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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 수리치골 성모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골짜기마다 신앙의 숨결이 배어 있는
지번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봉갑리 356-6 
도로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용수봉갑길 544
전화번호 (041)841-1750
팩스번호 (041)841-7980
홈페이지 http://www.trihm.kr
전자메일 trihm@hanmail.net
관련기관 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수리치골 내력

수리치라는 이름은 이곳 산에 많이 자생하던 수리치라는 산나물 이름에서 비롯되었고, 수리치골 성지는 박해시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자들이 숨어 살게 되면서 형성된 교우촌으로서 유서 깊은 신앙의 요람지이다. 박해시대에 서양 선교사들이 서해안을 통해 몰래 입국하여 충남 내포 지방은 일찍부터 여러 곳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즉 지금의 삽교천은 원줄기 예당 저수지 및 예당의 여사울까지 배가 들어왔으므로 예산(여사울 이존창 생가터), 합덕(솔뫼 성지, 합덕 성당), 홍성(해미 성지), 청양(다락골 줄무덤) 등을 비롯하여 이곳 수리치골 주위에 오늘날 많은 성지들이 함께 자리잡게 된 것이고, 이곳 수리치골에 신앙의 전성기에는 백여 호의 신자 마을이 형성되었고, 좁은 골짜기이고 보니 산중턱까지 집터가 있고, 골짜기 깊은 곳에는 논밭의 흔적을 지금도 알아 볼 수 있다. 그때 교우들은 오직 신앙을 위해 이 심산유곡에 숨어 살았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처럼 농사를 지어 마당재라는(십자가의 길 좌측 얕은 산 고개 넓은 터가 있음) 곳에서 함께 타작하여 필요한 만큼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이와 같이 수리치골은 한국 천주교회가 시작될 때 서울을 중심으로 충청도에도 일찍부터 선교사들의 활동무대가 되어 주문모, 모방 나 신부님께서도 이 지방에서 전교하신 듯하며 또 다른 의미로는 한국교회의 지리적으로 보아 서울은 머리요 충청도는 심장에 해당된다고도 볼 수 있다.
 
그 뒤 1845년 10월 12일 성 김대건 신부님과 함께 입국하신 한국교회의 제3대 교구장이신 고 주교님과 다블뤼 안 신부님(후에 5대 교구장 주교님으로 성성)께서 이곳에 은거하며 전교하시던 중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 소식(1846년 9월 16일)을 듣고 그해 11월 2일, 그때 마침 미리내에 김대건 신부님께서 안장되던 날, 그때의 암울한 한국 교회를 성모성심께 봉헌하시고 작은 오두막집에서 몇 명의 신자들을 모아 성모성심 신심회를 조직하고 4일 뒤 그 본부가 있는 프랑스 파리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신부(성모성심 신심회 창설자)에게 보고하셨던 것이다. 그 후 페레올 고 주교님께서는 8년 동안 활동하시다가 1853년 2월 3일 병을 얻어 45세로 선종하시면서 김대건 신부님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으로 미리내에 안장되어 계신다. 그래서 수리치골 성지 입구 왼쪽 골짜기는 페레올 고 주교님께서 은거하셨다 하여 오늘날까지 마을의 외인들이 페레장골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을 찾게 되자 이곳 신자들은 모두 떠나고 외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자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이 장소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수리치골의 확인 개발 과정
 
성 김대건 신부님, 고 주교님, 김대건 성인의 모친 고 우르술라의 묘를 모신 미리내 성지에서 천주성삼성직수도회와 성모성심수녀회와 성요셉애덕수녀회를 창설한 정행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수리치골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성지 미리내와 수리치골에 하느님의 신비로운 섭리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이 순교하시고 미리내에 안장되신 바로 그 무렵에 페레올 고 주교님이 한국과 한국교회를 성모님께 봉헌하시고, 성모성심회를 창설하셨고, 그리고 그 두 분이 미리내에 함께 묻혀 계신 때문이기도 하며 또 성모성심수녀회가 미리내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으니 자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정 프란치스코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 성모성심 신심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이 수리치골에 가보고 싶은 뜻을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다. 그러나 박해 시대가 끝나고 교우들이 그곳을 떠났으므로 역사에만 있고 그 확실한 장소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으니 그곳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막연하기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정 프란치스코 신부는 컬러 화보판 "한국 천주교 성지" 제2권과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하권에 언급되어 있은 수리치골에 대한 내용을 보셨다.
 
"한국 천주교 성지" 제2권 50면에는 성모성심회를 창립한 수리치골이 "국사봉을 중심한 피신처"라는 제목 아래 지도와 사진까지 나와 있으며, 사진 2호 설명에는 "국사봉을 타고 들어앉은 수리치골에는 100여호 살아 있음직한 교우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집 건물은 풍상 속에 없어지고 반듯하고 평평한 집터가 붉은 기운이 도는 구둘돌과 함께 세월의 흐름을 대신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지도에는 공주군 유구면 봉곡리 천주교회 - 조산소 배실 수리치골이라고 순서대로 기록해 놓았다.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하권, 136∼137면에는 수리치골에 대해 "그들은 경당이 없어 많은 신자가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들은 외딴 곳에 열심한 신문 교우 한 가족이 사는 조그마한 오막살이를 골라잡았다. 1846년 11월 2일에 성모 마리아와 새로운 결합을 튼튼히 하는 것을 기뻐하는 몇몇 신자 앞에서 성모성심회를 창설하였다. 4일 뒤 선교사들은 승리의 성모 성당 주임 데쥬넷트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어 수리치골에 이렇게 세운 작은 신도회를 그의 명부에 올려 달라고 청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137면 하단 각주 42번에는 수리치골을 지금의 충남 공주군 신풍면 봉갑리 "공주 천주교회 연혁" 1955년 p.5, "경향 잡지" 1931년 pp.30∼31 참조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경향 잡지에 실린 내용을 살펴보니, "성모성심회를 세우던 기념적 지방은 수리치골이 분명하다. 유 부주교 생존하실 때에 성모성심회를 건설하던 곳을 찾기 위하여 잡지에 광고로써 물어 보아도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음은 수곡리라 한 연고이로다. 그 11월 말일 잡지 논설에 조선 성교회 대주보를 말할 때에 달레 역사에 기록한 대로 수리치골에서 고 주교께서 안 신부와 더불어 성모성심회를 건설하신 사정을 말하였더니, 여러 노인 교우들이 대답하되, 공주 땅에 둠벙이, 갑피, 수리치골 세 공소는 다 서로 가까이 있는 유벽한 산중 공소로 교우들이 많이 살았는데, 둠벙이 산에는 베드로 오 신부 묘소가 있는데, 지금은 '공주군 신하면 조평리'라 하고 성모성심회를 세우던 수리치골은 '공주군 신하면 봉갑리'라 하더라.
 
요셉 이 신부의 묘소와 홍 신부의 묘소는 다 황무실(공주 땅인지?)에 있고, 프란치스코 양 신부의 묘소는 시흥군 봉천리에 있으니 둠벙이에 있는 신부의 묘소는 오 신부의 묘소인 줄을 교우들이 분명히 알더라."라고 언급되어 있었다.
 
정 프란치스코 신부는 1985년 7월 17일에 위의 자료들과 지도를 가지고 세 수사를 데리고 수리치골을 찾아 나섰다. 가는 길에 여러 차례 장소와 길을 물었지만 수리치골이라는 이름을 아는 이가 없었다. 유구면으로 갈까 신풍면으로 갈까 망설이다가 일단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기록된 신풍면으로 찾아 갔다. 신풍면 소재지에서 길가에 있는 두 노인에게 길을 물어 보았더니 마침 한 노인이 옆의 노인을 가리키며 이분이 수리치골에서 왔다고 하기에 반갑게 인사를 하고 그분을 차에 모시고 수리치골로 찾아 들어갔다. 이분이 이창구씨인데 당시 회갑이라 했으니 육순이 넘으신 분이다. 자세한 것을 물어보니 그가 어릴 때 수리치골에는 오두막집 두 채만 있었는데 그 집조차도 언제 없어졌는지 지금은 자취도 찾아볼 수 없으니 수리치골이라는 마을은 자연히 잊혀지게 된 것이라 한다. 이창구씨 집이 수리치골로 가는 도중에 있어 거기서 잠시 내렸다가 다시 함께 수리치골을 찾아 갔다. 가는 길은 숲이 우거진 깊은 산골인데다가 비가 와서 빗물이 세차게 흘러 내렸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그 장소까지 가지 못하고 대강 위치 설명만 듣고 그날은 일단 돌아왔다.
 
1986년 4월 4일에 정 프란치스코 신부는 수도원 가족 몇 명과 함께 수리치골을 다시 찾아 갔다. 지난번에 만났던 이창구씨의 집을 먼저 찾아 갔으나 출타 중이어서 안내를 받지 못하고 그냥 그 골짜기를 찾아 갔다. 마침 전에 부친과 함께 그 마을에서 살다가 지금은 서울에 살면서 선산을 돌보러 온 기봉상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그 마을에 사는 노인 한 분에게서 이야기 듣기를, 옛날에 이 골짜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면서 농사를 지었는데 마당재에 가서 같이 타작을 해서 나누어 가졌다고 하였으며, 또 그 장소가 현재도 그대로 있다고 가르쳐 주며, 신자들이 살던 집터도 자기에게 일러주어 알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정 프란치스코 신부는 그 일대를 자세히 둘러 보고 돌아왔다.
 
1986년 5월에 정 프란치스코 신부는 또 수도원 가족 몇 명과 함께 수리치골을 찾아갔다. 산골짜기 안까지 들어가서 다시 살펴보고, 동네 사람들한테 확인을 해 보았는데 그들은 이곳이 옛날 천주교 신자들이 살았던 바로 그 수리치골이 틀림없다고 했다.
 
그 후 1986년 8월 하순에 정 프란치스코 신부는 대전을 다녀오는 길에 "한국 천주교 성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수리치골의 위치인 유구면 봉곡리를 확인하기 위하여 교우촌을 물어서 찾아 갔더니 교우촌은 봉곡리가 아니고 명곡1구 5번지 사기점골이라고 했다. 그곳의 공소 회장은 이 시몬 씨이고 부회장은 김 베드로 씨였는데 "이곳에는 그런 장소가 없다." 하며 욕골 공소에 가보라고 하였다. 안내를 청해서 회장들과 함께 욕골 공소에 갔다. 욕골 공소 회장 구자동(야고보) 씨에게 자세한 것을 물으니 "유구면은 예전에 신상면이라 하였고, 욕골 공소는 현재 명곡 2구에 있습니다." 하고, "조산소가 이 부근에 있기는 하나 산모들을 위한 조산소가 아니고 조씨 문중 산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국사봉이 없고 극정봉이 있습니다. 현재 신풍면은 예전에 신하면이라 했는데 거기에는 봉갑리에 국사봉도 있고 수리치골도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 프란치스코 신부에게 지도를 보여주기에 한 장 얻어 왔다.
 
이렇게 수리치골을 확인한 정 프란치스코 신부는 이 사적지를 개발해야겠다는 뜻을 대전교구 경갑룡 주교님과 수원교구 김남수 주교님에게 말씀드리고 1986년 12월에 1차로 그 부근 전답을 매입하고, 1987년 봄에 2차로 또 필요한 전답과 산을 매입하였다. 그리고 1988년 5월 25일에는 수원 교구장이셨던 김남수 안젤로 주교님의 주례로 수리치골 내에 성모성심 봉쇄 수도원 대지 축성 및 기공식 미사를 거행하였다.
 
1988년 6월 6일에는 승리의 성모상을 모시고 가서 세웠으며, 이날 전에 수리치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기봉상 씨와 이창구 씨 그리고 땅 주인이었던 이경윤 씨를 모시고 수리치골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마당재와 호랑이 굴로 안내하며 설명해 주었다.
 
1988년 8월 19일에는 가톨릭 신문사 수원분실의 권순기 실장, 최창우 취재부 차장, 이정화 기자가 수리치골을 확인하는 취재를 하고 갔으며, 또 한국 교회사 연구소에서도 수리치골 골짜기를 살펴보고 조사한 결과 그 곳이 틀림없는 수리치골이며, 고 주교님이 성모성심께 한국교회를 봉헌하고 그곳에서 성모성심 신심 단체를 조직한 자리가 틀림없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 성지"에 지금까지 잘못 소개된 내용을 수정하여 책을 다시 내놓았다.
 
수리치골은 비포장일 뿐 아니라 동네까지 경운기가 간신히 들어 갈 수 있는 아주 좁은 길이었다. 1988년 올림픽이 시작될 무렵부터 이 길을 닦기 시작하였는데 1989년에는 길을 측량하여 산도 하나 헐어서 골짜기 밑에까지 길을 닦고 상수도도 놓게 되었다.
 
1988년 올림픽 준비 기간과 올림픽이 거행될 동안, 남녀 수도자들과 교우들은 올림픽이 무사히 치러질 수 있도록 수리치골에서 많은 기도와 희생을 바쳤으며, 제주 교구 이태수 미카엘 신부(당시 총대리), 대전교구 백남익 디오니시오 신부(당시 C.B.C.K. 사무총장) 그리고 천주성삼수도회의 총장 정행만 프란치스코 신부와 성성우 안토니오 신부가 올림픽 기간 동안 9일 미사를 드리기도 했었다. 세계 성체대회 하루 전날인 1989년 10월 7일에는 아시아 주교 열여섯 분이 수리치골에 오셔서 미사 봉헌을 하시고 겟세마니 동산에 올라가 기도를 드리셨다.
 
1990년 8월 22일에는 성직자들을 위한 수리치골 봉쇄 수도원이 완공되어 대전 경 주교님의 주례로 축복식을 갖게 되었다. 1990년 9월 22일에는 스페인에서 오신 몬시뇰 마티아스 주례로 천주성삼상 제막식을 하였으며, 1993년 6월에는 성모 칠고상을 만들어 세우고, 정 프란치스코 신부의 주례로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96년 10월에는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 순교 150주년을 맞아 수리치골에서도 기념 행사를 가졌다.
 
공주 수리치골 사적지를 찾아 개발한 후 이곳의 봉쇄 수도원에는 여러 교구에서 신부님들이 와서 자신의 사제직에 대해 재성찰하면서 관상 생활을 하였는데 그렇게 지내시다가 사목 일선으로 돌아가 성무 활동을 하시는 분들도 있고, 그냥 수도회에 머물면서 관상 생활을 계속 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1997년 5월 이 봉쇄 수도원은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고,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가 수리치골로 옮겨 와 한국 교회의 성모성심 신심의 뿌리를 찾아 많은 교우들이 성모성심의 뜻을 알아듣고 천주성삼께 영광을 드릴 수 있도록 성모성심 발상지가 알려지게 되길 기도와 희생을 바치며 생활하고 있다. [출처 : 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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