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사적지 목록

교구 성지명     지역명     내용 검색

수원교구 > 수원 성지(수원 화성, 북수동 성당)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병인박해 때 수원 화성에서 피운 순교의 꽃
지번주소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 316 
도로주소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42
전화번호 (031)246-8844
팩스번호 (031)246-0926
홈페이지 http://suwons.net
전자메일 suwon-hl@casuwon.or.kr
관련기관 북수동 성당    
문화정보 사적 제3호(수원화성)
수원 지방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병인박해 때 수원화성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옥사, 장하치명, 백지사형, 참수형, 교수형 등 순교형태도 다양하다. 뮈텔 주교의 "치명일기"에 의하면 33명 이상이 순교하였고,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나오는 수원 지방의 순교자들은 64명이다. 현재 83위의 순교자들이 기록을 통해 확인되었고, 그 중에서 17위가 한국 교회의 2차 시복시성 대상자인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되었다. 그 외에도 제4대 주임으로 수원 최초의 근대 건물인 고딕 양식의 옛 수원 성당을 짓고 6.25 때 대전에서 순교하여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 대상자로 선정된 하느님의 종 심응영 데시데라도 폴리 신부를 현양하고 있다.


수원에서 순교한 83위 순교자 명단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중 17위와 근현대 순교자 1위

1) 황 요한 [27세, 양반, 1866년 12월 16일 순교]

황 요한은 유명한 집안의 후손으로 수원 초평(현재 경기 오산시 초평동)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의 부모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여러 차례의 박해를 피해 다니며 살았기 때문에 가산이 줄어 생활이 어려웠다. 1867년 4월에 순교한 황 빈첸시오의 동생이다. 1866년에는 양지 응다라니(현재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대대리)에 살았는데, 박해가 크게 일어나자 이웃 비신자 집에 부탁하여 처자와 약간의 전곡을 맡기고 혼자 피신했다. 그러나 그 비신자가 그의 전(詢)과 처자를 빼앗을 속셈으로 포졸에게 밀고했고, 이것을 모르고 처자를 데리러 온 황 요한은 체포되었다. 황 요한은 체포될 때 매를 많이 맞아 팔 하나가 부러지고 거의 죽을 지경이었고, 수원 토포청에 끌려가 1866년(병인년) 12월 16일(음력 11월 10일)에 27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2) 심원경 스테파노 [약 50세, 양반, 1866년 11월(음) 순교, 장사]

심원경 스테파노는 인천 함박이(경기 부천시 소사구 옥길동) 출신 양반으로,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생활을 했고, 가족 중에 신자가 많았다.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양지 고을 사기막(현재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대대리) 교우촌에서 살다가 1866년 10월(음력) 박해를 피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천 포졸들이 심원경 스테파노와 그의 아들 심봉학에게 와서 천주교 신자임을 확인하고 체포했다. 인천 관장은 그들의 신앙고백을 들었으나 직접 처벌하지 않고 수원 관아로 보냈다. 수원에서 심문 당하는 가운데 여러 차례의 형벌을 받았고, 1866년(병인년) 11월(음력)에 약 50세인 심원경 스테파노와 20여 세인 심봉학 부자는 수원 남쪽문(팔달문) 밖 장터에서 매를 맞아 장살형으로 순교했다.


3) 윤평심 [尹平心, 교리봉사자, 1866년 12월(음) 순교]

윤평심은 최소한 1838년 이전에 입교하여 충청도 직산(稷山) 농촌 근처에 거주하면서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었으며, 자기 집에 프랑스 선교사인 성 오메트르 신부나 다블뤼 주교를 모시고 신자들을 인도하여 각종 성사(聖事)를 받도록 해주었다. 윤평심은 여러 사람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었는데, 직산에 거주하던 최경헌(崔敬憲), 최경희(崔敬喜), 최경원(崔敬元) 등과 여(女) 대아지(大阿只), 봉현규(奉賢圭), 한치원(韓致元, 알로이시오) 등이 윤평심에게 교리를 배운 사람들이다. 윤평심은 이들에게 성호경, 천주경, 삼종경, 십이단 등을 가르쳐 교리 지식을 깊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를 믿으면 죽어서 즐겁게 좋은 곳으로 간다고 내세관을 심어줌으로써 신앙생활에 확신을 갖도록 도와주었다. 이러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윤평심은 이웃에 살면서 그를 도와 교회 일을 열심히 하던 교우 홍창룡(洪昌龍)과 함께 1866년(병인년) 12월 18일 이전에 수원 진영(水原鎭營)으로 끌려가서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순교의 화관을 차지했다.


4) 홍창룡 [洪昌龍, 1866년 12월(음) 순교]

홍창룡은 윤평심(尹平心)과 함께 충청도 직산에 살면서, 이웃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는 등 교회 활동에 힘썼다. 홍창룡의 이웃에 살던 봉현규는 윤평심과 홍창룡으로부터 약 3년 동안 교리를 배워 함께 교회활동을 한 덕분에, 평택으로 이주한 후 관가에 체포되어 1866년 12월 18일 포도청의 심문에서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 또한 홍창룡은 이 안나를 비롯한 이웃 교우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성 오메트르 신부로부터 혼인성사 등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교리교사로서, 때로는 교우들을 위한 성사집행 장소의 주인으로서 열심히 교회활동을 하던 홍창룡은 윤평심과 마찬가지로 관가에 체포되어 1866년(병인년) 12월 18일 이전에 수원 진영에서 윤평심과 함께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했다.


5) 김사범 [양반 ‧ 회장, 1866년 순교, 장사]

경기도 수원 고을 방아새골의 회장이었던 김사범은 충청도 청주의 양반 출신으로 6형제 중 맏이였다.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독실하게 믿고 실천하기에 힘썼으며, 성품이 굳세고 의연하며 교리에 통달하였다. 김사범은 산중에 거하면서 농업과 상업에 힘써 제법 살만 했지만, 비리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여러 형제가 한 마을에 각거하는 중에 부친이 병이 들어 여러 해 동안 지속되자, 김사범은 약을 달여 부친께 공급하기를 끊이지 않았고, 또 밤에 병자의 곁에서 수발을 정성껏 하여 이를 궐한 적이 매우 드물었다. 이에 동네 외교인들도 김사범을 효자(孝子)라고 칭찬하였다. 부친이 죽고 난 후에는 모친을 모시고 형제들과 화목하게 살기에 힘썼으며, 동생이 진 빚을 갚아주면서도 원망 한마디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산중에 사는 수십 년 동안 교회 안팎으로 비방이 한 마디도 없었다.

병인박해 초기에 김사범이 부자로 소문 나 있었는데, 여러 동생을 위하여 관속에게 돈을 주어 체포를 면하게 해주었고, 여름에는 선교사를 자기 집에 모시고 교회 일을 돌보았다. 그러나 병인년 가을 청주의 포졸들에게 체포되자 마음이 약해져서 배교하고 석방되었는데, 곧이어 회개하고 세속에 구애되지 않고 순교하기로 결심하였다. 마침내 다시 관가에 체포되어 수원 고을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을 때, 성 다블뤼 주교를 아느냐는 물음에 수삼 년을 모시고 있었다고 정직하게 답변하였다. 이에 그곳 포교들이 그의 인격에 감동되어 죽이는 것이 아깝다고 하였다. 또 자신의 막내 제수가 잡혀 그가 있던 수원 옥으로 들어왔을 때, 순교를 권하였지만 듣지 않자 오 요한이란 유다스를 설득하여 그 제수를 친가로 돌려보내 주도록 주선하였다. 한편 김사범은 함께 수원유수부 옥에 갇힌 다른 많은 교우들을 권면하여 순교하도록 신앙을 북돋아주다가, 1866년(병인년) 태장 수백 대를 맞고 예수, 마리아를 크게 부르며 순교했다.


6) 고시수 야고보 [49세, 1866년 순교, 교수]

충청도 내포 사람으로서 젊은 나이에 천주교를 전해 듣고 입교하였다. 그는 수계 생활의 편의를 위해 산골로 이사하여 여러 교우들과 함께 신앙생활에 전념하면서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려갔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죽산도호부의 포교가 와서 그와 그의 며느리 문 막달레나를 체포하여 죽산 옥에 가두었다. 당시 고시수 야고보는 처음부터 천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爲主致命)로 작심하였기에, 체포된 후 형리들의 심문과 배교 강요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이에 형리들도 고시수 야고보의 순교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알고 별다른 형벌을 가하지 않았다. 그 후 재판관이 교체되자 고시수 야고보는 수원유수부로 이송되었고, 이송된 후 얼마 있다가 교수형으로 죽음을 당하였는데 나이는 49세였다. 많은 신자들이 박해 때 여러 가지 형벌과 고문을 당하자 신앙심이 약해져 배교하는 등 한계를 보인 것에 비하여, 고시수 야고보는 한결같은 신앙심으로 천주를 증언하였고, 마침내 순교하였으니 당시로서도 보기 드문 용덕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7) 권중심 [41세, 중인, 1866년 순교]

권중심은 충청도 신창 창말의 중인 출신이었다. 권중심은 성품이 걸걸하였으며 복음을 접하고도 천주교에 쉽게 들어오지 않다가, 랑드르(洪) 신부의 권면에 힘입어 입교하였다. 입교 후 매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1866년 다른 사람을 체포하러 서울에서 파견된 포졸에게 자신도 천주교 신자라고 자수하여 수갑을 차고 끌려갔다. 이때 아내와 아이들이 울면서 권중심의 마음을 약하게 하자, 그들에게 자신의 순교 결심을 약하게 하는 울음을 그치기를 요구하면서 아내에게,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부디 어린 것들을 데리고 살다가 만일 잡히거든 부디 배교를 하지 말고 위주치명(爲主致命)하여 아무쪼록 영원(한 곳)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이에 그를 붙잡은 포졸이 그의 말을 듣고 “제법이다.”라고 칭찬했다. 권중심은 곧 수원으로 끌려가서 배교 없이 순교했는데, 나이는 42세였고 순교한 때는 1866년(병인년)이었다.


8) 박의서 사바 [59세, 1867년 3월 순교, 교수(추정)]

박의서 사바는 밀양 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糾正公派) 중 의암공파(義庵公派)에 속하며 병인박해 당시 수원유수부 가사면 걸매리 교우촌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걸매리 교우촌은 행정구역상 수원유수부에 속해 있었지만, 유수부 관아로부터는 약 120리 이상 떨어진 충청도 내포지방에 속한 아산만의 한 섬마을이었다.

박의서 사바 회장은 평소 신자들을 격려하여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도록 안배하였으며 그 자신의 신앙생활도 철저히 했다. 그러나 관가에 체포될 당시 일시적인 유혹이 있었는데 함께 체포된 동생 박원서 마르코의 권면을 듣고 곧바로 회개했으며, 3형제가 함께 순교를 다짐하며 서로 격려하였다. 그 결과 박의서와 그의 동생들은 모두 수원유수부에 가서 영장(중군)의 질문에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1867년 3월 박의서 사바 회장은 박원서 마르코, 박익서 등 두 동생과 함께 순교하였다. 이들의 순교 기념비가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성당에 세워져 있다. 그 후손 중에서 대전교구 박상래(朴祥來) 신부를 비롯하여, 박노헌(朴魯憲), 박성팔(朴性八), 박중신(朴仲信) 신부 등 네 명의 사제가 배출되었고, 집안에서는 모두 열 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9) 박원서 마르코 [50세, 1867년 3월 순교, 교수(추정)]

박원서 마르코는 걸매리 교우촌 출신이다. 그는 밀양 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糾正公派) 중 의암공파(義庵公派)에 속하며, 걸매리 교우촌 박의서 사바 회장의 동생이자 박익서의 형으로서 평소 성품은 약간 거칠었고 노름에 빠져 신앙생활을 착실히 하지 못해 항상 형의 걱정꺼리가 되었다. 그러나 병인박해 때 삼형제가 함께 체포되어 수원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평소와는 달리 천주교 신앙과 순교에 대한 열의가 생겨나서, “내가 평생에 천주를 제대로 공경하지 못하였는데, 오늘 주님이 나를 부르셨다.”고 하면서 즐거운 얼굴로 포졸에게 “나를 이번에 올라가거든 시간을 끌지 말고 바로 죽여주면 우리 천주와 성모께로 가서 영원히 살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말을 듣고 함께 동행하던 그의 형 박의서 사바 회장이 배교하고 살려던 마음을 버리고 함께 순교하자고 격려했으며, 수원 중영의 영장이 천주교 신앙 여부를 묻자 그들 삼형제가 모두 신자임을 용감하게 고백함으로써 1867년 3월 함께 순교하였다. 이들의 순교 기념비가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성당에 세워져 있다. 그 후손 중에서 대전교구 박상래(朴祥來) 신부를 비롯하여, 박노헌(朴魯憲), 박성팔(朴性八), 박중신(朴仲信) 신부 등 네 명의 사제가 배출되었다. 이 집안에서는 모두 열 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10) 박익서 [44세, 1867년 3월 순교, 교수(추정)]

박익서는 밀양 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糾正公派) 중 의암공파(義庵公派)에 속하며 수원유수부 관하 걸매리 교우촌 박의서 사바 회장과 박원서 마르코의 동생이었다. 평소 착실한 수계생활로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고, 수원으로 끌려갈 때 그의 두 형들과 함께 순교를 다짐하고 서로 격려하여 배교 없이 3형제가 함께 1867년 3월 수원에서 순교하였다. 이들의 순교 기념비가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성당에 세워져 있다. 그 후손 중에서는 대전교구 박상래(朴祥來) 신부를 비롯하여, 박노헌(朴魯憲), 박성팔(朴性八), 박중신(朴仲信) 신부 등 네 명의 사제가 배출되었다. 이 집안에서는 모두 열 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1867년 걸매리 교우촌에서는 박원서 마르코의 아내 이 마리아와 박의서의 사촌 박인서 등이 박의서 삼형제와 함께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어 박의서 삼형제와 함께 3월 수원에서 순교했다. 1868년에는 걸매리에서 박의서 사바의 형수 이씨와 사촌 형수 조 모니카 등이 수원포교에게 잡혀 수원 옥에 수감되었다가 옥사했으며, 같은 걸매리 출신의 장원심과 장팔보 부자가 수원 포교에게 잡혀가 수원에서 순교했다.


11) 김양범 빈첸시오 [63세, 중인 ‧ 복사, 1867년 가을 순교, 장사]

김양범 빈체시오는 홍주 거더리(현재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살던 사람이다. 그는 1815년 을해박해 때 순교한 복자 김강이 시몬의 둘째 아들이다. 농사를 부지런히 잘 지어서 재산이 많았으나 이후 거더리로 이사해 공소에서 지내며 미사 중 사제를 도와 복사 생활을 했다. 1866년 병인박해를 당해 피해 달아나다가 1867년 체포되어 그 해 가을 수원에서 장사형으로 순교했다.


12) 서여심 [회장, 1868년 5월 28일 이전 순교, 옥사]

서여심은 경기도 양지 고을 은이 교우촌의 회장이었다. 그는 은이 교우촌을 열심한 신자들, 특히 병인박해 때 집단 순교자를 배출하는 열렬한 신자촌으로 만들었다. 그는 신자들을 가르치며 그들의 성사생활을 돌보다가 양지 은이에서 다른 교우 여섯 명과 함께 잡혔다. 관찬 기록에 나오는 서여심(徐汝心)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으며, 그럴 경우 서여심은 다블뤼 신부, 리델 신부 등을 자기 집에 모시고 선교사가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 수 있게 했던 인물로서, 은이 신자들의 판공성사를 예비하고 평상시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던 공소회장이었다. 수원 감옥에서 1868년 5월 28일 이전에 옥사했으며, 그 무렵 그와 같은 은이 출신의 서군실, 서대원, 서여행, 조달성 등도 수원에서 순교하였다.


13) 윤자호 바오로 [尹滋鎬, 59세, 양반, 1868년 9월 4일 순교, 교수]

윤자호 바오로는 1809년 파평윤씨 명가의 후손으로 충청도 노성(魯城) 땅에서 나고 자랐다. 후에 강경 놀미, 충주 등으로 이사했으며, 충주의 한 교우로부터 천주교를 전해 듣고 입교하여 그의 부친도 입교시켰다. 신앙생활의 편의를 위해 고향을 떠나 공주 유기의 회장이 되어 교우들을 지도하였다. 교우인 밀양 박씨(密陽朴氏)와 결혼하였고, 광천(廣川) 독바위에서 객주집 머슴살이를 할 때는 주인집 여성의 유혹을 물리쳐 부부간의 신의(信義)를 지켰다. 다블뤼 주교를 도와 전교회장직에 열성을 다했으며, 명강의로 서울과 지방의 교우들 간에 명성이 높았다. 강론을 듣는 교우들에게 가난한 중에도 대추를 사서 대접했고, 교회를 위한 애긍전을 모으는 데도 열심하였다.

자신을 약탈하려는 도적들을 포졸들로부터 구출해 줌으로써 도적들을 감동시켰고, 그의 인간미에 매료된 포장과 포졸들의 인정도 받았다. 수원 옥에서는 함께 갇힌 교우들을 권면하고 자신과 의로서 남매가 된 김 마리아가 구해준 밥을 자신은 먹지 않고 늘 동료 죄수에게 주었으며, 삿자리를 구하여 동료 죄수의 깔 자리로 마련해주는 등 자선과 선행을 베풀다가 무진년(1868년) 9월 4일 59세의 나이로, 함께 수감되었던 이치명 바오로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1968년 성직자를 포함한 그의 후손들이 그의 공적을 기려 “순교자 윤자호 바오로의 행적비”를 세웠다. 유명한 순교소설 《은화》를 쓴 윤의병(尹義炳, 1889~1950) 바오로 신부는 윤자호 바오로 회장의 후손이다.


14) 박태진 마티아 [49세, 1868년 순교, 교수]

충청도 원머리 사람으로 1868년 사촌간인 박선진 마르코와 같이 수원 포교에게 잡혀 수원으로 끌려갔다. 수원 옥에 수감 중인 15일 동안 한번 배교하려 했으나 박선진 마르코의 권유로 회개하고 이후에는 굳게 신앙을 증거하다가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박태진 마티아는 비록 한순간 배교의 유혹에 떨어졌으나 17세 연하인 사촌동생의 충고를 듣고는 다시 마음을 돌려 그 후로는 결코 변치 않았다. 사촌동생 박선진 마르코와 함께 당시 토포청에서 미루나무에 목을 매다는 교수형을 당했다고 하는데, 숨진 후에도 그들의 시신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깨끗했다고 전해진다.


15) 박선진 마르코 [32세, 1868년 순교, 교수]

1836년 충청도 홍주 원머리 태생으로, 부친의 엄한 꾸중과 천주교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모친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무진년(1868년)에 수원 포교에게 잡혀갈 때, “우리 죽음이 육정(肉情 : 인정)에 박절(迫切)함이 없으리까? 그러나 천주님의 명령대로 천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 영혼을 구원하기 편한 일이오니 부디 과히 염려 마옵시고 훗일을 조심하십시오.”라고 하여 부모를 위로하고 순교의 원의를 발하였다. 박선진 마르코는 수원 관가로 함께 잡혀간 사촌형 박태진 마티아가 나약한 모습을 보이자, “형님이 이제는 배교하여도 죽을 것이니 굳이 위대하신 하느님을 배반하고 죽어 영원한 벌을 받으려 합니까?” 하고 설득하여 옥에 갇힌 지 15일 만에 함께 순교하는 은혜를 입었다. 그들이 교수형으로 죽은 후 시체를 찾아 장사(葬事)지냈는데, 시체가 정결한 것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과 같았다고 한다.


16) 지 타태오 [50세, 1869년 7월 2일 순교]

지 타대오(다두)는 수원 양간 용수말(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용소리)에서 출생하고 성장했다. 지 타대오는 그곳에서 20km 정도 떨어진 교우촌 안중(인광리)의 김 발바라와 혼인하고 그곳에서 처가 쪽의 재산을 잘 관리하여 만석꾼 대부호로 성장했다. 1866년 재산을 노린 본읍 포교 안호범 등 박해자들에게 체포되었으나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곧 통회하고 다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중 1869년 4월 15일(음) 포교 노판용에게 체포되어 진위현 감옥에 갇혔다가 수원으로 이수되어, 7월 2일 수원성 북문 밖에서 공개 처형을 당해 50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진위 감옥에 갇혔을 때 막내아들 지춘범이 그를 찾아가 배교를 간청하였으나 거절하고 오히려 그에게도 순교를 권면했다고 한다.


17) 원 프란치스코 [평민, 1871년 5월 14일 순교, 교수]

원(元) 프란치스코(방지거)는 수원의 대표적 순교자이다. 충청도 내포 출신의 순교복자 원시장 베드로의 손자이며, 원(元) 바오로의 셋째 아들이다. 원 프란치스코는 눈먼 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하고, 교회의 축일과 주일 등을 교우들에게 밝히 알려주는 등 모범적 생활로 교우들의 스승이 되었다. 원 프란치스코는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로부터 교리를 배웠고, 천주십계(天主十戒)와 칠죄종(七罪宗), 성교사규(聖敎四規), 조만과(朝晩課), 사본요리(四本要理) 등의 내용을 자손들에게 가르치며, 마귀 ‧ 세속 ‧ 육신 등 삼구(三仇)와의 영신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독려하였다.

병인년(1866년)에 체포되었으나 배교 않고 가산만 적몰된 채 석방되었다. 신미년(1871년)에는 한사코 피신을 아니 하고 체포되어,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지는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증거하였다. 수원 옥에 함께 갇힌 밀고자를 오히려 극진히 사랑하고 자식들에게 그를 원수로 삼지 말라고 충고하였으며, 오히려 순교의 은인이라고 감사하였다. 자식들이 옥에 넣어준 음식을 매번 감옥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옥중에서 두 교우가 통회하고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병인박해 때 포졸 앞에서, “천주는 나의 대부모(大父母)시오. 만 백성의 대부모이실 뿐만 아니라 만왕(萬王)의 왕(王)이시요 만군(萬君)의 주(主)이시라. 천주는 만만코 배반치 못 하나니라.”라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1871년 5월 14일 수원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18) 심응영 데지레 폴리 [Desire Polly, 66세, 신부, 1950년 9월 23-26일 순교, 피살, 대전]

폴리 신부는 프랑스 남부지방 비비에 교구에서 출생하여 1907년 파리 외방선교회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인 1931년 수원 성당(현 북수동 성당) 제4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수원의 거룩한 순교를 기념하고 미신을 타파하기 위한 2가지 목표를 세우고, 공세리 성당 주임신부였던 파리 외방선교회 드비즈 신부를 모셔다가 설계를 하여 1932년 수원 최초의 고딕식성당인 수원 성당을 건립하였다. 악마를 물리치고 미신을 타파하는 성 미카엘 대천사를 주보성인으로 세웠다.

처음 부임 당시 본당 신자수가 60여명에 불과하였는데, 성당 건립 후 18년 동안 사목하면서 본당 신자수가 3,000명으로 불어났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소화학당을 건립하여 일본순사들의 눈을 피해 한글과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며 독립운동과 신문화 개혁운동을 펼쳤다. 1948년 천안 성당으로 부임하였고, 6.25동란 때 양떼를 두고 목자가 피난갈 수 없다 하며 성당에서 피난가지 못한 몇몇 교우들과 함께 매일미사를 봉헌하고 성체를 굳게 지키다가 인민군에게 피랍되어 대전에서 총살형으로 순교하였다. [출처 : 이상 수원 성지(북수동 성당)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