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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 풍수원 성당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숨어 신앙을 유지한 산골에 세워진 강원도 첫 번째 성당
지번주소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 1097 
도로주소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경강로유현1길 30
전화번호 (033)342-0035
팩스번호 (033)343-5694
홈페이지 http://www.pungsuwon.org
문화정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성당),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3호(구 사제관)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풍수원 성당과 정규하 신부: 첫 한국인 본당 사제의 사목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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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11 조회수337 추천수0
파일첨부 풍수원 성당과 정규하 신부_첫 한국인 본당 사제의 사목 활동.hwp [136704]  

풍수원 성당과 정규하 신부


- 첫 한국인 본당 사제의 사목 활동*



국문초록

 

1896년 4월 26일 서울 약현 성당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천주교 사제 서품식(敍品式)이 거행되었다. 이날 말레시아의 페낭 신학교를 거쳐 용산 신학교에서 과정을 마친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1863~1943)는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1863~1929) · 강성삼(姜聖參 라우렌시오, 1866~1903)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 사제가 되었다.

 

정규하는 한국인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강원도 최초의 본당인 풍수원에 파견되었다. 이 본당 설정은 1801년 신유박해 이래 산골에 숨어든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었던 일에서 시작되었다. 1886년에 체결된 한불조약이 1887년부터 효력이 발휘되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자 1888년 조선 대목구장 블랑(Blanc, Jean Marie Gustave 白圭三, 1844~1890) 주교는 강원도 최초의 본당을 그곳에 창설할 수 있었다.

 

정규하 신부는 신자들과 직접 벽돌을 구워가며 강원도에서는 최초로 서양식 성당을 지었다. 한국인 신부로서는 첫 번째 성당건축이었고, 국내에서 일곱 번째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완공되었다. 그는 학교 교육, 환자와 빈민 구제 활동을 통해 신자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모든 이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광복 이후 신자들은 그가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난 의병과 독립군을 지원하였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신자들을 위해 본당 산하에 성부안나회를 비롯한 신심 단체들을 설립하였고, 성소 계발에 관심을 기울여 생전에 6명이 사제 서품에 이르렀고, 성체현양대회를 실시하였다. 반드시 성체 성혈 대축일을 기해 실시하는 풍수원 성체현양대회는 6·25 전쟁 기간 3년을 제외하고 해마다 거행되어 2019년에는 96차를 맞는 전통이 되었다. 성녀 안나를 주보로 하는 성부안나회(안나회)는 현재까지 유지되는 부인회의 전통이 되었고, 본당 출신 신부는 30명을 훌쩍 넘어섰으며, 그보다 더 많은 수도자를 배출하였다.

 

정규하 신부가 첫 번째 한국인 본당 신부로서 남긴 업적은 본당 사목의 성공적인 한 전형이 되었다. 그가 사목하는 동안 풍수원 본당을 모태로 경기도 일부와 강원도 지역으로 여러 본당이 분가하여 뻗어나갔고, 춘천교구와 원주교구를 이루는 출발점이 되었다.

 

 

Ⅰ. 머리말

 

1896년 4월 26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서울 약현 성당에서 사제 서품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1863~1943) 신부는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1863~1929)·강성삼(姜聖參 라우렌시오, 1866~1903) 신부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사제가 되었다.1)

 

정규하 신부는 서품 후 강원도 원주군 고모곡면의 풍수원2) 본당에 부임하였다. 풍수원 본당3)은 1886년에 체결된 한불조약이 1887년부터 효력이 발휘되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자 1888년 조선 대목구장 블랑(Blanc, Jean Marie Gustave 白圭三, 1844~1890) 주교가 르메르(Le Merre, Louis Bon Jules 李類斯, 1858~1928) 신부를 파견하여 창설되었고, 정규하 신부는 1896년에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47년간 사목하였고 선종 후 성당 뒷산에 안장되었다.4)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 閔德孝, 1854 ~ 1933)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1897년도 보고서에서 한국인 사제 정규하 아우구스티노의 첫 수확은 75명의 성인 영세자들이었고, 신입 교우의 개종 과정은 감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언급하였다.5) 1898년 보고서에서도 강원도는, ‘세속의 재산에는 빈곤하나 신앙의 선물에는 부유하고 순수한 신앙과 소박한 품행이 온전히 보전되고 있다’6)라 하였다. 그는 바로 이 신자들과 함께 조선조의 몰락과 일제에 의한 식민지 지배하의 혼란 속에서 신앙을 지켜내고 본당 공동체의 기초를 닦는 도전에 직면하였다. 그가 스스로 토로한 것처럼 이 시기에는 ‘정치적인 측면이나 사회 악습 면에서 볼 때, 박해시대보다 더 두려움을 가지고’7)사목에 임해야 했다. 사회 기강이 무너지는 현실 속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한 그의 사목 여정은 곧 풍수원 본당의 초기 역사가 되었고, 그것은 다시 경기도 일부와 강원도 전 지역 및 충청도 일대로 확장되었던 본당 사목의 한 전형이 되었다.

 

본고는 정규하 신부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 성과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 착안하여 먼저 그의 생애를 조망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가 사제로서의 활동을 교회의 최고 책임자에게 보고한 기록인 [사목 서한]을 일차 자료로 하여 《서울교구연보》, 《뮈텔일기》, 《경향잡지》의 내용과 교차 검토하였다. 유고인 《허원문답-성부안나회규칙책》과 <빈낭유학회고기>를 살펴보았고, 풍수원 본당 2대 회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하였던 최상종8)이 정리한 《안나회원인명부》와 《고별사》도 일차 자료로 삼았다.9)

 

그리고 교회 단체의 신문, 교우들의 증언10) 등을 대조하여 1세대 한국인 본당 신부로서의 사목 여정의 대략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Ⅱ. 사제 서품에 이르는 여정


1. 군난(窘難)11) 풍파와 유년 시절

 

정규하 신부는 1863년 8월 18일 충청남도 아산군 신창면 남방리에서 정기화와 한 마르타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12) 그의 유년 시절은 조카인 정원진 신부의 증언과 정규량 신부가 남긴 기록으로 알 수 있다.13)

 

충청남도 아산군 신창면의 남방제 마을엔 동래정씨(東萊鄭氏)들이 많이 살았다. 모두 가까운 친척들이었다. 정 아우구스티노 규하(圭夏)가 아직 어렸을 적에 인근 지방에 사군난(私窘難)이 일어나 천주교 신자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을 등지고 깊은 산속으로 몸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몽매하고 잔인하며 분별없는 박해의 바람이 남방제 마을에 불어오지 말란 법은 없으므로 이 마을 신자들은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하루는 아우구스티노의 어머니 한 마르타 여인이 마을 사람의 밀고로 관가에 잡혀 들어갔다. 며칠 후 다행히 방면되긴 했으나 그의 남편 정기화(鄭箕化 마태오)14)는 언제 또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므로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생각다 못해 가족을 데리고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났다.15)

 

여기에서 말하는 사군난(私窘難)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당시 교우들은 정부의 탄압이 아니더라도 갖은 핍박에 시달려야 했다. 대표적인 사군난의 예라 할 수 있는 1859년의 경신박해(庚申迫害)의 경우 당시 좌·우포도대장이었던 임태영과 신명순이 정부의 명령과 무관한 개인적인 반감으로 천주교도들을 탄압하였고 재산 몰수를 기도하였다. 세도가들과 그에 야합한 사적인 탄압도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계속되었다. 남방제16) 마을은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음에도 한 마르타는 누군가의 밀고로 잡혔다가 방면되었고, 또 다른 밀고자를 걱정할 만큼 곤란한 지경에 놓여 있었다. 교우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떠나야 했던 사정을 짐작하게 하는 유랑의 형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10세 전후의 어린 시절에 이미 군난(窘難) 풍파를 겪으며 동으로 서로 유리걸식(遊離乞食)하실 때 한 줌, 한 그릇 만큼의 곡식조차 있었겠습니까? 7, 8세 어린 동자가 나무를 한 단이나 짊어지고 부친을 따라 수십 리 되는 변두리 시장으로 팔러 다니며 피난살이를 하셨으니 그 고생이 어떠셨겠습니까? 가는 곳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는 이가 없으니 그 어느 누가 도와주었겠습니까? 춘궁기(春窮期)에는 풀뿌리로 연명하다 보니 식구들이 모두 부황이 들어 고생하는 지경에 이르는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생활이 곤란했건만 이것보다 더 황겁(惶怯)한 일은 밤낮없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포졸들의 수색이었습니다.17)

 

1863년생인 정규하 신부의 10세 전후는 병인박해(1866년~1873년) 시기와 일치한다. 정부의 탄압은 물론이고 사군난의 화살도 피할 수 없었던 그의 유년기는 한 마디로 ‘군난(窘難) 풍파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누릴 곳을 찾아 낯선 땅으로 유랑하던 시절’18)이었다. 정규하 신부 일가의 피란 생활은, ‘공주 땅 정산이라는 두메산골, 장호원 남쪽 마을’19)을 거쳐 현재의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에서 일단 멈출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15세 무렵까지는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20)

 

 

2. 성소와 우리나라에서의 첫 사제 서품

 

정규하 신부 일가가 정착한 소태면에는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정규하 신부 일가를 비롯하여 용인에서 온 유선근 바오로, 유명근의 선조와 고초골의 박도정 등이 옮겨와 살고 있었고 송회장이 공동체를 주도하였다.21) 이곳에서 정규하 신부는 ‘15~6세 소년의 나이였지만 슬기롭고 총명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우고 지켜서 모든 경문에 통달하였고 품행이 높았기 때문에 신자 공동체의 회장 직무를 대리하여 마을 청년과 아동들을 교리와 성경으로 열심히 가르치고 이끌었다.’22) 그리고 이곳에서 성소에 뜻을 두게 되었는데, 이 과정이 인상 깊었던지 최상종은 《고별사》에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낭독하였다.

 

“성경에 보면 오 주 예수께서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음(루가, 10, 2)’을 한탄하셨으니 내 결코 천주님의 품꾼이 되어 많은 영혼을 구휼하리라.”는 생각을 품으셨는데 이 열정은 날로 더하고 달로 깊어져 갔습니다. 이처럼 주 하느님과 성모님께 진실로 안배하심을 간구하시는 중에 속담에 ‘호사다마’라는 말처럼 어떤 모처에서 끈질기게 혼담을 청해오는 이가 있었습니다. 결국 부모님께서는 혼인할 만하다고 허락하시게 되어 혼례를 기약하는 문서와 관면문자를 받아 천장에 꽂아두게 되셨습니다. 이때 신부님의 마음은 매우 우울해졌고 급기야 은밀하게 혼사를 물리는 뜻을 편지로 써서 규수집에 전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굳이 나와 결혼하게 된다면 훗날 실례와 낭패를 보게 될 것’이라는 뜻을 전하여 혼례 약속에서 벗어났지만 막상 주교님께 누누이 마음을 정하여 올린 성소의 뜻을 허락하신다 하더라도 당장 입고 나설 옷조차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사정으로 해서 울적한 마음으로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가시던 신부님은 수리가 막 닭을 채가는 광경을 보게 되셨고 곧바로 고함을 치며 쫓아가셨습니다. 그러자 수리가 닭을 놓치게 되었고 급히 쫓아가 보니 닭은 말짱했습니다. 게다가 암탉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성한 닭을 안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죽을 뻔한 닭을 구해왔으니 이 닭은 잘 길러서 팔아 쓰겠다고 여쭙자 허락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암탉을 정성껏 기르시면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며 시간을 보내셨는데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셨습니다. 동편 하늘에 채색 구름이 어리고 그 가운데 휘황찬란한 분이 나타나셔서, “네 정한 뜻에 항구하라.”고 하시는 말씀에 너무 감격하다가 홀연히 잠에서 깨어 생각해보니 인자하신 성모님의 가르침이구나! 하면서도 너무 오매불망하여 꾼 헛꿈인가? 하며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던 중에 어느 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교님의 허가장이 도착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황감한 마음을 진정하는 한편 기르던 닭의 어미 새끼 수십 마리를 팔아 필목을 사 외출복을 지어 입고 서울로 올라가셨습니다. 서울에서 몇 달간 한문 공부를 하다가 세 사람이 뜻을 모아 빈랑도23)로 향하게 되니...24)

 

15세 무렵이면 관례를 치르고 혼처를 정하는 보통 양반집 자제들처럼 정규하 신부의 부모도 그의 뜻과는 무관하게 ‘옛날 풍습대로’25) 일찌감치 혼처를 정해 두었다. 이 일로 우울해하다가 스스로 파혼 편지를 쓸만큼 성소에 의지를 보였지만 쉽사리 허락을 받을 수 없어서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사제 성소에 대한 허락이 쉽지 않았던 데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장남이라는 것도 큰 이유가 되었다.26) 그러던 중, ‘액운이 겹쳐 간신히 장만한 집이 불타버리는 바람에 일가는 경기도 광주 땅으로 이사’27)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블랑 주교로부터 성소를 허락받을 수 있었다. 약관의 정규하는 자신이 양계로 모은 돈으로 의복을 마련하여 차려입고 1883년 8월에 상경하였다. 그가 성소에 대한 허락을 받기까지 보낸 5년여 시간은 적지 않은 기간이었다. 어렵게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과정은 <빈낭유학회고기>28)가 《경향잡지》에 게재될 때에도 본 글의 앞머리에 실렸다. 다만 정규하 신부가 꾸었다는 꿈은 제외되었고 ‘군난 풍파를 만나 피난할 만큼 오래된 집안의 신앙 내력, 장남이었음에도 성소에 뜻을 두었던 남다른 선택, 그리고 어렵게 정한 성소가 우연한 계기 속에 이루어졌음’을 잘 알 수 있도록 위 인용문 외의 상세한 내용도 함께 게재되었다.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 정규하 신부는 종현서당에서 잠시 한문을 수학한 후 페낭 신학교를 향한 장도에 올랐다.29) 그는 1884년 11월에 떠나서 1891년에 귀국하였고30),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남은 과정을 마친 후 1896년 4월 26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때의 사제 서품은 이 땅에서는 첫 번째로 이루어진 사제 서품식이었고 동시에 3인의 신부를 배출한 경사였다. 1836년 모방(Maubant) 신부가 입국한 이래 김대건 · 최양업 신부의 서품에 이른 시간이 10여 년이었다면 세 번째의 사제 서품이면서 이 땅에서의 첫 사제 서품에 도달하는 데는 무려 5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중요한 선교 임무로 두었던 파리외방전교회로서도 남다른 수확이었다.

 

 

Ⅲ. 풍수원 정착 과정

 

정규하 신부가 서품을 받고 풍수원에 부임하던 무렵 조선 왕조는 파국을 향하고 있었다.31) 그러나 현실의 한 편에서는 여전히 왕조의 전통을 고수하며 난국을 타개하려는 흐름이 있었고 화서학파(華西學派)가 그 중심에 있었다. 학파의 본거지인 양평은 풍수원과 인접해 있었고,32) 동학도의 교조 최제우가 사형되고 그 제자인 이경화가 영월로 유배되자 정선 인제 등 강원도 일대와 단양 등지는 이들의 숨은 활동지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존왕양이(尊王攘夷)를 기치로 일어난 의병과 축멸왜이(逐滅倭夷)를 기치의 하나로 내걸었던 동학도의 이념도 반외세(反外勢)에는 일치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소용돌이의 근거리이며 교통의 요지에 풍수원 본당이 있었고, 의병뿐만 아니라 동학도의 암약은 교우들에게는 또 다른 위협으로 다가왔다.33) 정부의 탄압을 피해 교우촌을 이루었고, 본당 설립으로 수시로 성사를 받을 수 있는 신앙 생활을 시작했던 풍수원 교우들은 또 다른 박해의 국면을 걱정하는 형편에 놓였다.34) 이처럼 정규하 신부가 부임할 무렵의 풍수원 일대는 뿌리 깊은 전통 의식이 기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틀로서 엄존하고 있었고 기존 체제를 유지하고자 일어난 의병과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동학도들이 번갈아 창궐하는 복잡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정규하 신부에 앞서 1888년부터 풍수원 본당 주임 신부로 있던 르메르 신부는 영향력 있는 지역 유학자들로부터 지속적인 저항에 시달려 왔다. 실제로 1892년에는 순회 방문 중, ‘신부가 부녀를 간통하고 임신하게 되자 약을 써서 낙태하게 하였다.’는 심각한 추문에 휩싸였다.35) 화서 학파의 문인인 안준문과 홍효백이 근거 없는 모함으로 르메르 신부를 압박한 것이었다. 상황이 심각하게 전개되자 1893년에 르메르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사건은 프랑스 공사까지 움직이는 교안(敎案)으로 비화 되었다. 그러나 르메르 신부는 그들로부터 직접적인 사과를 받지 못하는 등 해결 과정조차 만족스럽지 못했다.36)

 

이와 같은 상황에서 1896년 봄에 서품을 받은 정규하 신부는 뮈텔 주교가 애초에 임명한 지역인 하일37)로 가지 않고 풍수원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무렵의 정규하38)·르메르39)·부이용(Bouillon Camille 任伽彌, 1869~1947)40)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한을 종합해 보면 정규하 신부는 하일로 가는 길목인 풍수원에 머물게 되었고, 르메르 신부와 부이용 신부의 의견에 따라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1893년도부터 풍수원에서 수련 기간을 보낸 적 있는 정규하 신부에게는 본당이 낯설지 않고,41) 태생적으로 유학자들의 생리를 알고 있는 만큼 그가 풍수원을 맡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하리라 판단한 일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한편, 한 해 전인 1895년에 부이용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부엉골 본당은 감곡으로 이전하고, 원주에 새 본당을 설정’하자는 논의를 르메르 신부와 진행하였음을 참고할 수 있다.42) 그러나 주교의 권한을 지니지 않은 르메르 신부가 단정적으로 결정하여 보고하지 않았던 탓으로43) 뮈텔 주교는 정규하 신부가 불순종한 것으로 오해하였고, 이에 대해 정규하 신부가 해명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44) 결국 뮈텔 주교가 애초에 임명한 지역이 아니었던 풍수원에 정규하 신부가 정착하게 된 일은 동료 신부들의 사목적 논의와 배려, 그리고 각 지역이 지닌 특수한 사정이 개재된 합리적 결론이었다고 하겠다.

 

이때 르메르 신부가 정착하여 신설하였던 원주 본당은 1965년의 원주교구 설정 이래 주교좌성당으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45) 원주는 제천과 함께 영서와 영동, 경상도와 충청도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여러 지역을 아우르고 있다. 현재의 교세에 비추어 본 결과론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첫 번째 한국인 본당 신부가 풍수원에 정착하고 선교사가 원주 본당을 설정한 일은 의미 있는 역사의 출발이 되었다. 은거지로서의 풍수원이 은둔에서 깨어나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한 단계 도약을 위한 신앙의 성숙이 필요한 곳이었다면 원주 지방은 복음 선포가 필요한 선교지의 상태였기 때문이다.46)

 

 

Ⅳ. 풍수원 성당에서의 사목활동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정규하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고 본당 사목을 시작할 무렵의 우리나라는 총체적인 혼란기였고, 한국 교회는 오랜 박해에서 겨우 빠져나와 비로소 본당을 설정하고 본당 내에 학교, 고아원, 양로원, 시약소 등을 설치 운영하며 선교와 사회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하던 때였다.47) 1891년 8대 교구장이 되어 재입국한 뮈텔 주교는 순교자의 땅에서 더는 박해받지 않는 교회가 되도록 신자 공동체를 보호하고 천주교회가 견고하게 자리 잡도록 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파리외방전교회가 회칙에서 천명하고 있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 기성 신자의 사목, 외교인의 개종’이라는 주요 목표를 이행하는 데 주력하기에도 여력이 없었다. 더욱이 ‘당시의 지배적인 신학 사상이나 영성이 개인 중심적이었기 때문에 개인의 구령(救靈)이 최우선 과제’로 간주 되었고 민족 공동체가 봉착하게 된 역사적 문제를 교회적 관점에서 살피고 해결하려는 방안은 적극적으로 고려되지 않았다.48) 그러나 한국 교회가 오랜 박해에서 겨우 빠져나왔고, 개인 중심의 영성이 지배적이었다 하더라도 서구 열강의 도래와 일제의 침탈에 대항하여 민족의 자주권을 천명하고 국권을 수호하는 일은 누구라도 감당해야 할 민족 공동체의 과제였다. 더욱이 시대의 추세를 따라 근대화에 편승하는 문명국가를 이루는 일 역시 또 하나의 시대적 과제였다고 한다면 당시 교회가 취한 수구적인 태도는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관해서는 선교사들도 인지하였음을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내는 1908년도 보고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아직 조선인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벅차다고 보았다.49)

 

이와 같은 때에 처한 1세대 한국인 신부들은 그들이 미처 자각하지 못했을지라도 민족 공동체의 자주권 수호와 건전한 문명 세계로 진입하는 시대적 과제를 식별하고 실천하여야 했다. 동시에 겨우 얻어낸 신앙의 자유와 교우들의 평화를 지켜내는 토대가 되어 줄 본당 사목을 일구어내는 일은 그들이 최우선 과제로 의식해야 할 임무였다.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 보편적 가치의 실현과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는 일은 언제나 최우선적인 사목의 목적이 되어야 했다. 정규하 신부가 사제로 생활한 지 22년 되던 해에 보낸 사목 서한 속에서 ‘정치적인 측면이나 사회 악습 면에서 볼 때, 박해시대보다 더 두려움을 가지고’50) 있다고 토로한 일은 당시의 한국 교회가 처한 어려운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를 만난 정규하 신부는 교회 안에서는 신자들과 힘을 모아 풍수원 성당을 짓고, 성부안나회(聖婦安那會)를 설립하며, 사제 성소를 계발하고, 성체현양대회를 실시하며 신앙의 모범을 정립하였다. 부임 초기에는 화천, 인제, 양구, 홍천 등 강원도 전역과 경기도 일부를 포함해 12개 군, 29개 공소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관할하였고 재임 중에 여러 본당을 분리하여 확장하였다. 1920년에는 양평 본당(현 수원교구)과 춘천본당(현 춘천교구), 1923년에는 송정 공소를 홍천본당(현 춘천교구)으로, 1930년에는 횡성 공소를 횡성본당으로 확정하였다.51) 광범위한 사목활동 중에도 뮈텔 주교의 명에 따라 1906년에 마르코 복음을 번역하여 제출하였고52), <빈낭유학회고기>로 페낭신학교 유학 과정을 기록하였다.

 

대 사회적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 전반에도 영향을 미치는 업적을 남겼다. 1910년 성당에서 시작한 삼위학당은 성심학교를 거쳐 광동학교(光東學校) 설립으로 이어져 산간벽지에서도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53) 교회의 공통 사업이었던 성영회(聖?會)54) 활동을 비롯하여 무료로 침술을 시술하는 등 빈민과 환자 구제에도 적극적이었다. 이 모든 일의 혜택은 신자뿐만 아니라 지역민에게도 고르게 주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동학도와 의병 활동에 따른 사회 현안에 균형 있게 대처하며 전통이 무너지고 사회의 기강이 해이해진 혼란 속에서 향리의 지도자로서 제 역할을 다하였다.

 

이제 정규하 신부의 사목 활동을 교회 안의 사목 활동과 대사회적 활동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는데, 그 실상은 모두 교회 안에서 시작하여 지역사회로 확장된 일이었다.

 

 

1. 교회 안의 사목

 

(1) 성당 건축

 

정규하 신부는 부임 첫해인 1896년에 성당을 개축하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이때는 전임 르메르 신부가 사용하던 낡은 한옥을 12간 규모의 초가 성당으로 다시 짓는 일이었다.55)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풍수원 성당의 건축은 1906년 이전부터 계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56) 그러나 아직 1907년에는 성당을 짓기에 준비가 부족했던지, “저의 신자들은 새 성전을 짓기를 원해서 대략 엽전 15,000냥 정도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 총액으로는 새 성전을 짓기에 충분하지 못하므로 아직 시작할 엄두를 못 내고 있습니다만, 신자들은 성전 신축을 시작하라고 끊임없이 성화입니다.”라 보고하였다. 1909년 1월에야 비로소 새 성당을 짓기 위해 중국인 기술자 진 베드로와 계약을 체결하였고 건축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때의 보고에는, ‘규모는 넓이가 대략 30간, 모양은 두세 부주교님의 (약현)성당57)’을 닮았다고 기록하였다. 이렇게 몇 년에 걸쳐 계획하고 교우들과 함께 비용을 저축했고 1909년에 착공하여 1910년 2월 이전에 완공할 수 있었다.58) 그리고 그해 11월 9일 뮈텔 주교가 방문하여 직접 봉헌식을 주례하였고 ‘예수 성심’을 본당 주보로 정하였다. 성당건축을 마무리한 후 1913년에는 사제관을 지었고 비로소 풍수원은 명실상부한 본당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59)

 

이 성당을 짓는 동안 풍수원 인근의 신자들은 물론 먼 곳에서도 교우들이 먹을 식량을 가지고 와서 수일간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돌아갔다.60) 성당건축에 돈을 보탠 이들은 풍수원 교우들 외에도 많았다. 산에서 나무를 베고, 벽돌을 굽고 나르는 일들은 대부분 자발적인 부역으로 이루어져 공정을 앞당겼다. 이렇게 교우들을 하나로 모으며 약 1년여 만에 한국인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성당을 지었다.

 

풍수원 성당은 강원도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자 국내에서 일곱 번째인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서 근대 건축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1982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69호로 지정되었고, 사제관은 2005년에 등록문화재 163호로 지정받았다.61)

 

(2) 성부안나회(聖婦安那會)62) 설립

 

성당건축을 마무리하고 축성까지 마친 바로 다음 해인 1911년 3월 11일에는 안나회(성부안나회)를 시작하였다. 최상종이 기록한 《안나회원인명부》에서는 안나회의 설립과 활동에 대한 경과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이 모임은 처음에는 여교우들의 강습회63)로 시작하였고, 회원들은 기도, 교리 공부,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를 함께 하며 온갖 방법으로 ‘주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는[事主救靈]’64) 삶을 살고자 하였다.

 

《안나회원인명부》는 <안나회 서문>, <안나회규칙(會規則)>, <임원(任員)>, <회원중규칙(會員中規則)>, <회원의명칭(會員의名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나회서문>에서는 회의 목적, 회원의 의무 등과 회원들이 1911년부터 1930년대에 이르는 동안 겪은 우여곡절을 기록하였다. <안나회규칙>을 두어 회의 명칭, 입회 대상, 의무를 규정하였는데, 회원의 의무는 ‘외교인들을 귀화케 하고 냉담 교우들을 위하여 권화함’, ‘회원이 무슨 사정이 있어 매우 근심하면 도와줄 것’이었고, 특별 의무로서 ‘자기(自己)를 이기어 덕(德)에 나아가는 일’이 있었다. <임원>항을 두어 실무를 담당하는 6인의 명칭과 의무를 규정하였다. <회원중규칙>을 두어 입회하고자 하는 예비 회원과 입회한 정회원 등 모든 회원이 지켜야 하는 의무를 상세히 명시하였다. <회원중규칙>은 15개 항으로, 그 첫 번째는 회중 규칙을 빠짐없이 지키는 일이었다. 매 주일과 재통고날(금요일)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모여 십자가의 길 하기, 매월 1회 이상 고백성사와 성체성사 받기, 매월 첫 첨례 육(첫 금요일)에 재를 지켜 모은 돈으로 월회비를 마련하기, 사순절에는 별도의 자선 베풀기, 자기 집안일을 부지런히 하여 모범이 되기, 주일과 재환희날(목요일) 오후 8시에는 의무적으로 모여 문답을 외우고 함께 기도한 후, 기도가 끝나면 즉시 집으로 돌아가기 등이다. 또 입회할 때는 형편에 맞게 입회금을 내야 하고 5개월의 시험기를 거친 후 정식 회원이 될 수 있었다. 회원이 성사를 받지 않거나 나쁜 행동을 한 경우, 두세 번 권했는데 고치지 않으면 퇴출하였다. 회원이 자유로 탈퇴하거나 이유가 있어서 퇴출할 때에도 입금한 회비는 돌려받을 수 없었다.

 

당시 풍수원 본당에는 수녀가 되고 싶어 하던 동정녀들이 있었는데,65) 이들도 역시 안나회원으로 활동하며 일반 회원보다 더욱 엄격한 규칙을 지켰다. 1922년 봄에는 동정녀들을 위해 성당 북동쪽에 있는 뒷골에 별도로 집을 지었다. 이곳을 ‘회집’이라 부르며 함께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66) 동정녀들은 회집에서 규칙을 지키고 열심히 기도하면 수녀원으로 승격시킬 수 있다는 본당 신부의 말을 굳게 믿으며 공동체 생활에 충실하였다.67) 그러나 인가받은 수도회로서의 결실은 보지 못하였고, 이 무렵인 1922년에 그동안 지속해 온 모임에 주보 성인을 정하고 성부안나회(聖婦安那會)라 인준하였다.68) 이와 관련하여 정규하 신부의 유고인 《허원문답-성부안나회규칙책》의 <성부안나회규칙책>에서의 규약은 《안나회원인명부》의 회규칙과 내용상 차등을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로 볼 때, 동정녀들이 허원하여 활동하는 독자적인 수도회 설립을 모색하는 한편 그에 비견되는 수준의 본당 내 신심 단체도 구성하는 이원적 체제를 구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나회는 기도와 애덕의 실천을 권고하였는데,69) 엄격한 규칙을 제정하고 실천하는 과정이 본당 산하 공동체로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이례적이다. 이 외에도 풍수원 본당 산하에는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해 주는 단체’, 즉 현재의 연령회와 같은 단체도 설립되어 있었다.70) 이들은 신자가 세상을 떠나면 즉시 3전을 갹출해서 미사를 봉헌하고 주 2회씩 모여 교리문답을 익히고 신심 서적을 돌려 읽는 등 안나회의 활동 방법과 흡사하였다. 스스로 선택하고, 약속한 후 이를 지켜가는 엄격한 신심 단체의 전통은 풍수원 평신도들이 만들어갔던 신앙생활의 모범 사례라 하겠다.

 

(3) 사제 성소 계발

 

사제 성소 계발에 기울인 정규하 신부의 관심은 부임 첫해의 서한71)에서부터 확인되어 총 15통에 이른다. 사제 성소 계발을 위한 그의 노력은 남달라서,72) 독자이거나 학비를 댈 수 없는 가난한 경우를 상관하지 않고 성소의 여부에 따라 추천하는 과단성을 보였고, 학비를 지원하기도 하였다.73)

 

정규하 신부는 실제로 신학생 교육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15년 5월에 용산 신학교에서 있었던 기낭(Guinand, Pierre) 신부와 신학생들과의 갈등 문제가 있었을 당시에74) 그는 ‘품행이 좋지 않은 많은 사제를 두느니보다는 차라리 소수의 착한 사제를 두기’ 위하여 재학생들에게 정학을 주라고 뮈텔 주교에게 건의하였다.75) 이때 문제가 된 신학생들에게 1년간의 정학을 주어 본당으로 나누어 보냈고, 그도 풍수원에서 7명의 학생을 지도하였다.76) 그는 신학생들의 잘못을 일일이 나열하면서도 “미움이나 분노에서가 아니라, 소수의 착한 사제를 두는 편이 나으리라.”77)는 의견을 보고하였다. 신학생들이 “용산 신학교 교장 신부님께 돌아가기보다는 차라리 성소를 잃는 편이 낫겠다.”78)라 말하는 데 대해서는 “분을 참지 못하여 혼자 침실에 들어가 울어야 했습니다.”79)라며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때 신학생들의 소요 사태 등의 이유로 은경축을 맞은 뮈텔 주교가 별다른 행사를 치르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주교를 위로하는 장문의 서신을 보내기도 하였다.80) 그는 1917년까지 정학으로 본당에 머물게 된 신학생들의 상태와 변화 과정을 상세하게 서신으로 보냈고,81) 지도한 결과보고와 함께 신학교로 복귀시켰다.82)

 

그 후에도 정규하 신부는 신학생 지도에 관하여 의미 있는 서한을 남겼다. 1919년의 3·1 만세 사건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신학생 박 마르코에 관해서는 신학교 밖 조선인들의 만세에 편승한 것뿐인데 퇴학까지 당했다며 가족 전체가 ‘앙심을 품고 있다’는 상황까지도 상세히 보고하였다.83) 추천할 신학생이 없다는 사연이나84) 신학교에서 나온 학생의 회개를 보고하며 다시 받아줄 것을 간청85)하기도 하였다.

 

정규하 신부 재임 중에만 6명의 사제가 탄생하였는데, 김윤근(요셉, 1909년), 서병익(바오로, 1910년), 김휘중(요셉, 1917), 신성우(마르코, 1920년), 박일규(안드레아, 1924년), 정원진(루카, 1926년) 신부가 그들이다. 풍수원 본당의 사제 성소는 끊이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져 30명이 넘는 사제를 배출하였고 이보다 많은 수의 수도자를 배출하였다.86)

 

(4) 성체현양대회 실시

 

풍수원 본당의 성체현양대회는 1920년 6월 3일 성체성혈대축일을 기해 시작되었다.87) 우리나라에서 본당 단위 성체현양대회를 처음으로 시작한 곳은 감곡 성당으로 1914년 부이용 신부가 주도하였고,88) 1927년에는 안성 본당에서도 성체현양대회를 시작하였다.89) 이처럼 본당 단위의 성체현양대회는 일제하에서 시작되었다. 풍수원에서 처음으로 성광을 앞세워 행렬하는 성체거동을 실시하던 1920년대에는 군중이 모이는 것만으로도 이적행위에 해당하는 시절이었다. 이때를 맞아 신자들은 먼 곳에서도 찾아왔고 지역의 주민들이 함께 모여 장관을 이루었다. 여러 명의 신부가 함께했고, 때로는 주교가 와서 주례90)했던 만큼 이 행사는 신자들에게는 최대의 경사였고, 일제하 민중들에게는 특별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일제하에서 대규모 군중 집회가 가능했던 것은 성체현양대회가 종교 집회 중에서도 신앙의 상징적 성격이 강한 신심행사였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하면 성체현양대회의 시작은 당시에 권장되었던 성체 신심과도 관계가 있다. 성체 신심은 특히 우리나라 초기 교회 신자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지켰는데, 매월 첫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을 각각 성체 신심, 예수 성심, 성모 성심을 기리는 미사로 참례하며 성체의 신비를 묵상하며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에 의지하고자 하였다.91) 이와 같은 성체 신심의 강조는 박해에서 벗어나 마음 놓고 성사를 받을 수 있다는 기쁨의 표현과도 무관하지 않다. 드러내놓고 성체를 현양하는 행사를 통해 교우들은 신앙의 기쁨을 마음껏 표출하며 신앙의 성장을 확인하고 교회의 일치를 나누었다. 풍수원 본당이 성체현양대회를 시작한 다음 해인 1921년의 파리외방전교회 연례보고서에서는, “실제로 선교사들은 신자 생활이 여러 면에서 현저히 성장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첫 첨례 육의 신심이 점점 전파되고 있습니다.”라 보고하였음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성체현양대회는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인 사랑의 신비를 체험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과 성체 공경을 표현하는 주요한 신심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92) 성체현양대회는 특히 성체 신비의 특정한 주제를 심화하고 사랑과 일치 속에서 공동적으로 성체에 대한 경배를 드러내며,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성체 신심을 기르고자 교우들이 함께 모여 여는 성대한 행렬이며 모임이다. 성체현양대회는 성체를 모시고 행렬을 이루는 성체거동(聖體擧動)93)이 행사의 중심을 이룬다. 풍수원 성당에서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기해 성체현양대회를 거행하였고 이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6년부터 원주교구와 춘천교구가 합동으로 거행하고 있으며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교우들이 모여들어 일대 장관을 이루고는 한다. 정규하 신부가 시작할 때의 동선을 그대로 따라 가꾸어진 성체 동산은 성체현양대회를 위해 조성되었다고 할 만큼 최적화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어 풍수원 신자들의 신심을 나타내는 상징과도 같다.

 

 

2. 대사회적 활동

 

(1) 학교 교육 실시

 

1906년 당시 일제는 보통학교령을 공포하여 수업 연한 6년의 소학교를 4년제의 보통학교로 개편하였고, 1908년에 다시 사립학교령을 제정 공포하였고, 1909년에는 보통학교령 시행규칙을 공포하여 학교의 설립을 통제하였다. 특히 사립학교의 설립을 통제했을 뿐만 아니라 교과 내용을 통제하고 교사의 자격 기준을 강화하였다. 1910년에는 비밀리에 한일 합병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는데, 합병 이전에 민족 교육부터 제재하였던 일련의 과정은 오히려 교육에 관한 시급한 의무를 일깨웠다.

 

정규하 신부는 학교의 승인 신청서를 학부대신에게 내보라는 뮈텔 주교에게 어디선가 시골 글방은 정식 학교가 아니라는 말도 들었다며, “교육 여건이 못 갖추어졌어도 학교라 할 수 있는지요?”94)라 묻고 있다. 이 서신에서 21명의 학생이 있지만 아는 것이 거의 없고 그들을 부양할 필수품조차 없음을 하소연하며 학교 설립 요건을 갖추기 어려운 형편임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1910년에 이르자 그는 성당 뒤편에 가건물을 세우고 삼위학당을 열었다. 교사는 최상종과 논산에서 초빙한 박 토마스 등이 맡아서 역사, 한글, 한문, 산수, 천주교 교리 등을 가르쳤다.95) 학교를 열자 풍수원 인근에서 홍천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 아동들은 물론 17세에서 18세에 이르는 총각들도 몰려들었다.96) 1923년에는, “오래전부터 저는 남학교 하나를 세우고 싶었는데, 올해 그것을 시작합니다. 신자들은 큰 호의를 가지고 있어서, 만일 금전적으로 도울 수 없으면 적어도 부역으로라도 저를 도울 것입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아마 18간 되는 한옥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97)라 하였다. 이 무렵 연례보고서에서도 소년 교육을 위한 20간 정도의 한옥을 지으려는 계획을 언급하였다.98) 같은 곳에서, “횡성 검두 공소 신자들은 가난을 핑계로 보통 자녀 교육을 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공소에도 그런 악습이 퍼져, 낼 돈이 없다고 하면서 남대문상업학교 기금을 마련하려고도 하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들 공소에는 기도와 교리를 위해서 소년 교실 하나, 소녀 교실 하나씩을 세웠습니다.”라 하였음을 볼 수 있다.99) 이처럼 교우들에게도 학교 교육에 대한 적극적인 욕구가 있었다. 그는 학교 교육에 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보통학교에 준하는 교육을 성당에서 시작하였다. 1910년부터 운영하던 삼위학당은 1931년 4월 성심학원으로 개칭되었다가 1946년 12월에 광동국민학교로 개편되었다.100)

 

본당 학교를 통해 근대적인 신교육을 하고자 하였던 정규하 신부의 관심은 조카인 정원진 신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정원진 신부는 서품 후 고향 본당 방문 인사에서 “유년 시대부터 보배로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오직 부지런히 이용하여 천상 학문과 영신 지혜가 되는 교중 도리를 유연한 마음에 깊이 새기도록 하여 현시대에 (뒤)엎지 못할 신학문을 또한 숙습(熟習)하여 참된 문명에 나아가기를 바라노라”101)라 하였다.

 

(2) 환자와 빈민 구제

 

풍수원 본당에서는 설정 초기부터 성영회를 통해 고아들을 신자 가정에서 맡아 길렀다. 이 일은 초대 르메르 신부 시기에 이미 시작되었다. 1890년에 르메르 신부의 구역 안에서 열 살 미만의 고아 14명을 성영회를 통해 양육하고 있었는데, 1892년에는 16명을 보고하였다.102)

 

정규하 신부는 1897년에 고아들의 수가 29명이라고 보고하며, “고아들의 숫자가 얼마가 되었든 계속 그들을 받아야 하는지요?”라 묻고 있다.103) 그해 12월에는 고아들이 40명에 육박하였다.104) 풍수원 신자들 사이에는, ‘아침밥 먹고 저녁에 죽이라도 먹을 형편이면 의지할 데 없고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이나 노약자, 부녀자 등 불우한 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본당신부의 훈화가 불문율처럼 지켜졌고105), 이와 같은 나눔은 정규하 신부 일가도 솔선수범하였다.106)

 

산 높고 물 깊은 강원도 내, 흩어져 있는 양의 무리, 이목구비 오관삼사,107) 각각 병세 극중하여, 듣긴 듣고 못 듣는 병, 보긴 보고 못 보는 병, 슬기로운 듯 우매하고 어두운 병, 이러하온 중한 병세, 의약당제(醫藥當劑) 방법으로, 이십 오 년 치료할 제, 풍우한서(風雨寒暑) 불고(不顧)하고, 주야불식(晝夜不息) 근로(勤勞)하사 ... 치료받은 양의무리, 감축지심(感祝之心) 엇더한고...108)

 

정규하 신부의 은경축 당시에 신자들이 드린 축사에서 직접 침술로 환자들을 치료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경상도와 함경도에서도 환자들이 찾아올 정도로 침술에 능했다고 전해지는데,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봉사하였다.109) 한문에 능통한 양반들이 의서를 읽어 자잘한 병에 약방문을 제공하여 향리의 주민을 치료해주는 일은 전통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일이었는데, 정규하 신부도 이와 같은 치료로 자선을 베풀었다. 정규하 신부는 의술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침술을 따로 배웠던 것으로 신체적 질병의 치료와 함께 주민들의 아픔을 나누는 사랑의 선교를 하였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의병과 독립군 지원 및 지역사회의 계도(啓導)

 

1921년 은경축을 맞이한 정규하 신부에게 김성학 신부가 한 경축사는 ‘탈출기에서의 모세의 노래(탈출 15, 1-21), 판관기의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판관 5, 1-31), 한나의 노래(사무엘 2,1-10), 유딧의 찬양가(유딧 16, 1-17),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부른 찬천주가(Magnificat)인 마리아의 노래(루카 1, 46-56)를 인용한 후 정규하 신부를 “상고적 바드리알카(Patriarca)”110)와 같이 여겨 하례하고자 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다.111) 여기에서 모세, 드보라와 바락, 유딧은 모두 압제와 혼란에 시달리는 동족을 구해냈던 인물이다. 정규하 신부가 은경축을 맞은 1921년은 일본에 병합된 지 11년째를 맞는 해였다. 일제는 3·1 운동 후 다소 유화적인 문화정치를 실시하였는데, 이 유화책은 사실상 교묘하게 우리 문화를 잠식하여 민족 분열을 조장하려는 술책이었고 뒤로는 쌀을 비롯한 자원을 반출하는 식민지 침탈책의 일환이었다. 이와 같은 시기로 볼 때 이 경축사는 은경축을 맞는 선배 신부에 대한 하례임과 동시에 함께 모인 동료 신부들이 새겨야 할 시급한 책무에 대한 환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최석우 몬시뇰(崔奭祐, 안드레아, 1922~2009)이, 뮈텔 주교가 견지했던 정치적 현실주의에 대해 “교회를 정치적 혼란에서 보호하여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사목적인 견지에서는 신자들의 독립 염원을 이해하고 그들의 민족적인 아픔을 외면하지 말아야 했다. 한국에 진출한 선교 사제들은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한국 신자들에게 프랑스의 승리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당부하였음을 감안해 볼 때, 그들은 당연히 한국의 신자들에게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했어야만 했다.”112)라 했던 고언에 주목하게 된다. 일제하에서 교회는 신앙과 정치를 분리하여 교회를 보호하고자 하였고, 독립의 염원을 지닌 신자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이해하고 민족적인 아픔을 위로해 줄 목자를 필요로 했다. 따라서 이 경축사는 정규하 신부가 일정한 부분에서 동포의 아픔을 위로하는 역할을 감당했다는 방증으로 읽을 수 있어 보인다. 실제로 그는 성당에서 의병을 숨겨주거나 훈련하도록 허락하였고113), 윤예원 신부와 함께 적십자 회비를 거두어 사실상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군자금으로 보내기도 하였다.114)

 

정규하 신부는 전통 사회의 붕괴에 따른 기강의 해이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풍수원 신자인 이윤영(가비노)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정 신부님은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잘 다스렸다. 당시 유현3리에는 신자는 별로 없었고 대다수가 중인이었는데 그들 중에 잘못을 저지르는 이가 있으면 잡아다가 볼기를 때려가며 엄하게 다뤘다고 한다. 당신이 직접 붙들어오고 때리는 것은 아니었고 타인을 시켜 행위를 했다.

 

정 신부님은 신자는 물론 일본 순사, 면 서기 그 누구에게도 말을 놓으며, 존(대)어를 쓰지 않았다. 그래도 반발이 없었던 것은 연로하기도 했거니와 언행이 곧아 경외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당 주보 첨례날(예수 성심 대축일)에는 매년 대천렵을 실시하여 신부와 신자들이 하나 되어115) 하루를 즐겼다.116)

 

이처럼 만년의 정규하 신부는 왕조의 몰락과 일제 식민지하에서 사회적 구심체를 잃고 방황하는 민중들에게 흔들림 없는 버팀목으로서 지역사회를 계도(啓導)하였다. 그가 임기 초기부터 어김없이 실시했다는 교우촌 순방은 보통 3개월이 소요되는 일이었다.117) 풍수원에서 멀리 떨어진 강원도 전 지역의 산골짜기 곳곳의 공소를 누비며 만년에 이르도록 성사를 주었다. 이렇게 성실히 의무를 이행한 처세는 신부 이전에 향리(鄕里)의 풍속 유지와 교화를 위해 나섰던 엄격한 양반 선비의 일면이 남아있던 것이라 하겠는데, 엄하지만 자애로운 아버지의 면모로 교우와 인근 주민의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라 하겠다.118)

 

 

Ⅴ. 맺음말

 

정규하 신부는 7년여에 걸친 말레시아 페낭 유학에서 돌아와 1896년에 강도영 · 강성삼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본당에서 사목한 1세대였다. 그는 1896년 강원도 풍수원 본당의 2대 주임이 되어 1943년 선종하기까지 한 곳에서 47년간 사목하면서 본당 사목의 한 전형을 일구었다.

 

본고에서는 첫 번째 한국인 본당 사제로서 정규하 신부가 본당 사목을 개척했던 과정을 교회 안의 사목 활동과 대 사회적 활동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먼저, Ⅱ. 사제 서품에 이르는 여정에서는 조카인 정원진 신부와 오랫동안 본당 회장을 역임하였던 최상종 회장의 회고 기록을 위주로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제 성소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Ⅲ. 풍수원 정착 과정에서는 그가 전임 르메르 신부, 인근의 부이용 신부와 협의하고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며 본당에 정착하는 과정을 당시의 풍수원 주변 정세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서술하였다.

 

Ⅳ. 풍수원 성당에서의 사목활동에서는 당시 교회가 본당 신부에게 요청하였던 사목적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가 교회 안에서 시작한 활동이 신자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모든 이들에게 혜택이 되었던 일을 조망하였다. 그에게는 겨우 얻어낸 신앙의 자유와 교우들의 평화를 지켜내는 토대를 본당에 구축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사제 성소 계발과 지도, 학교 교육 활동, 성당 건축과 신심 단체의 설립 및 본당 단위 성체현양대회의 시작 등은 빈민 구제와 지역사회의 계도와 함께 교회와 사회를 따로 분리하지 않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시대의 요청에 응답한 일이었다. 그가 남긴 업적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고자 하는 복음 전파의 선상에서 이루어진 열매였다.

 

정규하 신부의 생애와 사목활동을 ‘교회와 세속’을 엄격히 분리하지 않고 자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과 동시에 함께해야 할 사회의 문제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하여 제시할 수 있을 때, 그의 믿음과 실천은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 배우고 함께 나눌 신앙생활의 한 사례이며 희망이 될 것이다.

 

* 본 논문은 2019년 10월 4일 천주교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가 주최한 ‘풍수원 성당 재발견 심포지엄 - 풍수원 성당을 바라보는 일곱 개의 시선’에서 발표한 원고를 기초로 수정 · 보완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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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향잡지

 

1921년 5월호(통권 470호) 9월호(통권 477호), 1926년 1월호(통권 581호) 6월호(통권 592호)

1938년 6월호(통권 879호), 1939년 6월호(통권 904호), 1943년 11월호(통권 964호)

1972년 1월호(통권 1246호), 1979년 3월호(통권 1332호), 1994년 8월호(통권 1517호)

1995년 3월호(통권 1524호)

 

5. 교회와 역사

 

한국교회사연구소, <사목 서한으로 읽는 한국 교회사>, 《교회와 역사》, 2014, 2월호(통권 465)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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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인터텟 자료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 홈페이지 :

http://www.maegoe.com/modules/board/bd_list.html?id=wt_post

천주교 원주교구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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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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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정씨 대종중 인터넷 족보(기미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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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정씨 대종중 인터넷 족보(창원공파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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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천주교회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http://www.cbck.or.kr/Board/K7250) : 자료마당/사제인명록에는 3. 강도영, 4 정규하, 5. 강성삼 순으로 기록되었으나 박해 시기를 지나 우리나라에서 거행된 첫 사제 서품에 의미를 두고 강도영, 정규하, 강성삼 신부를 모두 세 번째 사제로 지칭하였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일기 2》, 1993, 서울, p. 65. 뮈텔 주교는 강성삼, 강도영, 정규하 순으로 기록하였는데, 이는 신학교 입학 순서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하 각주에서 《뮈텔일기》는, ‘《뮈텔일기》, 날짜’로 기록하겠다.

 

2) 풍수원(?水院)은 조선시대에 관원들의 마필을 보급하던 역(驛)과 역 사이에 있었던 국영 여관인 원(院)이 있었던 곳으로 1895년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원주군에서 횡성군에 편입되었다.

 

3)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 후 모든 본당은 조선 대목구 소속이었다. 1911년 교세 확장에 따른 분리 시기에 풍수원 본당은 경성대목구 소속으로 남았다가, 1939년에는 경성 관구인 춘천지목구에 속하게 되었다. 1942년 경성대목구장이 된 노기남 주교가 평양과 춘천 지목구장을 겸임하면서 여전히 경성관구에 속했다. 1962년 한국천주교회 교계 제도 설정 및 1965년 원주교구 설정에 따라 춘천교구에서 원주교구 소속 본당으로 이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강도영 신부는 경기도 안성의 미리내 본당(수원교구 제2대리구 미리내 성지 본당 - 현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의 초대 주임으로 34년 동안 재임 후 그곳에 안장되었고, 강성삼 신부는 경남 밀양의 명례 본당(마산교구 수산본당 명례 공소 - 현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주임이 되어 7년 남짓 사목 후 병사하였다. 세 신부는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에 유학하였고, 서품 후 최초 부임지에서 생애를 마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5) 한국교회사연구소, 《서울교구연보Ⅰ》, 1984, p. 213 참조. 이 책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가 해마다 각 포교지로부터 접수한 교세보고서를 묶어 간행한 잡지(COMPTE RENDU) 중에서 우리나라에 해당하는 부분만을 번역하여 발간한 것이다. 특히 서울교구에 해당하는 부분만을 두 권으로 엮었기 때문에 발간 당시 제목을 《서울교구연보》라 하였다.

 

6) 위 책, p. 249.

 

7)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 서한집 -풍수원에서 온 편지-》, 한국교회사연구소, 2019, [서한 70, 1918년 1월 1일] p. 176. 이하 정규하 신부 서한집은 ‘[서한, 날짜]’로 기록하겠다.

 

8) 최상종(崔相鍾, 빈첸시오)은 풍수원 본당이 소장한 기록에 의하면 1910년대부터 약 50여 년간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조카로 일찍이 《송아가다 이력서》, 《최바시리오 이력서》 및 《최양업 신부 이력서》를 기록하였다. 이력서에 담긴 신앙 유산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조광, <박해시대의 믿음과 삶>, 《경향잡지》 1995년 3월호(통권1524), pp. 79~82 참조.

 

9)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 소장본인 《허원문답-성부안나회규칙책》과 <빈낭유학회고기>, 《안나회원인명부》와 《고별사》는 제목과 이름 등에 부분적으로 한자가 사용되었을 뿐 순 한글로 작성되었다. 이 문서들을 현대어로 옮기면서 뜻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경우 필자가 한문을 괄호 안에 표기하였다. 이 중 <빈낭유학회고기>는 《경향잡지》 1941년 11월호(통권964호)에 수록될 때 제목이 편집되었는데, 원본은 <四人生徒 檳?學校로 가던 로뎡긔>로 <尹神父殿>이라고 쓴 봉투에 들어 있었다. 윤신부는 당시 경향잡지 주필 윤형중 신부이다.

 

10) 본 고에서 인용한 교우들의 증언은 문화영성연구소가 제공한 풍수원 본당 자료 중에서 채택하였다. 풍수원 본당에서는 2011년 당시 본당 설정 130주년 준비로 본당 역사를 정리한 바 있었다. 이때 임원지(세실리아, 살레시오회) 수녀 주도로 정리한 면담 자료 중에서 증언자의 신상과 증언 일시가 명시되고, 의도가 분명한 질의와 응답으로 채록된 것을 <풍수원 본당 130년 준비 자료>라 하여 인용하였다. 아울러 1994년에 이태호가 <빛과 소금의 길>이라는 제하에 3회에 걸쳐 《평화신문》에 연재한 기사 중에서도 일부 채택하였다.

 

11) 천주교 신앙의 실천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던 시기에 정부의 탄압을 표현하는 용어의 하나이다. 당시의 신자들이 군색하고(窘) 어려운(難) 시기에 처한 자신들의 처지를 한마디로 표현한 단어로 1880년에 간행한 《한불자전》에 들어있다. 필자가 확인한 자료에서도 ‘군난(窘難)’과 함께 ‘사군난(私窘難)’, ‘교난(敎難)’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 그대로 인용하였고, 필자의 서술 내용에서는 문맥에 따라 ‘탄압’ 또는 ‘박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용어 사용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조광, <박해인가, 교난인가?>, 《경향잡지》, 2002년, 3월호(통권 1608호), pp. 74~77 참조.

 

12) 《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p. 7525.

 

13) 정규하 신부의 일대기를 담은 기록은 다음과 같다.

<풍수원(?水院) 50년 ?고 정규하(아우구스티노) 신부 일대기->, 《경향잡지》, 1972년 1월호(통권 1246호), pp. 42-46.

한용환 · 서상요 편저, <半世紀를 ?水院에서 ?鄭圭夏 神父의 司牧 生活記>, 《福音의 證人》,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2년, pp. 37~42.

정운택 엮음, 《검은 바위》, 1977년 사제 서품 기념집, pp. 61~76.

위 기록 중에서 《복음의 증인》은 근현대 교회사에서 기억할만한 모범적인 35인의 신앙인에 대한 기록을 《경향잡지》 연재물에서 다시 모아 엮은 것이다. 《검은 바위》는 ‘하느님의 종 정은 바오로(1804~1867)’와 그의 재종손인 ‘하느님의 종 정양묵 베드로(1820~1867)’의 순교와 관련된 동래정씨 일가의 피난 기록을 모은 것이다. 이 책 1부는 정규량(鄭圭良 레오, 1883~1952) 신부가 쓴 <단내 정씨 가사(정 바오로·베드로 치명사기)>를 현대어로 보충 편집하였고, 2부는 일가 후손인 정규하, 정규량, 정원진 신부의 일대기를 엮었다. 정규하 신부는 정은 바오로의 형인 환(渙)의 증손자이다. 《경향잡지》에서는 정원진(鄭元鎭 루카, 1900~1976) 신부의 증언에 따라 편집하였음을 밝히고 있는데, 정규하 신부의 일대기에 관해 이들 책에 실린 내용은 모두 같다.

 

14) 1919년에 제작된 ‘동래정씨 기미보’에는 정규하 신부의 부친 이름이 상묵(商?), 字(자)는 기화(箕化)로 기록되었다. 1935년에 제작된 ‘동래정씨 창원공파보’에는 ‘자 기화, 신해생, 가선, 묘, 성주산(字箕化 辛亥生 嘉善 墓 聖主山)’으로 품계도 기록되었다. 풍수원 성당 옆 성주산에 있는 합장묘지명은 ‘參判公 마두 東萊鄭氏商?, 貞夫人 말다 淸州韓氏 合墓’로, 생몰 연도는 각각 1841~1906, 1843~1903년으로 새겼다.

 

15) 위, <풍수원(?水院) 50년>, pp. 42-43.

 

16) 이곳은 피난 온 동래정씨 일가뿐만 아니라 성 조윤호 요셉(1848~1866)이 태어나 성장한 교우촌이었다. 조윤호는 성 조화서 베드로의 아들이며, 1839년에 치명한 조 안드레아의 손자로 남방제 마을은 한 집안 3대가 성인이 된 집안의 은거지이기도 하였다. 이곳이 1866년 병인박해 때 관군의 습격을 받기 전에 정규하 신부 일가는 마을을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17) 최상종, 《고별사》, 1943, 문화영성연구소 소장본, pp. 1-2.

 

18) 위, <풍수원(?水院) 50년>, 같은 곳.

 

19) 위, p. 43.

 

20) 위, 《검은 바위》, p. 51.

 

21) 위, 같은 곳.

 

22) 위, 《고별사》, p.3.

 

23) 빈낭(濱? 말레이시아 페낭[Penang or Poulo-Pinang]의 음차)에는 파리 외방전교회가 1807년에 아시아 지역 성직자 양성을 위해 세운 신학교가 있었고 블랑 주교는 1882년, 1883년, 1884년의 3차례에 걸쳐 21명의 신학생을 보냈다.

 

24) 위, 《고별사》, pp. 3~6.

 

25) 위, <풍수원(?水院) 50년>, p. 44.

 

26) 1887년 프랑스어로 편찬되어 서울에서 인쇄 배포된 《조선교회 관례집》에 보이는 신앙생활 지침에 의하면 ‘독자는 일반적으로 신학생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더욱이 장자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조현범, <《조선교회 관례집》의 간행>, 《한국천주교회사》 4,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pp. 108~110.

 

27) 위, <풍수원(?水院) 50년>, p. 44. 《고별사》에는 광주로 이사하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28) 이 글은 본래 함께 출국했던 한기근 신부가 선종한 1939년에 경향잡지사 주필 윤형중 신부가 정규하 신부에게 청탁했던 글이었으나 정규하 신부가 선종하던 해에 빛을 보았다.

 

29) 최석우, <19세기 말엽의 한국인 신부들>, 《경향잡지》, 1979년 3월(통권 1332호), p. 80~83 참조.

 

30) 이원순, 《소신학교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pp. 36~37.

 

31) 1894년의 동학혁명과 갑오경장,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에 따른 의병의 봉기, 1894년~1895년의 청일전쟁, 1895년의 친일 내각에 의한 을미개혁과 1896년의 아관파천에 이어 1904년 러일전쟁을 겪고 1905년의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이르는 극심한 혼란기였다.

 

32) 화서학파의 유인석이 을미의병을 일으켰을 때 거점이었던 제천과 충주 일대에까지 화서학파의 영향력이 미쳤던 것이고 보면 풍수원은 이동로의 한 가운데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33) 장영민, <동학과 의병 항쟁>, 《원주 역사를 찾아서》, 경인문화사, 2004, pp. 146~185 참조.

 

34) 위, 《서울교구연보 Ⅰ》, pp. 183~188. 1896년도 보고는, 이와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기라도 한 듯, “우리 선교사들의 사업과 그들이 얻은 결과에 관한 연례보고서에는 우리 회가 맡고 있는 지방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에 대하여 자세히 쓰여지지 않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지키고 있는 이 관례에도 예외가 있을 수 있고 또 사실 있기도 하다. 현재 상황으로 볼 때 조선이 바로 이러한 예외에 속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뮈텔 주교는 그의 보고서 서두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는데 아마 모두들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서두로 시작하였다. 이 보고서는 교회 사업 보고에 앞서 1895년의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에 이르는 정치적 소요의 세세한 과정은 물론 비평적 견해까지 밝히고 있다.

 

35) 《법안(法案)》, 465, 466호, <법국교사(法國敎士)를 무욕(誣辱)한 홍효백, 안준문에 대한 체벌 요망건>으로 《원주교구 30년사》, p. 121에서 재인용. 더 자세한 내용은, 여진천, <19세기 화서학파 홍재구의 서양 인식과 천주교회의 반응 -『正俗新編』을 통하여->, 《교회사연구》 21, 2003, pp. 31~55. 참조.

 

36) 《뮈텔 일기》, 1893년 2월 12일, 3월 7일~23일 참조.

 

37) 현, 강원도 평창군 하일리로 지금은 천주교 원주교구 대화 본당의 관할 구역이다. 정규하 신부는 주교로부터 하일로 가라는 명을 받았으나 풍수원에 정착하게 된 과정을 기록하여 보고하였다. [서한 1, 1896년 8월 18일], [서한 2, 1896년 9월 12일] pp. 35~38 참조.

 

38) [서한 1, 1896년 8월 18일], pp. 35~36 참조.

 

39) 김상균, <사목 서한으로 읽는 한국 교회사>, 르메르 12, 《교회와 역사》, 2014년 2월호(통권 465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896, 8월 22일. 이 서한에서 “주교님, 위의 주소를 보면 아시겠지만, 저는 원주로 집을 옮겼습니다. 17일이었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중략) 아우구스티노(정규하) 신부는 풍수원에 정착하였습니다. 저도 그를 보러 하일에 가고 싶습니다만, 저는 주교도 아니고, 또 그가 그 멀리 떨어진 산골짜기로 가야 해서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그에게 명령할 수도, 강력히 권고할 수도 없습니다. 또 원주에서 하일까지의 거리는 130리인데, 제게는 좀 먼 것 같습니다.”라 하여 완곡하게 정규하 신부의 풍수원 임명을 청하였다.

 

40) 부이용 신부는 1895년 9월 13일과 10월 10일 서한에서, ‘보다 넓은 선교지를 얻을 목적’으로 부엉골 본당(현 수원교구)을 감곡으로 옮기려 하고, ‘르메르 신부에게는 원주로의 이전을 제안’하였다고 뮈텔 주교에게 보고하였다. 부이용 신부 서신은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 홈페이지에서 참조.

 

41) 《뮈텔 일기》, 1893년 5월 1일 참조.

 

42) 위, 주 40), 참조.

 

43) 위, 주 39), 참조.

 

44) [서한 2, 1896년 9월 12일], p. 38 참조. 이 서한은 뮈텔 주교가 3년 내로 정규하 신부를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킬 뜻을 밝힌 것에 대한 답장으로 그는 당장이라도 주교의 뜻을 따르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뮈텔 주교는 1902년에 정규하 신부의 새로운 임지를 물색하라고 원주 본당의 드브레 신부에게 요청하였다. 드브레 신부는 정규하 신부와 의논하여 새 본당 후보지로 제천과 홍천을 추천하였으나 막상 정규하 신부가 홍천으로 이전 계획을 추진하자 1,200리 이상을 걸어 다니며 성무를 집행해야 하는 풍수원은 초임 선교사의 부임지로는 적당하지 않다며 다시 반대하였다. 이때 드브레 신부는 풍수원의 적임자는 정규하 신부뿐이라고 뮈텔 주교에게 보고하였고, 1903년에 도착한 신임 선교사인 프와요 신부는 용소막에 정착하였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진천, <천주교의 원주지역 정착과 발전 연구 ?1888년~1909년을 중심으로->, 《원주학 연구 2》, 연세대 매지학술 연구소, 2001, 참조.

 

45) 1896년 원주 본당 설정 당시 조선대목구 소속이었으나 1939년 강원도 춘천지목구 소속이 되었다가, 1955년 학성동 본당을 분리하면서 명칭을 원동성당으로 변경하였다. 1965년 원주교구 설정과 함께 주교좌 본당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46) 천주교 원주교구 주교좌 원동교회, 《원동백년사》, 1999, p. 61 참조.

 

47) 위, 주 44) 여진천의 논문 참조.

 

48) 장동하, <개항기 교회의 선교 정책과 전통 사회의 충돌>, 《한국 천주교회의 성찰과 전망》,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0, pp. 109~110 참조.

 

49) 위, 《서울교구연보 Ⅱ》, p. 58. “조선은 일본인들의 지도하에 발전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개화되기 위해 바지를 입고 어깨에 양복을 걸치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조선인 중에도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개화 문명이라는 것은 윤리적 덕행의 실천에 있으므로 현재는 스승의 입장인 사람들이 생도들에게 별로 가르쳐 줄 것이 없습니다.”

 

50) [서한 70, 1918년 1월 1일], p. 176.

 

51) 천주교 원주교구, 《원주교구 30년사》, 1995, pp. 118~119 참조. 횡성 본당은 정규하 신부가 직접 부지를 마련하였다.

 

52) [서한 33, 1906년 8월 6일], [서한 33, 1906년 8월 6일] 이때의 마르코 복음 번역은 1910년에 한기근 신부에 의해 간행된 《사사성경》의 준비작업으로 보인다. 이 무렵 강도영 신부, [서한 29, 1906년 6월 22일], [서한 33, 1906년 9월 23일]에서 마태오 복음을 번역하여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정규하 신부는 서울 대목구 지도서 초안을 만들 때에도 열람 후 의견을 제시하였음을 [서한 84, 1922년 2월 8일]에서 알 수 있다.

 

53) 횡성군청, 박순업 편저, 《횡성의 근·현대 교육 史》, 향토자료 제25집, 2012, p. 22 에서는 광동학교 설립일을 1896년 6월 22일로 보고 있고, p. 8 에서는 “한일합방이 일어나자 민족정신을 지키고자 풍수원 성당이 세운 삼위학당(성심학원)은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설립된 횡성 최초의 사립학교로서 오랜 세월 명맥을 이어가면서 시대에 필요한 인재 육성에 기여했다.”라 적고 있어 신자가 아닌 일반인들의 기억 속에도 풍수원 성당에서의 학교 교육의 역사가 살아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만 연대에 착오가 있는데, 본고에서는 <풍수원 성당 130년 준비 자료> 및 원주교구가 정리한 교구사에 따라 학교 설립 및 변경 연대를 정리하였다.

 

54) [서한 102, 1924년 5월 1일] 참조.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에서는 영해회(?孩會)라 하였는데 최근에는 성영회(聖?會)로 사용하고 있어 이를 따랐다. 이는 1843년 프랑스 낭시 교구의 드 포르뱅 장송(De Forbin Janson) 주교가 창설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1854년에 시작되었으나 병인박해로 중단되었다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한 개항 이후에 재개되었다.

 

55) [서한 01, 1896년 8월 18일], p. 37, [서한 03] 1897년 2월 7일, p.43, 참조.

 

56) [서한 30, 1906년 5월 6일], p. 98. “새 성당을 짓고 싶지만, 금년에는 돈이 없어서 못하겠습니다.”

 

57) 1892년에 세워진 중림동 약현성당을 말한다.

 

58) [서한 30, 1906년 5월 6일], p. 98, [서한 34, 1907년 1월 30일], p. 103, [서한 39, 1909년 1월 11일], p. 114~115, [서한 40, 1909년 6월 10일], p. 116, [서한 41, 1910년 2월 9일], p.117.에서 성당 건축 과정을 볼 수 있다.

 

59) [서한 53, 1913년 10월 16일], p.140 참조.

 

60) 위, <풍수원 성당 130주년 준비 자료>에서 송순호를 비롯한 신자들의 증언록 참조. 이 중에는 ‘벽돌을 머리에 이어 나르느라 여신도들은 머리카락이 다 빠졌고,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느라 농사를 돌보지 못했음에도 풍년이 들었다.’는 증언도 있어 신자들이 기쁘게 협력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61) 문화재청, 《횡성 풍수원 성당 구 사제관 기록화 조사 보고서》, 2011, pp. 19~20 참조.

 

62) 성부안나회(聖婦安那會)의 부(婦)는 부녀자로 성부(聖婦)는 오늘날 성녀(聖女)의 뜻이다. <성부안나회규칙책>에서 “성부 안나의 전구를 빌어 주보로 정하여 안나회라 하고 성모마리아의 도우심을 구하며...”라는 내용이 있다. 성부안나회는 한문 투의 정식 명칭이고 안나회로 통한 것으로 보인다. <성부안나회규칙책>에 대해서는 아래 주 68), 참조.

 

63) 강습회라는 명칭도 《안나회원인명부》에서 볼 수 있다. 강습회를 시작한 초대 회장 김휘순은 1818년 경기도 행주 본당에서 선종한 김휘중 요셉 신부와 동기간이며 정규하 신부의 제수다.

 

64) 위, <성부안나회 규칙책>, p. 1, <안나회원 인명부>, p. 2, 참조.

 

65) [서한 85, 1922년 3월 31일], p. 203. 이 서한에서 김 비르지타의 수녀원 입회 건에 대해 뮈텔 주교와 의논하였고, 조카딸인 정 카타리나도 수녀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66) <풍수원 성당 130년 준비 자료> 중 파일명 ‘성부 안나회’ 문서에서는, 정규하 신부는 독자적인 수도자 공동체를 운영했고, “1921년부터 1년 동안 최상종 회장과 함께 한국인 수녀회를 창설할 준비를 했다.”고 정리한 바 있다. 회집 생활을 한 이들은 정희진(鄭喜鎭) 카타리나, 장(張) 도미질라, 김확실(金確實) 곤스단시아, 박(朴) 데레사 등 4명이었다. 이들은 8년여 동안 무의무탁한 노인과 고아를 돌보며 수도원을 방불하는 엄격한 수도 생활을 했으나 일부 회원이 친척 신부의 식복사로 나가면서 해체되었다. 이후 안나회는 일반적인 여 교우들의 모임으로 오늘날까지 존속되었다. 《안나회원인명부》에는 1911년 3월 11일 3인의 입회 기록으로 시작하여 1937년에 이르는 총 108명의 명단이 들어 있다.

 

67) 이태호, <빛과 소금의 길 11>, 《평화신문》 제274호 1994년 3월 20일 참조.

 

68) 정규하 신부가 남긴 《허원문답-성부안나회규칙책》에는 수도적 공동체 생활을 위한 허원의 이론과 실제로 지켜야 할 규칙 등이 체계적인 내용으로 서술되어 있다. 《허원문답-성부안나회규칙책》은 앞의 <허원문답>과 뒤의 <성부안나회규칙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허원문답>에서는 수도 허원의 일반적 개념과 의미, 허원으로 지켜야 할 구체적인 규칙을 문답식으로 설명하였다. 이 <허원문답>에 이어 기록된 <성부안나회규칙책>의 내용은 <허원문답>에 준하고 있어서, ‘가난’, ‘정결’, ‘순명’을 기본으로 허원과 공동체 생활을 하는 수도회의 규칙 제정을 위한 초고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비교하여 최상종이 정리한 <안나회원인명부>에서는 ‘가난’, ‘정결’, ‘순명’에 관한 언급은 없이 규약을 정리하고 있어 차별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정규하 신부 유고인 <허원문답>과 내용과 목차 체계가 매우 유사한 다음 책을 참고할 수 있다. 이 책은 1859년에 프랑스어로 출간된 《수도자를 위한 허원교리 문답》이다. 정규하 신부가 어떻게 이 내용을 알고 번역, 또는 기록하게 되었는지 등에 관한 연구도 필요해 보인다. 베드루 코텔 저, 박관서 역, 《수도자를 위한 허원교리 문답》, 성바오로출판사, 1962, 참조.

 

69) [서한 101, 1924년 5월 5일 : 1923~1924년 연례 보고서]에서는 “열심한 젊은 부인들”의 활동이라 하여 안나회 활동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서한 112, 1926~1927년 연례 보고서]에서는, 처음으로 ‘안나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회집에서 7명의 연로한 과부들을 3명의 동정녀가 돌보며 살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경향잡지》 1926년 3월호, 1929년 1월호에서 ‘성부안나회’의 활동 기사를 살펴볼 수 있다. <풍수원 성당 130년 준비 자료> 중 ‘성부안나회’ 정리 문서에서는 안나회원들이 줌쌀 절미 운동 등으로 모은 1,900만 원을 김태원 주임 신부(1995년 ~ 2000년)때에 천사들의 집에 500만 원, 사랑의 집에 500만 원, 성소후원회에 500만 원, 배론 성지에 400만 원을 후원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70) [서한 92, 1923년 4월 30일 : 1922~1923년 연례보고서], pp. 218~219, 참조.

 

71) [서한 2, 1896년 9월 12일], p.39.

 

72) 위, 《고별사》, p.10, “오 주 예수의 품군 적음을 탄식하심에 대하여 당신만 성녁하실 뿐 아니라 장차 후계자를 계속코자 하여 당신 관할내에 청년들을 권고 지도하셔서 5~6인을 탁덕 승품 되게(하시고)”

 

73) [서한 22] 1902년 9월 9일 참조.

 

74) 《뮈텔일기》 1915년 5월 21일~29일 참조. 김요한(차부제)이 교장 신부로부터 체벌을 받자 신학생들이 반발하며 뮈텔 주교에게 교장 신부의 교체를 요구했던 일이다.

 

75) [서한 61]과 강도영 신부, [서한 65, 1915년 9월 미리내], 참조. 강도영 신부도 정학은 잘한 일이라 하였고, 이날 정규량, 손성재, 정규하 신부를 차례로 방문하겠다고 보고하였다. 정규하 [서한 62]와 교차해 볼 때, 한국인 신부들이 함께 신학생 지도 과정을 의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76) [서한 60, 1915년 8월 25일], [서한 61, 1915년 9월 1일], [서한 62, 1915년 9월 20], [서한 63, 1915년 10월 19일], [서한 66, 1916년 9월 10일], [서한 69, 1917년 8월 28일], 참조.

 

77) 위, [서한 60, 1915년 8월 25일], p. 160.

 

78) 위, 서한.

 

79) [서한 60, 1915년 8월 25일], [서한 61, 1915년, 9월 1일], pp. 158~161.

 

80) [서한 62, 1915년 9월 20일], pp. 162~163. 이 서한에서 정규하 신부는 뮈텔 주교가 ‘사도적 칼’을 받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며 조선교회를 위해 일생을 봉헌해온 사실을 치하하고 공경과 사랑을 표시하였다. 선교사인 장상과 함께 한국인 신부인 그가 이루고자 했던 일치는 무엇이었을지를 묵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81) [서한 63, 1915년 10월 19일], [서한 66, 1916년 9월 10일]

 

82) [서한 69, 1917년 8월 28일]

 

83) [서한 75, 1919년 10월 14일]

 

84) [서한 91, 1923년 1월 22일], [서한 93, 1923년 6월 10일], 참조.

 

85) [서한 98, 1924년 3월 21일], [서한 99, 1924년 4월 13일], 참조.

 

86) <풍수원 성당 130년 준비 자료> 참조. 2011년 당시 풍수원 출신으로 추정되는 사제를 포함하여 39명으로 집계한 자료가 있다. 수도자들은 전국에 흩어져서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는 특성상 집계가 어려워서인지 ‘사제보다 더 많은’ 수도자를 배출했다는 증언 외에 집계기록은 없었다.

 

87) 이 일자는 <풍수원 성당 130년 준비 자료> 중에서 확인하였는데, 현재로서는 추정이지만 6·25 전쟁으로 인한 3년을 제외하고는 해마다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성체성혈 대축일을 기해 실시했다는 풍수원 신자들의 기억을 역산하여 보면 나오는 일자이다. 바로 1년 전인 1919년에는 전국적으로 독립 만세 운동이 있었고 보면 바른 일자로 보고 사료 찾기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경향잡지》 1938년 6월호에서 성체거동 기사와 사진을, 1939년 6월호에서 관련 기사를 볼 수 있다.

 

88) 위,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 홈페이지 참조.

 

89) 《뮈텔일기》, 1927년 6월 19일 참조.

 

90) [서한집], pp. 262~265. 1935년~1939년의 성체거동 사진을 볼 수 있는데, 한기근, 윤예원, 이광재 신부가 보이고, 1935년 성체거동 사진에는 라리보 주교도 함께하였다.

 

91) 위, 《서울교구연보 Ⅱ》, p. 161 참조. 당시 매월 첫 금요일에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일은 ‘첫 첨례육’이라고 하여 생활화하기를 권고하였는데, 《뮈텔 일기》의 경우 거의 매월 첫 첨례 육을 기록하고 있어 생활화된 신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92) 원주교구 3대 교구장인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는 2018년 5월 31일 95차 성체현양대회 강론 중에서, “교회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과 보증을 받기 때문에 이 성사를 교회 생활에 필요한 모든 힘을 제공하는 원천이자 쟁점으로 선포한다. (중략) 성체의 신비는 알아듣기 힘든 사랑의 신비이며 성체의 가장 큰 의미는 사랑, 사랑은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다. 무엇보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라 한 바 있다.

 

93) 지금은 성체현양대회라 부르는 예식 전체에 대해 처음에는 성체거동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을 만큼 성체를 앞세운 행렬은 성체현양대회의 핵심이다.

 

94) [서신 38, 1908년 12월 28일], p.113 참조.

 

95) [서한 71, 1918년 6월 9일]에서 “서울에서 저의 집에 내려와 보니 마을에 큰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몇몇 신자들이 너무 지혜롭지 못하게 처신하여, 총독부에서 금한 책들을 소년들에게 무리하게 가르쳤기 때문이었습니다.”라는 내용을 볼 수 있는데, 이때의 금서가 《월남 망국사》라면 이 책은 이미 1909년 5월 5일에 배포와 판매가 금지되었던 책을 가르친 것이다. 정규하 신부의 복사를 지낸 김윤식은 삼위학당 1회 졸업생(총 12명)인 친척(김성칠)이 ‘교리’, ‘조선 역사’, ‘월남망국사’ 등의 교육을 받았고 월남망국사는 정신부도 가르쳤다고 말했음을 증언하였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이태호, <빛과 소금의 길 10>, 《평화신문》, 제273호, 1994년 3월 13일 참조.

 

96) 위, 기사 참조.

 

97) [서한 95, 1923년 12월 12일], p. 224.

 

98) [서한 101, 1924년 5월 1일], p.234 참조.

 

99) [서한 94, 1922~1923 통계 보고서], p. 222~223 참조. 이 통계보고서에서는 주일학교 1개만 보고한 것으로 보아 인가받은 정식 학교는 아직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00) 위, 《원주교구 30년사》, p. 469, 참조.

 

101) <횡성 풍수원 본당에 정신부 환영>, 《경향잡지》, 1926년 6월호(통권 592호), p. 279 참조.

 

102) 르메르 [서한] 1890년 2월 25일, 1892년 4월 22일 참조.

 

103) [서한 4, 1897년 3월 21일], p. 46.

 

104) [서한 6, 1897년 12월 6일], p. 54.

 

105) 위, <풍수원 성당 130년 준비 자료> 참조.

 

106) 송정숙, <한국전쟁으로 희석시킨 6.25>, 《한국논단》 2012년 1월 pp. 182~183. “1926년생 서봉구는 1931년에 부모에게 버림받자 정규하 신부가 거두어 본당의 영애원에서 자랐다. 서봉구는 10여세가 되어 정원진 신부 본가에서 살다가 1941년 6월 정신부가 도림동 본당으로 부임할 때 함께 왔다.” 그가 영애원이라 한 것은 영해회(?孩會)의 활동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07) 오관은 귀, 눈, 코, 입, 마음의 다섯 가지 감각을 다스리는 기관, 삼사는 영혼의 세 가지 관능인 명오(明悟 = 지혜), 기함(記含 = 기억), 애욕(愛慾 = 사랑)을 말한다.

 

108) <정신부의 은경축>, 《경향잡지》, 1921년 9월호, PP. 390~393.

 

109) <풍수원 성당 130년 준비 자료> 중 이윤영, <풍수원 성당이 걸어온 길>에서, ‘경상도 함경도에서도 환자들이 와서 근처 여인숙에 묶었고, 신부님은 연로하심에도 괴롭다 하지 않고 매일 10여 명 이상에게 침을 놓았으며, 필자 또한 어릴 적 팔목을 삐어 동침 한 번에 완치가 되었다.’는 증언을 볼 수 있다.

 

110) ‘Patriarca’는 옛날의 대가족이나 종족의 장을 의미한다. 성서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을 의미하고 교황이 임명한 업무나 사법권이 없는 사제직으로서의 총대주교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단체의 장인 원로의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았다.

 

111) 《경향잡지》, 1921년 5월, 통권 470호, p. 231~232.

 

112) 최석우, <일제하 한국 천주교회의 독립운동>, 《한국교회사의 탐구Ⅲ》, 2000, p. 303. “기미운동 때 상해하고 연락해서 군자금을 대주고 나름대로 조국을 위해 애쓴 풍수원 본당의 정규하 신부님 같은 분도 계십니다.”라 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특별 대담, <민족과 함께하는 종교로 거듭나야 -일제 때 한국 교회를 반성하고 오늘을 진단한다->, 《경향잡지》 1994년 8월호, pp. 129~137, 참조.

 

113) 정규하 신부는 정미의병이 봉기했을 당시 의병으로 활동했던 박기후(朴基厚 루수, 1871~1952)에게 의병의 은신처를 제공하고 성당 마당을 훈련장으로 쓰게 했다. 박기후의 후손은 여전히 성당 바로 아랫동네 박기후가 살던 옛터를 지키고 있는 신자이다. 위, 이태호, <빛과 소금의 길 10>, 참조. 위, <풍수원 성당 130년 준비 자료> 중 <증언기록 4>에서는 이윤영이 ‘풍수원 본당 신자인 1888년생 윤재근, 1892년생 김태환, 1913년생 방신부의 아버지인 방재성’ 등이 의병 활동을 할 때 정규하 신부가 이를 도왔다고 증언하였다. 같은 자료 중 2012년에 김규찬이 엮은 <금대공소 교회사 자료 - 금대공소 교우들>에서도 신자들의 의병 활동과 협력에 관한 증언을 살펴볼 수 있는데, 금대초등학교 옆에는 신자들이 만들어 준 이름 없는 의병의 무덤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일제하에서 의병 활동을 도왔다는 충분한 기록은 아직 확보하지 못하였지만 실제로 활동 기록을 남길 수 없었고, 기록이 있었더라도 사망 전에는 정리했어야 하는 시기적 특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114) 윤예원 신부, 1919년 11월 15일자 [서한], 참조. 위, 《원주교구 30년사》 pp. 124~125에서 재인용.

 

115) [서한 89, 1922년 12월 29일], p. 213. “라틴어 성가들을 한글로 음을 달고 등사기로 찍어내어 성당에서 부르는 것을 허락하여 주셨으면 합니다.”라 하여 성가도 신자들과 함께 부르고자 하였다. 《경향잡지》, 1939년 8월호(통권 908호), pp. 368~369. “풍수원 교회에서는 지난 성모승천 전날 밤에 우리순교자를 현양하는 목적으로 치명성극 [순교자]를 청년들이 여러 날 동안 철야 준비하야 상연하였는데, 관람객은 교내 교외인을 합하여 팔백 명을 돌파하였다.”라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116) 위, <풍수원 성당이 걸어온 길>, 참조.

 

117) [서한 38, 1908년 12월 28일], p. 111. “성사를 주기 위해 10월 6일 떠났다가 오늘에야 끝맺었습니다.” <풍수원 성당 130년 준비 자료>에서는 만년의 연로한 정규하 신부가 단신으로 거동하거나 복사가 업어서 이동하고, 미사 짐은 신자들이 릴레이로 옮겼다는 증언을 볼 수 있다.

 

118) 위, 《고별사》, pp. 9~11. “쥬야를 불고?시고 풍우를 무릅쓰시며 ?산준령 흉악디에 방방곡곡 단니시며 안무순찰(按撫巡察)?샤 극진 훈도(薰陶)?심으로 허다 창?(蒼生)을 영? 복디로 인도?시며 (중략) 유년이?로 감빈졀덕을 쥬의하샤 박의박식?시며 젼젼푼푼 져축?와 셩당과 학교를 화려 굉장이 건셜?샤 흣흔양을 모흐시고 유년 창?(蒼生) 교훈?샤 쳔쥬 사업에 이 갓치 근실종사?시?고로 오 쥬 예수 셩의에 흡합?고 즐겨?샤 이 디방 황무지를 근어 오십년간 담임?야 치안케?샤”에서 치안(治安)은 유교의 수기이안백성(修己以安百姓) 및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치안으로 읽었다. 안무순찰, 훈도?심, 유년 창?을 교훈하심 등은 모두 하느님의 사업을 열심히 했다는 표현이지만 모두 유학 사상의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학술지 교회사학 vol 16, 2019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성희(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368704&Page=1&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 

 

[본문과 각주에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정확한 한글 고어는 원본이나 첨부파일을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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