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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 강원 감영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고문의 서슬은 간곳없고
지번주소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54-1 
도로주소 강원도 원주시 원일로 85
전화번호 (033)737-4767
홈페이지 http://www.wjwd.or.kr
관련기관 원동 주교좌성당    (033)765-3350
관련주소 강원도 원주시 원일로 27
문화정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포정루와 선화당)
복자 김강이 시몬(1765?-1815년)
 

‘여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강이(金鋼伊) 시몬은 충청도 서산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성격이 고상하고 용맹한 데다가 재산도 많았다. 그러나 입교한 뒤에는 재산과 종들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아우인 김창귀 타대오의 가족과 함께 전라도 고산 땅에 가서 살았다.

1795년 초여름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고산을 방문하자, 김 시몬은 여러 차례 신부의 처소로 가서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다. 또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1년 동안을 피신해 다녀야만 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1년 동안 옥살이를 한 끝에 많은 돈을 쓰고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

박해가 끝난 뒤 김 시몬은, 등짐장사를 하면서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데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온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장사를 그만두고 경상도 진보의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리)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일구었다. 이후에도 그는 다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강원도 울진(현, 경북 울진군)에 가서 정착하였다.

경상도에서 1815년에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김 시몬은 옛 하인의 밀고로 아우인 김창귀 타대오와 조카 김사건 안드레아와 함께 체포되어 경상도 안동에 수감되었다. 이때 김 시몬은 용감하게 관장 앞으로 나아가 포졸들이 빼앗은 자신의 재물을 돌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그의 요청을 순순히 들어주었다. 보기 드문 일이었다. 김 시몬은 다시 찾은 재물을 굶주리고 있는 옥중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김 시몬은 안동에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그해 5월에는 아우와 함께 자신이 살던 강원도의 수부(首府)인 원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도 다시 문초와 형벌은 이어졌고, 그러면서 그의 아우는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김 시몬은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다.

김 시몬이 보여준 열렬한 신앙과 인내는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러자 감사는 결코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사형을 선고한 뒤, 임금의 윤허를 받고자 그 내용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때 원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김강이는 비밀리에 신자들에게 천주교 서적과 소식을 전해 왔으며, 여러 해 동안 천주교 교리를 외우고 익혀서 온몸으로 깊이 빠져 있습니다. 이에 합당한 법률을 시행토록 허락해 주십시오.”

임금은 곧바로 사형 집행을 윤허하였다. 그때 김강이 시몬은 이미 형벌의 상처가 아주 심한 데다가 옥중 생활에서 얻은 이질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 결과 김 시몬은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기도 전에 옥사하고 말았으니, 그때가 1815년 12월 5일(음력 11월 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이상이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강이 시몬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최해성 요한(1811-1839년)

 

‘양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최해성(崔海成) 요한은, 1839년에 순교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먼 친척이다. 그의 집안은 본디 충청도 홍주 다락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살았는데,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그의 조부가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온 가족이 그 지방으로 가서 생활하였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곳도 이곳이다.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 성장한 최 요한은 성격이 온순하고 정직하였다. 그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자 가족과 함께 강원도 원주의 서지(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 2리)로 이주하였고, 이곳에 작은 교우촌을 이루었다.

최 요한은 천주교의 모든 본분을 이행하는 데에 뛰어난 열성을 보였으며, 언제나 자신의 영혼을 보살피는 일에 전심하였다. 그는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애긍을 잊지 않았다. 또 자주 교우들을 격려하면서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서지 교우촌에 선교사가 와서 성사를 베풀 때면, 최 요한은 말할 수 없는 열심에 불탔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이러한 덕행 때문에 그는, 그 마을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견진성사를 받은 뒤에는, 성령 칠은의 특은을 충만히 받은 징표가 나타났으며, 이내 그의 마음은 순교의 뜻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 요한은 먼저 부모와 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교회 서적을 가져오려고 다시 집으로 갔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포졸들은 쇠도리깨로 그를 때리면서 ‘교우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그의 몸은 이내 상처투성이가 되어 가눌 수조차 없을 지경이 되었지만, 그는 영혼의 눈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원주 관장 앞으로 끌려간 최 요한은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형제들을 고발할 수 없다.’고 용감하게 대답하였다. 관장이 ‘네가 사악한 종교를 믿는다니 정말이냐?’라고 하자, 그는 “저는 사악한 종교를 믿지는 아니합니다. 하늘의 주님을 섬기는 천주교를 믿을 따름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최 요한은 일단 옥에 갇혔다가 며칠 뒤에 다시 끌려 나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관장이 여러 가지 말로 유혹하면서 배교를 권유하자, 그는 이를 거부하면서 “원주 고을을 다 주신다고 해도 거짓말을 할 수 없고,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후에도 최 요한은 자주 옥에서 끌려 나가 감사나 영장 앞에서 수없이 많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 와중에도 그는 불평하지 않고 예수님과 성모님의 도움만을 청하였다. 그는 살이 너덜너덜해지고 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매를 맞아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곤 하였다. 어느 날 그는 다시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를 받게 되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가 지금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의 목숨을 보존하려고 한다면, 제 영혼은 영원히 죽을 것이므로 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임금과 의(義)를 위해 죽겠다고 약속하고 나서 배반하는 백성이 있다면, 그는 반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의 위대한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맹세한 제가 어찌 형벌을 두려워하여 이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관장은 화가 나서 그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최 요한의 몸은 다시 피투성이가 되었고, 살은 갈기갈기 찢어졌지만,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붙은 그의 영혼은 기쁨으로 용약하였다.

옥으로 돌아온 최해성 요한은, 일시적으로 유혹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리 주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림으로써, 인성의 나약함을 억누를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기쁨과 평화가 다시 그의 마음에 찾아왔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마침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39년 9월 6일(음력 7월 2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최해성 요한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최 비르지타(1783-1839년)

 

최(崔) 비르지타는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남편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신유박해 때 남편이 교우 황사영 알렉시오를 숨겨 준 죄로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그녀도 남편을 따라 그곳으로 갔다. 1839년 원주에서 순교한 최해성 요한은 그녀의 조카이다.

최 비르지타의 남편은 유배된 다음에 그곳에서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에게 대세를 줄 교우를 불러올 수가 없었으므로, 그녀는 ‘남편이 다시 살아난다면 남편과 정결을 지켜 남매처럼 살겠다.’는 결심을 한 뒤에 자신이 대세를 주었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의지할 데가 없었으므로 오빠에게로 돌아왔다. 그 오빠가 곧 최해성 요한의 부친이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 요한은 가족을 피신시킨 뒤에 집으로 천주교 서적을 가지러 갔다가 체포되어 원주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최 비르지타는 조카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렵지 않게 조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감옥으로 갔다가 관원들에게 발각되었다.

관원들이 신분을 묻자, 최 비르지타는 “옥에 갇혀 있는 최 요한의 어미요. 아들을 보러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관원들이 “그렇다면, 너도 천주교 신자가 아니냐?”라고 하자, 그녀는 “그렇습니다. 틀림없는 교우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관원들은 ‘배교하지 않으면 아들을 만날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최 비르지타는 배교를 거부하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 아들을 다시 보지 못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하느님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가 하느님을 배반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관원은 최 비르지타를 죄인이라고 지목하면서 그녀에게 고문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굴복하지 않고 이를 참고 견디어 냈다. 그러자 관원은 그녀를 옥에 가두고 굶겨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은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최 비르지타는 금방 죽지 않고 4개월 동안 옥중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만 하였다. 4개월 뒤에도 최 비르지타가 죽지 않은 것을 본 관원은 다시 똑같은 명령을 내리면서 ‘3일 안에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이때 옥리들은 3일 안에는 그녀를 굶겨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날 밤에 옥으로 들어가 그녀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으니, 이때가 1839년 12월 8일(음력 11월 3일)과 9일 밤 사이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6세였다.

최 비르지타가 순교한 뒤, 옥리의 어머니는 옥에 갇혀 있던 한 교우를 찾아가 이렇게 말해 주었다. “최 비르지타는 틀림없이 천당에 갔습니다. 그 여자의 목을 졸라 죽일 때에 그녀의 몸에서 한 줄기 빛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거든요.”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최 비르지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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