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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신자들은 왜 어떻게 기도하는가?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9-21 조회수2,706 추천수0

[궁금해요, 가톨릭교회 교리!] 가톨릭 신자들은 왜 어떻게 기도하는가? (1)



들어가는 말

가톨릭 신자들은 다른 신자들과 함께 교회의 전례와 행사에 참여하도록 초대받는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실천에는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측면 외에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우리와 하느님(그리스도) 사이에는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일대 일의 관계가 있다. 그리하여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하느님께 응답하고 그분을 체험하는 것을 영성(靈性)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개인적인 기도 생활은 저마다 다른 처지에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느님께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고 동조하느냐에 따라 성장하고 발전한다.

가톨릭 신자는 영성과 기도생활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는가? 먼저 개인 영성의 의미를 알아보고, 이어서 우리가 하느님을 더 알고 체험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들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개인 영성

우리는 저마다 특별한 존재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라는 이사야서의 말씀(43,1)처럼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물론 교회가 이끌고 안내해 주겠지만, 우리는 각자 이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발전시키며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 가야 한다.

우리는 또한 하느님과 일치해서 내밀한 삶을 살도록 초대받았다. 이는 교회의 의식이나 행사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개인 차원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며 내면적으로 그분을 알아 가는 과정과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가톨릭 신앙을 충만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실재하시는 하느님을 우리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관한 진리들을 파악하고, 나아가 하느님의 진리에 의해 우리가 파악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삶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구체적인 실재로서 느끼지 못한다면, 가톨릭의 외형적인 실천이나 믿음의 표현은 한낱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성당에 오면 밖에서 하느님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평가하고 판단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그 안으로 들어가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아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은총을 오직 교회의 활동들을 통해서만 주지는 않으신다. 그분은 시장에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영성적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고, 그분이 하시는 일에 경탄하는 것이고, 온 세상에 펼쳐 보이시는 그분의 손길을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와 더불어 역사하시는 주님의 면모를 곳곳에서 발견함으로써 우리 삶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꼭 장엄한 모양으로 다가오지만은 않으시며, 우리 각자에게 독특한 모양으로 다가오신다. 그분은 해질녘에, 비가 올 때, 우리가 웃거나 또는 음악을 들을 때 파악되고 체험될 수 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하느님의 계시에 마음을 열기만 하면, 그분은 우리의 삶 안에 들어오신다.

어느 젊은 주부가 있다. 그는 소소한 집안일을 하면서 줄곧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어쩌면 자기가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생활에 대해, 자신의 태도에 대해, 자신의 믿음에 대해 시시콜콜히 하느님께 말씀드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 사이엔가 그는 관상기도와 영성에서 제법 깊은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이렇듯 영성은 선택된 소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하느님과 더욱 내밀한 관계를 맺도록 초대된다. 우리는 자기 나름의 방식에 따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예컨대 하느님께 개인적으로 청할 것이 있는 사람은 개인으로서 하느님을 만나면 된다. 다만 역동적인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현존에 응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친밀한 관계를 맺자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과 영성적인 시각에서 하느님께 응답하는 우리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섭리하신다. 이루 헤아릴 수 없도록 크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고 당황하기도 하고, 경이로워하며 우리가 작고 하찮다고 느끼기도 한다. 하느님을, 그분의 방식을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우리는 그분의 다른 면모들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분께 이끌리고 매료된다. 우리 삶에서 하느님의 현존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체험된다. 그분은 때로는 부드럽고 조용하게, 또 때로는 막무가내로 우리 삶에 들어오신다.

아무튼 하느님은 우리가 필요하지 않으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꼭 필요하며, 그분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우리를 그야말로 사람이 되게 만든다.

흔히 우리는 하느님을 무어라 규정함으로써 그분을 더욱 이해하고자 애쓰지만, 이제는 그분을 달리 의미 있게 만나야 한다. 그분이 당신 자신에 대해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방식에 맞추는 것이 그 방법이다. 모든 관계가 그러하겠지만,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우리가 그분과 더욱 친밀해지기 위해 시도하는 것들도 이렇게 또는 저렇게 규정되거나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영성은 성장해 가는 과정에 있는데, 그 과정에는 밀물이 있고 썰물이 있다. 하느님이 때로는 아주 가까이 계시는 듯이 보이지만, 또 때로는 과연 계시기나 한지 의문스러울 때도 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해 있고 더러는 그분을 알아 뵙는 것은 호사스런 일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는 인간 조건의 일부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하여 우리 인간을 만드셨으니, 오 주님, 우리 마음은 당신 품에 들기까지는 편히 쉬지 못하리이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마따나, 우리는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졌고 우리 운명의 궁극은 하느님이다. 우리는 하느님께로 돌아가기 위해 하느님에게서 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점을 이따금 간과한다.


개인 영성 안의 기도, 그 역할과 형태

하느님과 친밀해진다는 것은 기도를 우리 일상생활의 일부로서 발전시키는 것이다. 기도는 기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에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 부족하거나 또는 우리보다 더 위대한 존재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을 때 기도한다. 그래서 나는 운동선수가 중요한 선발전에서 탈락한 것을 알았을 때 기도한다. 찬란한 낙조를 보면서 기도한다. 구급차의 다급한 소리가 들려올 때 기도한다.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경험이 없어도 쉽게 그리고 익숙하게 기도할 수 있다. 살다 보면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별난 일들이 더러 일어난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기도할 수 있다.

기도는 내적인 긴장을 풀어 주고 위안을 준다. 그런데 기도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느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 때 비로소 가능하다. 병원 응급실을 생각해 보라. 한편에서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정신없이 바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응급 환자의 보호자가 애타는 심정으로 지켜보며 기다린다. 이럴 때면 누구라도 열렬히 기도하게 된다.

기도의 형태와 종류는 다양하다. 우리는 하느님과 의미 있게 소통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친숙하고 영성적으로 깊어지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는 기도 방식을 택한다. 가톨릭 신자들은 대체로 다른 신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 기도문을 외우는 것, 기도서를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그런데 이것들 말고 다른 기도 형태나 방법은 없을까? 우리는 이 방식을 저 방식보다 좋아하여 선택할 수 있지만, 우리의 기도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들을 살펴보자. 사람들과 맺는 관계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서도 체험과 창의적인 수용이 필요할 것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2년 9월호, 이석규 베드로(가톨릭출판사 문화총서 편집간사, 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궁금해요, 가톨릭교회 교리!] 가톨릭 신자들은 왜 어떻게 기도하는가? (2)



전통적인 기도 방식과 새로운 기도 형태들

가톨릭 신자들은 사도신경에서 묵주기도에 이르기까지 기도문을 외우는 전통적인 기도 방식에 익숙하다. 이런 기도는 자칫하면 판에 박힌 듯 습관적인 의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기도문을 소리 내어 외우거나 또는 소리 없이 바치면서 그 구절들을 하나하나 음미하고 그 뜻을 묵상하다 보면 전혀 새로운 느낌과 통찰을 얻게 될 것이다. 계속 기도하다 보면 영적인 고요를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혼자서도 기도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기도 한다. 본당이나 단체에서 특별한 지향을 두고 묵주기도나 9일 기도를 바칠 때는 신자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한다. 특히 성무일도는 본래가 공적으로 바치는 기도다. 성무일도는 오랫동안 사제들과 수도자들만이 바치는 기도로 인식되어 왔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개인으로나 단체로 성무일도를 바치는 평신도들이 많아졌다.

한편, 영성을 쇄신하고자 하는 노력과 더불어 세상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 대한 더욱 깊은 인식이 이루어졌다(성령 쇄신 운동). 그리하여 살아 계시며 활동하시는 성령에 초점을 맞추어 즐겁게 선포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기도 형태가 부상했다. 이 기도는 표현도 역동적이고 열정적이다. 그래서 조용한 기도를 선호하는 사람은 이 기도를 시끄럽다고 여길 수도 있다.


즉흥 기도

우리는 즉각성(인스턴트)의 시대에 살고 있다. 온갖 편의용품들이 즉각적인 만족을 원하는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 기도 역시 그때그때 즉석으로 바칠 수 있다. 우리는 짧고 즉각적인 기도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바칠 수 있다. 예컨대 동방교회 신자들은 오랫동안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를 반복해서 바치곤 했다. 이러한 기도를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해주는 방법으로 여긴 것이다.

우리는 일을 하든, 여가를 즐기든, 집에 있든 간에 짤막한 기도들을 통해 주님과 함께할 수 있다. 그러한 기도는 구태여 공식적이지 않아도 되며, 우리가 성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사용할 수 있다. “예수님, 지금 제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제가 가장 좋은 것을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청하는 것도 아주 의미 있는 기도가 될 수 있다.


창의적인 기도

우리는 그리스도와 가까워지면 어디서나 주님의 현존을 느끼게 된다. 하느님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 현존하신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대중가요를 들으면서도,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볼 수만 있다면,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그분은 떠들썩한 시장에도, 침묵 가운데에도 계신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 영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이처럼 창의적으로 성찰하노라면, 우리는 우리 삶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보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 안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실 때까지만 우리를 열고 내어 드린다면, 더욱 깊은 통찰이 우리에게 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바닷가에서도, 산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자신의 방에서도, 교회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것을 기도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

창의적이라고 할 때는 자유가 전제된다. 우리는 주님을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서 편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는 관계없는 일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하나 되어서 사는 사람은 하느님과 관련되는 일에만 몰두하려고 한다. 아빌라의 성 데레사는 “하느님과 내가 전부다.”라고 말했고, 그런 삶을 살았다.

더러는 주님께서 느닷없이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신다. 그때 우리는 그야말로 전적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절정의 순간을 체험한다. ‘다시 태어나는 것’과도 같다고 할 만한 순간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 열정적이고 강력한 영적 체험은 특별한 순간에 온다. 즉 아기가 태어날 때, 성탄 자정 미사와 같은 전례에 참석할 때, 우리가 조용히 기도할 때 갑작스레 찾아온다. 다만 이러한 체험은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계획될 수 없을뿐더러 반복되지도 않는 이 체험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선물이다.


침묵 기도 : 관상(觀想) 기도

기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대개 하느님께 다다르기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할 바를 염두에 둔다. 우리는 흔히 일상적인 관심사들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고, 이것들에 대해 무언가 표명하기 위한 행위들, 말들, 의식(儀式)들에 신경을 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씀드릴 때 하느님은 귀담아 들으신다는 사실이다.

시편 저자는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라고 충고한다. 평생을 사랑하는 가운데 함께 지내며 해로한 부부 사이에 유지되어 온 관계를 생각해 보자.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하는 가운데 흘렀다. 그들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온 밤을 보낼 수 있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거기에는 오직 사랑만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는 것이 침묵 기도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다면, 그저 그분의 사랑을 느끼며 조용히 명상을 하면 된다. 말도, 행위도 필요치 않다. 이는 누구나 해볼 수 있는 방법이지만, 수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시간과 인내가 요구된다. 예전에 한 수도자는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러면 하느님이 나를 보아 주신다.”

우리는 ‘멈춰’ 있기에는 너무나 바쁘다. 우리는 우리 식대로 계획을 세우고, 조절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시간을 하느님께 드리면, 하느님은 당신에 대해 알게 해 주신다.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자기 내면에 집중하기 위해서 아무런 말도 없이 시간을 내어 드리고자 노력하며, 이를 위해 하나의 말이나 생각에 초점을 모은다(향심기도). 이때 깊은 통찰과 성찰적 태도는 평화와 고요를 경험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개인 영성을 위한 다른 수단들

진지하게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기도가 자연적으로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내 깨달을 것이다. 기도는 믿음과 신실함을 가지고 바쳐야 한다. 그러므로 준비가 필요하다.

기도를 쉽게 또는 잘 바치려면 유용한 도움을 활용해야 한다. 평일 미사는 우리의 영성적 감성을 계발하게 해 준다. 영적 독서는 하느님과 관계를 잘 유지하는 이들의 통찰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본당이나 기관에서 마련한 피정에 참석하는 것은 영성 생활에 열정적으로 집중하게 해 준다. 또한 영성 지도를 받는 것은 하느님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게 해 준다.

이제 성 아우구스티노가 체험한 바를 우리도 체험해 봄직하다.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가장 위대한 로맨스다.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것은 가장 큰 모험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최고의 성취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2년 10월호, 이석규 베드로(가톨릭출판사 문화총서 편집간사, 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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