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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 삼성산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앵베르, 모방, 샤스탕 세 성인이 묻힌 곳
지번주소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산54-14 
도로주소 서울시 관악구 호암로 454-16
전화번호
팩스번호 (02)875-2275
홈페이지 https://www.ssssd.or.kr/
관련기관 삼성산 성당    (02)875-2271
관련주소 서울시 관악구 호암로 545(삼성산 성당)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1796-1839년)
 
성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Laurent Joseph Marius Imbert) 주교의 세례명은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이며,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이다. 그는 1796년 3월 23일 프랑스 남부 엑스(Aix) 교구의 마리냔(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앵베르가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카브리에(Cabries)의 라보리(Labori)로 이사하였고, 앵베르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집안은 가난하였지만 그 자신은 총명할뿐더러 기도나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묵주 만드는 법을 배워 공부를 하는 한편, 나이 많은 부친의 생활에도 보탬을 주었다고 한다.
 
그가 마음속에 동방의 포교지방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엑스의 대신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그래서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로 옮겨가 공부한 후, 1819년 12월 18일에 성품성사를 받고 곧 중국의 사천(四川)으로 파견되었다. 앵베르 신부는 12년 이상 사천에 머물렀다. 그는 중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혔으며, 모든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던 중 1836년에 조선의 제1대 교구장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주교가 사망하자 곧 주교품을 받고 조선의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 해 12월 17일 중국 대륙을 건너 몽고의 서만자(西灣子)에 머물고 있던 그는 마침 조선 사신의 수행원으로 동행한 교우 조신철, 정하상 등의 협력을 얻어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의 교우들은 처음으로 주교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실로 조선 교회가 설립된 지 53년만의 일이었다.
 
3개월 동안 조선말을 배운 앵베르 주교는 고백을 듣고서 성사를 줄 수가 있었다. 그는 이미 조선에 와 있던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와 함께 지방을 순회하기도 하고,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는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교회는 오랜 재난을 겪은 후 주교를 맞으면서 재생하기 시작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스러운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항상 허약하고 병든 몸으로 매우 바쁜 생활을 하였지만, 한편으로 그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삼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 무한히 괴로운 것은 박해로 말미암아 신입교우들의 신앙이 끊임없이 위협을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드디어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었다. 곳곳에서 교우들이 체포되자 앵베르 주교는 박해가 퍼지기 전보다 더 많은 교우에게 성사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교우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러는 동안 사태는 점점 위태롭게 되어갔고, 배교자들의 자백으로 3명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배교자 김여상은 관헌들과 짜고 주교를 유인하려고 하였으며, 주교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스스로 자수의 길을 택하고, 다른 두 신부들도 주교의 권고를 받아들여 즉시 관청에 자수하도록 하였다. 포청의 옥중에서 세 선교사는 서로 만날 수 있었다. 주교는 여러 번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며 두 신부들과 함께 옥중의 고초를 이겨냈다. 조선 정부는 그들이 절대로 배교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마침내 대역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에 처하도록 판결을 내리고, 처형 장소는 한강변의 새남터로 결정하였다.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세 선교사들은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군사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벗긴 다음 손을 앞가슴으로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 한 군사가 장대 위에 기를 올리고 또 다른 군사는 사형 선고문을 읽고 나서 수형자들을 무릎 꿇린 다음 열 명 가량의 병정이 달려들어 칼질을 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잃게 되었다. 앵베르 주교는 1839년 9월 21일에 순교하였으며,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1803-1839년)
 
성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의 한국 성은 나(羅)씨이고, 이름은 세례명인 베드로(Petrus)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백다록(伯多祿)이라 하였다.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칼바도스(Calvados) 지방의 바시(Vassy)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세계의 끝까지 가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포교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829년 5월 13일 사제로 서품된 그는 선교사의 꿈을 꽃피우기 위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중국 사천(四川) 교구로 파견되었다. 포교지로 가던 도중에 그는 조선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주교와 동행하기를 희망하였다. 주교는 그의 경건함과 열성적인 면을 생각하여 기꺼이 조선의 선교사로 받아들였다.
 
주교가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만주에서 선종하자, 그는 당시 주교를 영접하기 위하여 그곳에 와 있던 조선의 교우 5명을 만나 조선에 입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의주 변문을 통과하여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때가 1836년 1월 12일로 그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 선교사가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후 모방 신부는 조선어를 배우는 한편 우선 한문으로 성사를 주기 시작하였고, 서울에서 시작하여 다음에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열여섯 곳 내지 열일곱 곳의 교우촌을 돌며 포교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 해 12월까지는 어른 2백 13명에게 세례를 주고, 6백 명 이상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또 가는 곳마다 회장들을 뽑아 주일과 축일에 교우들을 모으고, 그 모임에서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고 교리문답과 복음 성경과 성인전기들을 읽고 배우도록 지도하기도 하였다.
 
모방 신부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큰 관심을 두어 최양업 토마스(Thomas), 최방제 프란치스코(Franciscus),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 등 세 소년을 택하여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에게 필요한 덕행을 가르치는 한편, 당시의 상황 하에서 조선 내에서의 교육이 불가능했기에 1836년 12월 2일에는 이들을 ‘마카오’로 보내어 정식으로 신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이듬해 1월 15일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모방 신부는 곧 양평 지방으로 내려가 전교하는 동시에 조선어를 다시 배워 조선어로 성사를 주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몸이 쇠약해져 있었고, 그래서 결국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포교를 하던 중 열병에 걸려 서울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상태가 절망적이었기 때문에 샤스탕 신부로부터 병자성사까지 받았으나 3개월 후에 겨우 회복되었다. 1837년 말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자, 1839년까지의 선교사들의 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해년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다시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선교사들도 그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앵베르 주교의 권유로 자수하여 홍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당하여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1803-1839년)
 
성 쟈크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e Chastan) 신부의 한국 성은 정(鄭)씨이고, 이름은 본명인 야고보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아각백(牙各伯)이라 하였다. 그는 1803년 10월 7일 프랑스 디뉴(Digne) 인근에 있는 마르쿠(Marcoux)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양떼 지키는 일로 부친을 도왔다. 그는 1823년에 신학교에 들어가 3년 만에 성품성사를 받고, 이듬해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교육을 받고 프랑스를 출발하였으나, 얼마동안 중국에 입국하지 못하고 말레이 반도의 페낭 신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던 중,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가 조선 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파견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동행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마카오’를 거쳐 중국 본토를 여행하는 동안에 그는 조선에 입국하여 있던 모방(Manbant, 羅) 신부로부터 입국의 안내를 적은 편지를 받았다. 1836년 말 조선의 교우 정하상, 조신철, 이광렬 등의 안내를 받아 변문을 통과한 후, “나는 천주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들의 구원과 특히 나의 구원을 위하여 일을 할 것이므로 어떤 일이라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회가 오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통을 감수할 힘을 주님께 기대합니다.” 하며 자신의 기쁨을 토로했다. 상복 차림을 하고 15일 동안을 걸어서 서울에 도착한 샤스탕 신부는 모방 신부를 만나 자신들의 봉헌과 희생의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샤스탕 신부는 서울에 머물면서 조선어의 초보를 배우기 시작하고, 2개월가량 성찰규식을 외운 다음 조선말로 백 명가량의 신자들에게 첫 고해성사를 줄 수 있었다. 그 후 샤스탕 신부는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성무집행을 계속하였다. 그동안 샤스탕 신부는 모방 신부와 함께 열심히 노력한 결과 1837년 한 해에 영세자 1천 2백 37명, 고해자 2천 78명, 영성체한 사람이 1천 9백 50명이라는 숫자를 기록하였다.
 
이윽고 기해년에 이르러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샤스탕 신부는 되도록이면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면서 맡은 바 업무를 수행하던 중, 1839년 기해박해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체포되고 이어 자수를 권고하는 주교의 편지를 은신처에서 받았다. 앵베르 주교의 권고를 따라 그는 모방 신부와 함께 9월 6일 관청에 자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1일 성 마태오(Matthaeus) 축일에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샤스탕 신부의 나이는 35세였다.
 
샤스탕 신부와 다른 두 선교사들의 시체는 20여 일 동안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다가, 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노고산에 안장되었다. 그 후 그들의 유해는 1843년에 발굴되어 삼성산에 안장되었다가 시복 수속이 진행된 1901년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로 옮겨졌고, 같은 해에 다시 명동 성당 지하묘지로 옮겨졌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증거자 박순집(朴順集) 베드로(1830-1911년)
 
많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듣고, 목격한 것을 증언하고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에 큰 공을 세운 박순집(朴順集) 베드로는 1890년에 인천 제물포로 이주(移住), 1911년에 숙골(현 도화동)에서 82세의 나이로 선종, 인천 교구와 인연을 갖게 되었다.
 
박순집 베드로는 1830년 10월 9일 서울 남문 밖 전생서(典牲署, 현 용산구 후암동)에서 순교자 박(朴) 바오로와 김(金) 아가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 바오로 나이 21세에 맏아들 요왕을 낳고, 24세 둘째 아들 베드로를 낳았다. 두 아들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으나 베드로가 세 살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였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착한 베드로는 신체 발육이 남달라 성장하며 힘이 장사로 마을 대항 씨름 대회에 나가 소년 장사가 되어 황소를 타 마을로 개선하기도 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소년 박 베드로는 이조모(姨組母)댁이 1837년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 범(范)] 주교가 입국하여 은신하며 머물고 있는 북촌 마을 근처에 있어 이모의 도움으로 주교님의 심부름꾼이 되기도 하며 주교님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교의 사랑을 받은 지 1년 남짓한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 많은 교우들과 앵베르 주교, 모방(Maubant, 羅) 신부, 샤스탕(Chastant) 신부가 잡혀 주교와 신부들은 새남터에서, 교우들은 서소문 밖 형장에서, 당고개에서, 옥에서 치명 순교하였다.
 
이러한 기해(己亥)박해 때 그의 부친 박 바오로는 훈련도감 포수(訓練都監 砲手)로 봉직하고 있었기에 새남터에서 순교한 주교, 신부들의 순교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에 박 바오로는 몇몇 교우들의 도움으로 새남터에서 주교와 신부들의 시신을 지키던 군사들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모래로 대강 덮은 무덤 가까이 가서 손으로 모래를 파헤치고, 잘라진 목과 시체를 전부 찾아내어 머리 셋은 다 수염이 길어 입에 물고, 시체 삼구는 등에 업고 양팔에 끼고 나와 기다리고 있던 교우들이 준비한 관에 대강 수습하여 그 밤으로 노고산(老古山, 현 마포구 노고산동)에 안장하였는데 이는 죽음을 각오한 순교자적 고귀한 희생이었다. 그 후 박 바오로는 복잡한 서울 근교에 안장한 성직자의 묘가 안심이 안 되어 1843년, 박씨 집안의 선산인 삼성산(三聖山, 현 관악구 신림동)으로 이장하며 사기그릇에 순교 연월일과 이름을 먹으로 써서 묘에 함께 묻고, 후일 찾기 쉽게 표식을 해 놓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삼성산에 모셔진 묘로 그의 아들 베드로를 데리고 가서 “후일 성교회에서 성직자 무덤을 찾을 터이니 네가 잘 보아 두었다가 가르쳐 드려야 한다.”고 전하였다.
 
그리고 박 바오로는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안성(安城) 미리내로 이장되기 전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새남터에서 김 신부의 시신을 찾아내서 와서(瓦署, 현 용산구 한강로3가 왜고개)에 안장하였다. 당시 17세였던 박순집도 서소문과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 형장으로 가는 김대건 신부를 목격하였다.
 
박순집은 25세에 그의 부친과 같이 훈련도감의 군인이 되었다. 1866년 병인(丙寅)박해가 일어난 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 주교, 브르트니에르(白) 신부, 볼리외(徐) 신부, 도리(金) 신부, 프티니콜라(朴) 신부, 푸르티에(申) 신부와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등이 3월 7일과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할 때 박순집은 군인으로 참여하게 되어 이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그래서 박순집은 아버지 박 바오로의 뜻을 이어 가기로 결심하고, 박순지(朴順之,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3월 28(음) 시신을 찾아내어 새남터 부근에 임시 매장한 후 4월 14일(음)에 다시 와서(왜고개)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3월 7일과 9일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南鍾三, 요한)과 최형(崔炯, 베드로) 시신도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어 와서에 안장하였으며, 3월 9일에 순교한 전장운(全長雲, 요한), 3월 11일에 순교한 뒤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진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의 시신은 훗날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병인년 박해가 날이 갈수록 혹독해져 갈 즈음, 프랑스 함대가 서양 선교사의 처형에 대한 항의로 강화도를 통해 한강 양화진까지 침입, 전투를 벌임과 동시에 강화도에 상륙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관아와 민가에 방화한 후 많은 문화재를 약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대동강을 통해 평양까지 들어온 미국 상선이 통상을 요구하다 아군에 의해 배가 전소된 사건을 빌미로 미국 함대가 인천 제물포까지 올라와 항의를 하는 등의 사건이 발행하여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실권자 대원군은 천주교인들이 서양 오랑캐를 불러 들였다는 빌미로 더욱 박해를 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박순집의 가족도 결국 검거망에 걸리게 되어 양화진(현 절두산)에서 1866년 10월 17일 형 요왕의 아들 박 바오로(20세), 고모 박 막달레나, 1868년 3월 29일 부친 박 바오로(63세)가 잡혀 순교하였고, 포청 옥에서 1868년 3월 26일 큰삼촌 박 바오로(70세), 큰삼촌 아들과 그의 부인, 작은삼촌과 그의 부인, 3월 29일 형 박 요왕(46세), 형수 손 발바라(39세), 12월 21일 장모 홍 유시디아(58세), 1870년 2월 21일 팔촌 형 박 바오로와 함께 옥사하였고, 인천 제물포에서 이모부 손 베드로 넓적이(68세)와 이모, 이모부의 사위 박치문(요왕, 42세)이 1868년 4월 20일에 인천에서 순교하였고, 형 박 서방(58세)이 4월 20일에 강화에서 순교하였다. 이처럼 박순집 일가에서 16위의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나 박순집은 여러 박해의 검거망을 기적적으로 피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래서 박 베드로는 가족 시체들을 찾아내어 아버지와 형님 내외분, 백부의 시체를 '둔짐'이란 곳에 안장하였다.
 
공식적인 박해가 철회된 1876년, 박순집은 교회의 밀사 최지혁(崔智赫, 요한)과 고종의 유모 박(朴) 마르타의 딸 원(元) 수산나 등과 협력하여 드게트(崔) 신부, 블랑(Blanc, 白) 신부 등을, 1877년에는 리델(Ridel, 李, 제6대 교구장) 주교, 두세(丁) 신부, 로베르(金) 신부 등을 입국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 후 1888년에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白) 주교가 프오델(朴) 신부에게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도록 하자 프오델 신부는 박순집을 불러 자신이 보고 들은 것과 순교자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자신의 집안과 다른 순교자들의 행적을 교회 법정에서 증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기 권 타대오에게는 한 마디도 바꾸지 말고 기록하도록 하여 증언록이 작성되었는데 이 증언록이 박순집 증언록(丙寅事蹟 朴順集證言錄)으로 3권에 153명의 순교자 행적이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1899년 10월 30일, 박순집의 도움으로 와서에 있던 7명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안장되었고, 1901년 10월 21일에 삼성산에 묻혀 있던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유해도 발굴되어 예수성심신학교를 거쳐 같은 해에 명동성당 지하실에 안치되었으며, 1909년 5월 28일에는 와서에 묻혀 있던 남종삼과 최형의 시신이 발굴되어 명동성당에 안치되었다.
 
이처럼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과 유해 발굴에 큰 공을 세운 박순집은 1878년에 홍제원(현 홍제동) 장거리 고개 밑에서 살았는데 교회를 위해 자신의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1888년에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자 셋째 딸 박황월(朴黃月,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을 수녀회에 입회시켰다. 그래서 박 수녀는 조선인 최초 5명의 수녀 중 한 분으로 그가 95세의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어릴 때부터 보고 들은 것을 자세히 기록하여 놓았는데 이 글에는 자신의 가족들의 순교 행적과 신앙생활, 수도회 역사의 내용으로 아버지 박순집 증언록처럼 교회의 산 기록이 되고 있다.
 
1889년에는 인천에 사는 한 교우가 박순집을 찾아와서 인천 제물포(濟物浦)로 내려와 전교해 줄 것을 간곡히 청하자 1890년에 전교의 원대한 포부를 간직하고 아들 식구와 전 가족을 데리고 제물포로 이사했다. 박순집이 제물포에 와서 근교에 교우를 살펴보니 자기를 인천으로 초대한 교우 가정과 또 한 가정, 일본인 교우집, 중국인 한 사람이 전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 베드로는 1889년에 한국인 59명, 일본인 25명으로 설립된 답동본당(초대 주임 빌렘 신부) 사목을 도우며 전력을 다하여 전교에 힘썼다. 그런데 1893년에 박순집의 집터가 경인 철도 부설로 인하여 철도 부지로 편입되어 부득이 외곽지역인 주안 숙골(현 도화동)에 밭을 사서 이주하여 생활을 하다가 1911년 6월 27일 82세의 나이로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며 선종하였다.
 
그런데 방안에는 향기가 풍기어 장손 요셉이 밖으로 나가 지붕을 올려 보자 동쪽으로 뻗친 두 줄기 광채는 마치 쌍무지개 같았고, 이웃 동네 사람들은 온통 불빛에 쌓여 있는 박 베드로의 집을 보고 불이 난 줄로 알고 손에 손에 물통을 들고 불을 끄려고 몰려왔다. 그러나 집은 타지 않고 광채의 서기만 있어 모두 놀라 장남 요셉에게 신비스런 현상을 이야기하며 주위를 살피니 박순집 베드로가 선종하면서 나타난 서기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 땅에 무릎을 꿇고 박순집 베드로가 성인이 되었다고 칭송하였다. 그리고 박순집 베드로의 시신은 독쟁이(현 용현동)에 묻었다.
 
이처럼 박순집 베드로의 일생은 순교자의 정신으로 신앙생활을 실천한 증언자의 삶이었다. 그리고 인천으로 이주해 와서 산 20여년은 평신도 사도직을 성실히 수행하여 오늘날 인천교구 발전에 초석이 된 삶이었다.
 
그래서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에서는 교구 신자들의 순교자 현양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용현동(독생이)에 묻혔다가 1961년 8월 31일 천주교 서울교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내로 천묘된 박순집 베드로의 유해를 서울교구의 도움으로 2001년 5월 24일 그가 말년에 살았던 도화동과 인연이 있는 도화동 성당 내에 봉안하여 순교자 현양 기도 모임을 갖고, 9월 순교자 성월에 강화 갑곶 성지 내에 천묘하였다. [출처 : 갑곶순교성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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