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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음살이: 세상의 혼, 그리스도인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29 조회수3,067 추천수2

[세상과 교회 그리고 믿음살이] 세상의 혼, 그리스도인

 

 

이번 호에서는 본당 공동체를 구성하면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 교우들이 얼마나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성찰한다. 이 같은 성찰에는 사목자로서의 부끄러움과 함께 평신도 교우들의 분발을 기대하는 소망이 담겨있다.

 

 

세상을 살아있게 하는 존재, 그리스도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은 “영혼이 육신 안에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서 그 혼이 되어야 한다.”(38항)는 표현으로 평신도 그리스도인을 칭송한다. 일선 본당에서 성직을 수행하는 필자는 이 구절을 외울 때마다 부끄럽고 한편 뭉클해진다.

 

사목자로서 하느님과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한다는 자부심을 한순간에 부끄럽게 하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마다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며, 그 어려움이라는 것을 어설프게 경중으로 저울질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당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교우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편하게(?) 사목하는 필자는 교회 울타리를 넘어 세상 한복판에서도 분투하는 우리 교우들의 어려움 앞에서 마냥 부끄럽다.

 

우리말에 “혼이 나갔다.”, “넋이 빠졌다.” 따위의 표현이 있다. 하나같이 심각한 상태를 뜻하는 말들이다. 그냥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거나,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느니만 못한 상태를 이야기할 때, 또는 본래 뜻한 것과는 전혀 다른 길에 접어든 뒤에 그 탓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했을 때, 그러니까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하는 말들이다. ‘혼’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 세상의 혼이 된다는 것은 세상을 살아있게 한다는 뜻이다. 알맹이 없는 ‘껍데기는 가라’고 어느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혼이 없는 세상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세상을 살아있게 하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교회의 칭송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교회의 성화 소명은 평신도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은 풍성한 열매를 맺을 하느님의 살아있는 알맹이 일꾼이다. 평신도라 함은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어 …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에 … 참여하고 … 자기 몫을 교회와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교회헌장, 31항).

 

필자는 가끔 교우들에게 가벼운 농담처럼 말한다. “성당은 고요하게, 여러분 사시는 동네, 직장, 학교는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의 목소리로 시끄러웠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이다. 성당에서 교우들끼리 나누고 사귀고 섬기는 삶은 분명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바라시는 것은 “자신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모든 현세 사물을 (복음적 가치로) 조명하고 관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일이 언제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발전하여 창조주와 구세주께 찬미”(교회헌장, 31항)가 되도록 하는 일이다.

 

 

교회는 고도(孤島)가 아니다

 

일선 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는 필자는 우리 교우들이 교회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있으며, 사목자들 역시 그렇게 훈련시키거나 눈감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질 때가 많다.  이 의구심이 사실이라면 세상에 그리스도의 얼굴은 누가 보여주겠는가? 그리스도인이 저마다 교회 안에서의 몫에만 심혈을 기울인다면, 세상 안에서의 몫은 누가 해야 하는가? 교회는 세상과 높은 담으로 폐쇄된 곳, 역사의 바다 위에 떠있는 고도(孤島)가 아니다. 교회는 세상을 밝히는 빛이며, 세상을 진리로 이끄는 외침이며, 세상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평신도들은 더 무거운 그러나 영예로운 짐을 지고 있다. 더 무겁다 함은 성직자나 수도자는 그 신분과 직무의 본성으로 교회라는 테두리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그 직무가 제한적이지만, 평신도들은 교회의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중의 신분과 이중의 직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예롭다 함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세상 어디에서나 널리 가 닿도록 노력해야 하는 몫을 지녔기 때문이다. 평신도에게 맡겨진 이 짐은 그 자체로 은총의 초대이다.

 

이 영예로우나 무거운 짐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어쩌면 은총의 잔치에 초대를 받았음에도 예복을 갖추지 않은 채 나서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보자. (필자의 판단으로는 평신도들이 예복을 갖춰 입지 않는 것을 평신도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오히려 목자들의 허물로 돌려야 마땅하다. 목자들은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의 품위와 책임을 인정하고 향상시켜야 하며 하느님 백성의 영혼들에 대한 셈을 치러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교우들은 ‘성당에 가는 것’으로 신앙을 드러낸다. 그런데 최근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통계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우리나라에 있는 각 종단과 교단이 밝힌 ‘믿는 사람’의 숫자가 무려 7천만 명이 넘는다는 것이다. 남북이 통일이 된다면 모를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숫자다. 억지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각 종단과 교단에서는 그만큼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편 국가는 정기적으로 인구조사를 한다. 가가호호 방문하여 직접 조사하여 가능하면 정확한 통계를 낸다. 이 통계에 따르면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밝힌 사람은 전 국민의 51% 정도다. 필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황당함이 아니다. 신앙생활을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실천하고, 담 밖의 세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의 현실이다.

 

각 종단과 교단이 밝힌 대로 7천만 명이 과장이라 치자. 대략 규모가 큰 종교나 종단을 꼽으라면 그리스도교, 불교, 그리고 유교를 꼽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불가에서는 부처님의 자비와 해탈과 극락왕생을, 유교에서는 사람과 세상의 도리를 가르칠 것이다. 각각의 종교인들은 그 가르침을 따른다고 할 것이다. 적어도 그 가르침대로 살려고 애를 쓴다고 할 것이다. 그런 교인이 우리가 사는 오늘날 이땅에 7천만 명이나 아니 2천 5백만 명이나 있다면, 역사는 완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완성의 순간을 코앞에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인교인사(人敎人寺)’인 이땅은 하느님 나라?

 

특별한 날에, 특별한 공간에서는 그 역사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인교인사(人敎人寺)’가 장관인 그만큼 다른 날 다른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삶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고해(苦海)에서 허우적이는 것이고, 이집트에서 억압당하는 것이며, 계속되는 광야의 시련인 것이다. 얼마나 절망의 상태이면 신문마다 텔레비전마다 희망을 갖고 이겨내자고, 이겨낼 수 있다며, 자신감을 가지라고 윽박지르는가? 얼마나 절망의 상태이면 세계를 제패(?)한 어느 가녀린 소녀까지 희망의 전도사로 내모는가? 그녀처럼 우리도 다시 우뚝 설 수 있으며, 그녀의 쾌거는 시름에 젖은 국민의 가슴을 모처럼 확 풀어주었다는 친절한 해설까지 들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정말 이상하다. 하느님 나라와 극락은 흔적을 감추고 오히려 고통과 절망의 그림자는 짙게 드리우는데, 인교인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느님 나라와 극락이 교회 건물과 사찰의 대웅전에 갇혀버린 탓이다. 교회 건물 밖에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가 마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처럼 열매를 맺지 못하고, 대웅전 밖 속세에서는 부처님의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나 대자대비의 씨앗이 길에 떨어져 새가 와서 쪼아 먹는 탓이다. 교회 안에서는 주님의 빵을 나누어 먹은 한 형제라 노래하지만 교회 밖에서는 빵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싸워 이겨야 할 경쟁자일 뿐이다. 사찰 안에서는 성불하라 인사하지만 속세에서는 약육강식할 포식자와 먹잇감의 관계일 뿐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앞서 밝힌 것처럼 예복을 잘못 골라 입은 탓이다. 무릇 종교는 ‘거룩함’을 지향한다. 그런데 그 거룩함이 주일이라는 하루, 성당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갇혀있다면, 그 거룩함은 하느님의 거룩함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낸 화려한 무덤에 불과하다. 하느님과 소통하고 이웃과 일치를 이루기보다는 사람들의 욕망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잔치 예복을 나름대로 잘 골라 입고 잔치에 갔는데, 정작 잔치를 연 주인은 그 예복으로는 그곳에 입장할 수 없다고 하는 형국이다.

 

우리가 입어야 할 잔치 예복은 무엇일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평신도들은 그리스도께 봉헌되고 성령으로 도유된 사람들로서 … 성령의 풍부한 열매를 맺도록 부름을 받고 또 가르침을 받는다. 그들의 모든 일, 기도, 사도직 활동, 부부생활, 일상 노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이 되고, 성찬례 거행 때에 주님의 몸과 함께 정성되이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된다. 또한 이와 같이 평신도들은 어디에서나 거룩하게 살아가는 경배자로서 바로 이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교회헌장, 34항) 하는 사제직을 수행한다.

 

 

잔치는 성당에서 주일에만 열리는 것이 아니다

 

잔치는 성당에서 주일에만 열리는 것이 아니다. 세상 일상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잔치의 초대다. 이 세상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봉헌해야 할 거룩한 제물이 되어야 한다. 세상을 하느님 받으시기에 괜찮은 제물로 가꾸어야 할 그 막중한 임무가 그리스도인 평신도에게 있다. 평신도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동시에 경제인이며, 정치인이며, 예술가이며, 노동자이며, 학자이며, 그리고 어머니이며 아버지다. 현세 사물에는 그 고유의 질서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그 모든 일은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주님의 몸과 합하여 이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것이다.

 

현세질서에서 실현해야 할 가치를 교회는 사랑과 정의와 평화라고 고백한다. 경제질서가 마땅히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사람을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시장에 무작정 내몰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의의 규범에도 사랑의 질서에도 어긋나는 것이며 평화의 열매를 가져올 수 없다. 정치질서도 마찬가지다. 정치권력은 국민, 특히 약한 이가 존엄한 삶을 꾸려가며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정의의 질서를 세우고 공동선을 촉진하는 수단이어야 하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

 

학문도 문화도 모두 시장 경제논리로 바라보는 것은 부당하다. 하느님을 닮아 창조되었고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로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함을 사고파는 상품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종교를 서비스산업 정도로 여기거나 현혹하는 것도 살펴볼 일이다. 신도들이 이른바 마음의 평화와 문화생활을 제공받아 만족을 얻고, 그 대가로 재물을 건넨다면 그것은 시장에서 서로의 이익을 위해 맺은 계약을 이행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교회의 급속한 교세팽창과 종교의 물량주의 따위의 부정적 현상이 심심치 않게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다.

 

현세질서에서 “평신도들은 … 죄악으로 몰아가는 세상의 제도들과 조건들을 바로잡아, 이 모든 것이 정의의 규범에 부합하고 …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 활동과 문화(삶의 환경의 총체, 곧 정치, 경제, 사회, 제도, 국제질서 따위)에 도덕 가치가 스며들게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더 좋은 세상의 밭이 마련되고, 교회의 문도 더 넓게 열려, 거기에서 평화의 선포가 세상으로 퍼져 들어가야 한다.”(교회헌장, 36항)는 교회의 호소는 여전히 유효하다.

 

성당 안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세상 안에서도 세상의 혼이어야 한다.  오늘도 교회의 성사를 통해 나누어 받은 하느님의 그 은총으로 세상을 거룩한 제물로 가꾸어 봉헌하는 이땅의 용감한 그리스도 평신도를 존경한다.

 

[경향잡지, 2009년 6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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