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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 손골(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선교사들의 선교 거점이자 성 도리 헨리코 신부님이 체포된 곳
지번주소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734 
도로주소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로437번길 67
전화번호 (031)263-1242
팩스번호 (031)263-1252
홈페이지 http://cafe.daum.net/Sonkol
전자메일 songol-hl@casuwon.or.kr
성 도리 헨리코 신부(1839-1866년)
 
성 피에르 앙리 도리(Pierre Henri Dorie) 신부의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고, 한국 성은 김(金)이다. 그는 1839년 9월 23일 프랑스 뤼송(Lucon) 교구 내에 있는 생 틸레르 드 탈몽(Saint Hilaire de Talmont)의 한 농가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염전과 농사일을 하는 가난한 부부였다. 이들 부부는 가난했으나 신심이 깊었고 또 평화스럽게 가정을 꾸며갔으므로 도리는 건전하고도 행복한 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곳의 보좌신부가 그에게 관심을 두어 부모의 승낙을 얻어 도리를 신학교에 입학시키려고 추천하였다. 그래서 그는 소신학교에서 8년간 수학한 후 1860년 뤼송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862년 8월 23일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의 건강 상태를 알고 있던 부모나 본당신부는 이를 극구 말렸다. 그러나 그는 “어머님! 외국 선교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 진실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8년 동안이나 이 소명에 대하여 제 맘속에서 생각해 왔었습니다. 하느님이 저의 마음속에 말씀하셨으니, 저는 그분께 순명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여 승낙을 받고, 1864년 5월 21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6월 15일 조선의 선교 신부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그는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위앵(Huin, 閔) 신부와 함께 1864년 7월 15일 파리(Paris)를 출발하여 마르세유(Marseille)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홍콩, 요동, 백령도를 거쳐 충청도 내포 지방에 도착하였다. 이때가 1865년 5월 27일이었다.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경기도 용인 손골(孫谷里)에서 한국말을 배우면서 그곳 교우들과 함께 지냈다. 마침 1866년 2월 병인년 대박해의 소식과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들은 지 며칠 후 그 자신도 체포되고 말았다. 포졸들은 ‘하우고개’에 있던 볼리외 신부를 체포하고, 같은 날 산등성이 하나 너머에 있던 도리 신부를 체포해서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렇게 해서 의금부 옥에서 도리 신부는 베르뇌 주교와 다른 동료 신부들을 만났다.
 
3월 5일 문초에서 관리들이 본국에 송환하겠다고 하자 그는 “이 나라에 머무는 동안 말을 배웠으니, 죽었으면 죽었지 돌아가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결국 베르뇌 주교와 같은 날 사형선고를 받고, 역시 같은 날 베르뇌 주교와 여러 동료 신부들과 함께 사형 집행일인 3월 7일 의금부 옥에서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갔다. 목격했던 한 교우의 증언에 의하면 “도리 신부는 눈을 내리뜨고 참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순교자로서의 당당함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도리 신부는 이날 순교자들 중에서 맨 마지막으로 처형되었는데, 두 번째 내리치는 칼날 아래 순교의 영광을 천상 제단에 바쳤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의 시신 역시 다른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1837-1866년)
 
성 피에르 오메트르(Pierre Aumaitre) 신부의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고 한국 성은 오(吳)이다. 그는 1837년 4월 8일 프랑스 앙굴렘(Angouleme) 교구 뤼페크(Ruffec) 본당의 에제크(Aizecq)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조그만 농지를 경작하며 신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려갔는데, 모두 5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오메트르가 성실은 하였지만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는 못하여 그가 신학교에 입학할 때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가 사제가 되고자 했을 때 본당신부는 그의 성품에는 감동했지만 성적을 보고는 반대했었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 그는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공부의 부족함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우등생이 되기까지 하였다. 그는 1857년 10월에 앙굴렘 대신학교에 진학했고, 1859년 8월 18일에 소품자(小品者)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 후 1862년 6월 14일에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자신의 전교지가 조선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박해로 인해 조선 입국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는 중국 어선으로 연평 바다를 거쳐 비교적 무사히 조선 땅을 밟게 되었는데, 이때가 1863년 6월 말이었다. 조선에 입국한 오메트르 신부는 우선 1개월 동안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함께 서울에서 지낸 후, 용인의 손골(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로 내려가 조선말을 익혔다. 그 후 1864년 9월에는 경기도의 한 구역을 맡아 사목하였다.
 
입국한 지 2년 남짓 지났을 때 박해의 소문이 나돌았고,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인 1866년 당시에 그는 수원의 샘골(泉谷里)에 있었다. 여기서 오메트르 신부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만나기 위해 일단 교우들을 진정시키고 격려하면서, 미사 예절용 물건들을 모두 감추고 다블뤼 주교가 있는 신리 마을로 갔다. 이것은 오메트르 신부가 교우들에게 더 큰 피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자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다블뤼 주교의 집에 있던 포졸들은 다블뤼 주교뿐만 아니라 다른 신부들도 체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포졸들은 주교를 위시하여 위앵(Huin, 閔)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를 홍주 옥으로 일단 끌고 갔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하여 투옥시켰다. 문초를 받는 동안 주리 틀림 등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백하였기에, 결국 오메트르 신부를 포함한 세 선교사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2백 50리나 떨어진 충청도 보령 수영(水營)의 갈매못 사형장으로 끌려가 1866년 3월 30일 참수 치명하였다. 바로 그 날이 성 금요일 주님의 수난일로 그들이 처형된 시간이 예수께서 운명하신 시간이었다고 전해온다. 그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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