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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 풍수원 성당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숨어 신앙을 유지한 산골에 세워진 강원도 첫 번째 성당
지번주소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 1097 
도로주소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경강로유현1길 30
전화번호 (033)342-0035
팩스번호 (033)343-5694
홈페이지 http://www.pungsuwon.org
문화정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성당),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3호(구 사제관)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풍수원 성당을 바라보는 일곱 개의 시선3: 풍수원 성당과 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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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5-23 조회수804 추천수0

[풍수원 성당 재발견] 풍수원 성당을 바라보는 일곱 개의 시선 (3)

 

 

3. 풍수원 성당과 공소

 

풍수원이나 인근 지역에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정착한 시기나 장소는 어디일까? 1802년 무렵(신태보 베드로 복자가 교우 40여 명과 더불어 ‘인적이 드문 강원도의 깊은 산골’로 이주한 무렵)으로 추정하고는 있지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시기, 장소는 알지 못한다. 다만 병인박해 당시에 순교한 많은 분들이 횡성 출신이고, 풍수원 출신의 사제들과 옛 교우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적어도 병인박해(1866년) 이전에 많은 신자들이 풍수원과 횡성지역 산간에 교우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특히 풍수원과 관련하여 오래된 교우촌으로 자주 지목되는 곳은 풍수원 성당 근처의 ‘수구대’인데 다만 뚜렷한 기록이 없어 아직은 그곳을 풍수원 지역의 최초의 교우촌으로 확정 짓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풍수원이라는 지명이 교회의 공식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드게트 신부(Deguette, 1848-1889)가 작성한 1884-1885년 교세 통계표이다.(당시에는 풍수원이 원주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원주지역 교세 통계에 포함되어 있다. 풍수원은 1895년 횡성군으로 편입되었다.) 이 교세 통계표에서는 풍수원 신자를 33명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아마 당시에는 본당 설립 이전의 작은 공소였던 듯하다. 이후 1888년에 풍수원이 본당으로 설정되고 르메르 신부가 부임하면서, 인근 지역에 있던 많은 교우촌은 풍수원 본당의 공소로 편입되었다. 1888년 르메르 신부는 풍수원 본당에 속한 공소를 39개로 보고하고 있고, 1889-1890년 보고서에서는 11개 지역(원주, 여주, 홍천, 청주, 문경, 상주 등) 26곳의 공소 명단을 보고한다. 당시 관할 지역은 강원도, 경기도 동부뿐만 아니라 충청도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을 관할하게 되어 모든 곳을 방문하기에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1896년 정규하 신부가 풍수원 2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며 새로 설립된 원주 본당과 관할 구역 조정이 이루어져 풍수원 본당의 관할 구역은 원주, 춘천, 횡성, 평창, 영월 등의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새로 조정된 지역 역시 너무 넓어서 한번 공소 순방을 떠나면 짧게는 20일, 길게는 두 달 가까운 시간이 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공소 순방은, 공소 교우들에게는 고해성사를 보고 사제와 직접 미사를 드리면서 성체를 모시는 소중한 시간이었고, 또 교우들이 모두 함께 만나 공동체의 기쁨을 나누는 기회가 되었다. 이들 공소들은 점차 성장하여 1920년 9월에는 춘천 곰실 공소가 춘천 본당(현 죽림동 주교좌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1923년 6월에는 홍천의 송정 공소가 홍천 본당이 되었다. 그리고 1930년 11월에는 횡성 공소가 횡성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현재의 풍수원 본당과 직접 관련된 공소 중에서 공식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공소는 <오상골 공소>이다. 풍수원 초대 주임 르메르 신부가 작성한 1892-1893년의 교세 통계표에 따르면 오상골 공소의 신자를 37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풍수원의 다른 지역에도 신자들이 교우촌을 형성하여 살고 있었겠지만) 그중 그래도 규모가 가장 큰 곳이 오상골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1896년 정규하 신부가 풍수원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며 르메르 신부로부터 넘겨받은 지역에는 마라미(매남이, 지금의 횡성군 서원면 창촌)가 등장한다. 이후 한때 현재의 풍수원 관할 지역 중 많은 지역이 원주 본당의 관할지역이 되었다가 다시 1920년 무렵에는 지금은 사라졌거나 혹은 현재도 이어지는 여러 공소들의 명단이 등장한다. 1922년 정규하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공소 명단에는 소개되는 공소는 검두(금대 공소), 오상골, 매남리(지금의 창촌), 시무날리(지금의 서원면 석화리) 등이 있다.

 

우리 교회의 ‘공소’는 그저 본당과 거리가 멀고 신자 수가 적은 교회 공동체를 뜻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에 숨어들어 살던 교우들이 여전히 뜨거운 신앙을 가슴에 품고 함께 모여 기도하고, 신앙을 실천하며 박해를 이겨낸 현장이고, 서로 나누고 돕고 살며 신앙을 실천하며 살아온,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풍수원의 여러 공소들 역시 지금은 비록 도시화의 물결 속에 겉보기에는 작고 쇠락한 모습을 띠고 있을지는 몰라도 사실은 여전히 우리 교회, 우리 신앙의 깊은 뿌리이며, 모두에게 신앙의 첫 모습을 일깨워 주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2020년 5월 24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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