앙이 신자들에게 더욱 사실적이고 생생하게 다가오도록 해 주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10월호, 이석규 베드로(가톨릭출판사 문화총서 편집간사, 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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