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사적지 자료실

교구 성지명     지역명     내용 검색

대전교구 > 솔뫼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
지번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108 
도로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솔뫼로 132
전화번호 (041)362-5021
팩스번호 (041)362-5524
홈페이지 http://solmoe.or.kr
전자메일 solmoe1821@hanmail.net
문화정보 사적 제529호(김대건 신부 생가 유적)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대전교구 버그내 순례길: 한국의 산티아고 순례길
이전글 전주교구의 작은 교회 공소를 찾아서: 장수성당 관할 수분공소
다음글 수원교구 미리내본당 설립 125주년 기념미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1-10-08 조회수150 추천수0

[함께 걷기] 대전교구 버그내 순례길


한국의 산티아고 순례길

 

 

한국의 산티아고 순례길로 불리는 대전교구 ‘버그내 순례길’은 솔뫼성지에서 신리성지까지 13.3㎞로, 천주교 성지, 문화유산 및 시설 등이 복합적으로 위치해 있다. 이 길은 한국 천주교가 공인되기 전 천주교 전파를 위해 신앙의 선배들이 걸었던 길이며,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순교자들의 압송로이기도 하다. 대전교구와 당진시의 협의로 이 길이 조성되었고, 2020년 6월 사제 성화의 날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을 준비하며 대전교구 사제단 200여 명이 ‘버그내 순례길’ 도보 순례를 하였다.

 

이곳은 내륙 깊숙이 포구가 형성되었던 삽교천의 물줄기를 중심으로, 내포의 사도라 불리웠던 이존창 루도비코의 탄생지 및 활동지였으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집안의 신앙이 꽃피웠던 곳이며, 서양의 선교사들이 입국로요 활동무대였던 곳이다. 그리하여 주요 성역이 되는 솔뫼성지와 원시장, 원시보 형제의 탄생지와 활동무대, 신리성지의 다블뤼 주교님과 교우촌을 잇는 순례코스이다.

 

 

솔뫼성지

 

‘소나무가 뫼를 이루고 있다’하여 순우리말로 ‘솔뫼’라 이름 붙여진 곳으로,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지이다. 솔뫼성지는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김대건 신부의 증조 할아버저 김진후 비오(1814년 해미에서 순교),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 안드레아(1816년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 아버지 성 김제준 이냐시오(1839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 그리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46년 서울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았던 곳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8월21일 태어나 1836년부터는 마카오에서 사제수업을 받았으며, 1845년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 1846년 9월16일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925년 7월5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1984년 5월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솔뫼성지는 지난 2014년 천주교 아시아 청년대회 개최와 더불어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여 전 세계적인 천주교 성지로 명성을 얻었으며, 사적 제529호로 지정되었다.

 

 

합덕성당 (唐津 合德聖堂)

 

합덕성당은 충청도 지역 최초의 본당으로 1890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양촌성당이 설립된 이후, 1899년 초대 본당주임 퀴를리에 신부가 현 위치에 한옥성당을 건축하여 이전하고, 합덕성당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29년 7대 주임 패랭(白文弼) 신부가 현재 건물인 벽돌로 된 고딕양식 성당을 새로 지었다.

 

합덕지역은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직후 천주교 신앙이 가장 적극적으로 전파된 이른 바 ‘내포교회’의 중심지로, 내포천주교회는 박해 동안에도 신자수가 끊임없이 늘어났고, 가장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기나긴 박해가 끝나고 신앙이 자유가 찾아오자, 순교의 터전위에 합덕성당을 세움으로써 순교자들의 염원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와같이 합덕성당은 순교의 열매인 동시에 새로운 신앙의 씨앗이 되었다.(충청남도 기념물 제145호)

 

 

복자 원시장 베드로 · 원시보 야고보의 우물

 

이 우물은 성동리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샘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곳 출신인 원시장 베드로는 내포지역의 첫 번째 순교자이다. 1788~1789년경, 사촌 원시보와 함께 입교한 그는 1791년 체포되어 천주 신앙을 끝까지 고백하다가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우물은 이 땅의 선조들과 거룩한 순교자들이 마셔온 생명의 샘이요, 영혼의 쉼터이다.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 또한 마음을 정화하고 영혼의 쉼터가 되기를 기원한다.

 

응정이를 포함한 성동리는 원시장 베드로의 고향으로 그는 마을 사람과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해 30가구 이상을 입교시켰다고 한다. 시장은 1793년 1월 홍주에서 모진 형벌 끝에 옥에서 동사하였다. 시보는 1799년 4월 청주에서 순교하였다. 둘은 2014년 8월 16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다.

 

 

성 손자선 토마스와 무명 순교자 묘역

 

이곳은 순교자. 교우들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다. 원래 마을 어귀의 대전리 언덕에 산재했던 무덤들을 1972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파묘. 이장하였다.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두상이 없는 유골들이 많았고, 묵주와 십자가가 무덤마다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 출신 성 손자선 토마스의 시신도 이곳에 안장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박해 이전까지 조선에서 가장 큰 교우촌이었던 신리-거더리는 1866년 병인박해로 말미암아 ‘피점령지’처럼 초토화되고 말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교우촌의 자취가 초라한 봉분과 함께 이렇게 남아있다.

 

 

신리성지

 

신리성지는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던 곳이다. 다블뤼 주교는 1845년 10월 김대건 신부와 함께 황산포에 첫 걸음을 내디딘 후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조선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내포지방 천주교 유력자였던 손자선 토마스의 집에 은거하면서 황석두 루카의 도움을 받아 천주교 서적을 저술하거나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조선 천주교사와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였다. 이 자료들은 훗날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의 기초가 되었고, 103위 성인을 탄생시키는데도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또한 신리는 천주교 탄압기의 가장 중요한 교우촌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교우 마을이었으며, 선교사들의 비밀 입국 처이기도 했다. 신리에서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발달된 삽교천 수계를 통해 중국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와 긴밀히 연결될 수 있었던 점과 내포지방의 문화적 개방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리성지는 조선천주교회의 요람이다. 충청도 내포지방의 중심부에 자리한 신리는 한국천주교회 초기부터 끊임없이 예비자, 신자,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성지 내 초가집은 손자선 토마스(1866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 성인의 생가이며,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주교관이자 조선 교구청이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10월호, 송기복 스테파노(대전 Re. 서기)]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Total 0 ]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