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윤유일(尹有一)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 야고보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 아가타와 윤운혜 루치아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양근으로 이주한 뒤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윤 바오로는, 서적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스승의 동생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이후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다.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1789년에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이가 바로 윤 바오로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성격이 온순한 데다가 심지가 굳고 학식이 높았으며 교리에도 밝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윤 바오로는 북경을 오가는 상인으로 가장하고, 주교에게 보내는 신자들의 서한을 옷 안에 숨긴 뒤, 1789년 10월 조선을 떠나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초에는 북당에 있는 라자로회 선교사들과 남당에 있는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또 윤 바오로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라자로회의 로오(N. J. Raux, 羅) 신부에게 조건부 세례를 받고, 구베아 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다. 아울러 구베아 주교에게서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들었다.
윤 바오로가 1790년 봄에 귀국하자,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를 영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일 때문에 윤 바오로는 그해에 다시 한 번 북경을 다녀와야만 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다음 해, 조선 신자들과 한 약속에 따라 후안 도스 레메디오스(Juan dos Remedios)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 신부는 조선 밀사들과 만나지 못함으로써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다. 이렇게 1791년에 있었던 첫 번째의 영입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며, 바로 그해 말에 일어난 박해로 이러한 노력은 한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윤 바오로는 실망하지 않고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를 영입하고자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794년 말에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 윤 바오로는 북경 교회와 연락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지홍’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지황(池璜) 사바는 1767년에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교리를 배웠다. 본래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하였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위험이나 궁핍, 고통을 당할 때에도 결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직자 영입 운동이 재개된 1793년에, 이미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박 요한이 밀사로 선발되어, 함께 조선의 국경으로 가게 되었다. 지 사바와 박 요한은 조선의 사신 행렬에 끼어 북경으로 향하였고 윤 바오로는 그곳에 남았다.
북경에 도착한 지 사바는 얼마 안 있어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 지 사바의 신심에 감명을 받은 구베아 주교는 뒷날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는 1793년에 지황의 신앙심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40일간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북경의 교우들은 그의 신심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1794년 초,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지 사바는 주 신부와 만나 약속 장소를 정한 뒤, 각각 다른 길을 통해 국경으로 가서 상봉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심한 데다가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 하였으므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져야만 하였다.
지 사바는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국경으로 가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났으며,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 그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윤 바오로와 함께 주 신부를 안내하여 12일 만에 한양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1765년에 태어난 최인길(崔仁吉) 마티아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벽 세례자 요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최인철 이냐시오는 그의 동생이다. 최 마티아는 이승훈 베드로가 신앙을 전파하고자 선발한 최초의 회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최 마티아는 입교 초기부터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섰으며, 윤 바오로가 1790년에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였다.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서 1795년 초에 주 야고보 신부를 맞이한 최 마티아는, 주 신부의 안전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밀고자에 의해 그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다행히 교우들의 재빠른 처신으로 주 야고보 신부는 최 마티아의 집에서 빠져나와 여회장인 강완숙 골룸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에 앞서 최 마티아는, 주 야고보 신부에게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고자 자신이 신부로 위장하고 집에서 포졸들을 기다렸다. 그가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어를 알았으므로 이런 계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위장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체포된 지 얼마 안 있어 최 마티아의 신분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에 놀란 포졸들은 다시 주 신부의 행방을 쫓으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처럼 최 마티아는 주 신부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주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지고, 그의 입국을 도운 밀사인 윤 바오로와 지 사바도 체포되고 말았다.
윤 바오로와 최 마티아와 지 사바는 체포된 날부터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이때 그들의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굳은 인내와 결심, 그리고 지혜로운 답변은 박해자들을 당황케 하였다. 그들은 주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수없이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에는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이제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때려죽이기로 결심하였다. 그 결과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최 마티아는 그날로 사정없이 매를 맞고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이었다. 당시 윤 바오로의 나이는 35세, 지 사바의 나이는 28세, 최 마티아의 나이는 30세였다. 박해자들은 비밀리에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이후 구베아 주교는 조선의 밀사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윤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 당시에 보여 준 용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와 최인길 마티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1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윤점혜(尹占惠) 아가타는 1778년경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李氏)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 바오로는 그의 사촌 오빠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 루치아는 그의 동생이다.
윤 아가타는 일찍부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려고 동정 생활을 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풍속에서는 처녀가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몰래 집을 떠날 결심을 하고는, 어머니가 마련해 둔 혼수 옷감으로 남자 옷을 지어 숨겨 둔 뒤에 기회를 엿보기로 하였다. 그런 다음 어느 날 남장을 하고 사촌 오빠 윤 바오로의 집으로 가서 숨었다. 얼마 후 윤 아가타는 다시 어머니에게 돌아가 가족과 이웃 사람들에게 질책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참아 내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1795년에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윤 아가타는,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과부처럼 행세하며 동정을 지켜 나갔으며, 2년 뒤에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던 가운데 어머니가 사망하자, 윤 아가타는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의 집으로 가서 함께 생활하였다. 또 주 야고보 신부의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고, 그 회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쳤다. 이후, 그녀는 교리의 가르침을 엄격히 지키면서 극기와 성경 읽기, 그리고 묵상에 열중하여 다른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위해 연도를 자주 바쳤으며, 아가타 성녀처럼 순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윤 아가타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이후 포도청과 형조에서 갖가지 형벌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밀고와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그녀의 고향인 양근으로 압송하여 처형하게 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윤 아가타는 양근으로 이송되어 그곳 감옥에 갇혔다. 당시 그 감옥에는 여자 교우 한 명이 함께 갇혀 있었는데, 뒷날 그녀는 윤점혜 아가타에 대해 증언하기를 “아가타는 말하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이 사형을 앞둔 사람 같지 않고, 태연자약하여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다.”고 전하였다.
윤 아가타는 1801년 7월 4일(음력 5월 24일)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순교 당시 그녀의 목에서 흐른 피가 우윳빛이 나는 흰색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형조에서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10년 동안이나 깊이 빠져 마음으로 굳게 믿고 깊이 맹세하였으니,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라도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윤점혜 아가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윤운혜(尹雲惠) 루치아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감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李氏)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정광수 바르나바는 그의 남편이고, 윤점혜 아가타는 그의 언니이다.
윤 루치아는 나이가 차자, 여주에 사는 정 바르나바와 혼인하였는데, 비신자인 시부모의 반대로 혼인 문서는 주고받을 수 없었다. 또 시부모가 조상 제사에 참여하도록 강요할 때마다 그녀는, ‘교회에서 금하는 일이기 때문에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윤 루치아는 남편과 함께 부모의 곁을 떠나 한양의 벽동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가 1799년이었다.
한양으로 이주한 뒤부터 윤 루치아 부부는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교회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기 집 마당 한편에 따로 집회소를 짓고,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그 집회소를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때 그곳에 자주 모이던 교우들은 홍필주 필립보, 김계완 시몬, 홍익만 안토니오, 강완숙 골롬바, 정복혜 칸디다 등이었다.
윤 루치아 부부는 전교에도 힘써, 어느 누구보다 많은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성모님의 상본을 그리거나 나무로 묵주를 제작하였고, 교회 서적들을 베껴서 교우들에게 팔거나 나누어 주었다.
그러던 가운데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언니 윤점혜 아가타가 체포되자, 윤 루치아는 자기 부부도 머지않아 체포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녀는 남편 정 바르나바를 피신시킨 다음, 교회 서적과 성물들을 다른 교우의 집으로 옮겨다 숨겨 놓았다. 그리고 혼자 남아 집을 지키다가 그해 2월에 체포되었다.
이후 윤 루치아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밝혀진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으며, 배교도 거부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이에 따라 윤 루치아는 형장으로 끌려 나가 5월 14일(음력 4월 2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형조에서 윤운혜 루치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너는 남편을 도와 함께 행동하였으며, 시댁의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천주교 신자들과 이웃을 삼아 서로 교류하였고, 여성 교우들과 밤낮으로 얽혀 지냈으며, 교회 서적과 성화 · 성물들을 비밀리에 제작하여 이곳저곳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 여러 사람을 유혹해 들여 온, 세상을 어지럽힌 죄는 만 번 죽어도 아쉽지 않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윤운혜 루치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양반 집안 출신이다. 교회 창설 주역들의 스승이요 학문으로 이름이 높던 권철신 암브로시오는 그의 큰아버지였으며,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그의 아버지였다. 뒷날 권 세바스티아노는 조선의 풍습에 따라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1769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권 세바스티아노는 일찍부터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아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또 장성한 뒤에는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한편, 이웃에 사는 윤유일 바오로 형제를 비롯하여 몇몇 교우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로 생부인 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죽임을 당하자, 권 세바스티아노는 마음이 약해져 한때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로는 다시 신앙을 회복하였고, 성사를 받으려고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그는 동료들과 함께 주 야고보 신부를 방문하고 모임을 가졌으며, 얼마 뒤에는 고향인 양근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1795년의 을묘박해로 주 야고보 신부가 피신 생활을 하게 되자, 3일 동안 주 신부를 자신의 집에 유숙시키면서 교리를 배웠다.
1800년 6월 경기도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권 세바스티아노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양근과 경기 감영을 오가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1801년의 신유박해가 한창일 무렵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권 세바스티아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잠시 마음이 약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전에 한 말을 취소하였으며, 사정없이 가해지는 형벌을 받으며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그의 최후 진술을 들은 뒤, 다음과 같은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하였다.
“생부 권일신이 사망한 뒤에도 천주교에 깊이 빠졌으며, 아울러 요사한 말과 글을 오로지 대중을 미혹시키는 데에 이용하였다.”
동시에 형조에서는 ‘권상문을 고향으로 이송하여 처형하라.’고 명령하였다. 권상문 세바스티아노의 고향인 양근 주민들이 경각심을 주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양근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조숙 베드로(1786-1819년)
‘명수’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던 조숙(趙淑) 베드로는 1786년 경기도 양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숙’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이후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양친과 함께 강원도의 외가로 피신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성장해 감에 따라, 조 베드로는 출중한 재능을 보였고, 성품 또한 착하고 친절하였으며, 나이에 비해 아주 점잖았다. 그러나 주변의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을 점차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가 다시 신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7세 때 권천례 데레사를 아내로 맞이하면서이다.
혼인날 밤, 아내 권 데레사는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써서 조 베드로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뜻을 들어주었고, 잠깐 사이에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사람이 되었다.
이후 조 베드로 부부는, 남매처럼 지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면서 생활하였다. 그들의 신심은 날로 깊어져 기도와 복음 전파, 고신 극기 행위가 일상이 되었으며, 가난하게 살면서도 남을 위한 애긍에 열중하게 되었다. 이렇게 15년을 생활하는 동안, 조 베드로는 처음의 약속을 어기는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아내의 권유로 다시 마음을 돌리곤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조 베드로 부부는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도와 일하게 되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성직자를 영입하려고 북경을 오갈 때마다 필요한 뒷바라지는 모두 그들 부부의 몫이었다. 정 바오로 성인은 교회 일을 위해 떠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양에 있는 조 베드로 부부의 집에 머무르면서 모든 준비를 하였다. 당시 고 바르바라(또는 막달레나)라는 과부가 그 집에 살면서 그들 부부를 도와주었다.
그러던 가운데 정 바오로 성인이 다시 한 번 북경에 갔을 때, 포졸들이 수색 과정에서 우연히 조 베드로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다. 이내 포졸들은 그의 집으로 몰려들어 그를 체포하였다. 이때 아내 권 데레사는 자원하여 남편을 따라나섰고, 고 바르바라도 그들 부부와 함께 투옥되었다. 그때가 1817년 3월 말경이었다.
문초가 시작되자, 관장은 조 베드로 부부를 유혹하면서 ‘배교하고 동료들을 밀고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혹독한 형벌을 꿋꿋하게 참아 내었다. 관장은 몇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가하였지만, 그들 부부의 신앙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다.
이후, 고통스러운 옥살이 중에도 조 베드로 부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특히, 아내 권 데레사는 남편 조 베드로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 주면서 순교를 권면하였다.
조숙 베드로 부부와 고 바르바라는 이렇게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의 신앙은 여전히 굳건하였고,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자격을 얻게 되었으니, 그들 셋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것은 1819년 8월 10일(음력 6월 20일) 이후로, 당시 조 베드로의 나이는 33세였다. 교우들은 한 달이 지나서야 그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조숙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권천례 데레사(1783-1819년)
권천례(權千禮) 데레사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이요,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의 동생이다. 1783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권 데레사는 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791년의 신해박해로 아버지까지 잃었다.
권 데레사는 어렸을 때부터 덕행과 신심이 남달랐다. 또 성장한 뒤로는 온화함과 애덕으로 형제간에 평온을 유지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 17세 때 일어난 신유박해로 온 집안이 풍파를 입게 되었다.
아무도 의지할 데가 없게 된 권 데레사는 조카 하나를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가 생활하면서 동정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친척들이 그녀를 찾아와 ‘조선에서 동정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며 설득하였다. 결국 그녀는 계속되는 친척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동정을 포기하기로 작정하였으며, 20세에 이르러 조숙 베드로와 혼인을 하였다. 당시 조 베드로는 냉담자였다.
혼인날 밤에, 권 데레사는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써서 남편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조 베드로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뜻을 들어주었고, 잠깐 사이에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사람이 되었다. 이후, 권 데레사 부부는 남매처럼 지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면서 15년을 생활하였으며,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성직자를 영입하려고 북경을 오갈 때마다 모든 뒷바라지를 하기도 하였다. 그들이 1817년 3월 말경에 포졸들에게 잡혀 문초를 받는 동안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혹독한 형벌을 꿋꿋하게 참아 내었다. 권 데레사는 관장이 배교를 권유하자 이렇게 답하였다.
“천주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고,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십니다. 어떻게 그분을 배반하겠습니까? 이 세상 사람 모두, 부모를 배반하는 경우에는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어찌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시는 그분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관장은 다시 몇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가하였지만, 권 데레사 부부의 신앙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다. 권 데레사는 고통스러운 옥살이 중에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또 남편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 주면서 “하느님께서 내려 주실 순교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자.” 하며 권면하였다.
권 데레사 부부는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신앙은 여전히 굳건하였으며,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들이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것은 1819년 8월 10일(음력 6월 20일) 이후로, 당시 권 데레사의 나이는 36세였다.
교우들은 한 달이 지나서야 그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교우들은 권 데레사의 머리채를 바구니에 담아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성인의 집에 두었는데,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여러 교우들이 증언하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권천례 데레사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베드로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 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것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비웃기만 하였다. 그는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성을 구할 수조차 없었다.
그 뒤 조 베드로는 부친과 함께 여주에 사는 임희영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조 베드로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의 스승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모든 사람이 조 베드로를 조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열심을 칭찬해 주면서 차츰 신앙의 길로 인도해 나갔다.
조 베드로가 아직 예비 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려고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갖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비록 예비 신자임에도 조 베드로의 용기는 체포되자 바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자, 박해자들은 화가 나서 더욱 세게 매질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박해자들은 그의 아버지를 끌어내다가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아버지를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조 베드로는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었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 마르티노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후, 조 베드로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전처럼 그의 마음을 꺾을 수 있으리라 믿고는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그의 신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그는 경기도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곳곳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무렵 조용삼은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였으며, 이후로는 착한 행동과 아름다운 말로 여러 신자들을 감동시켰다.
조 베드로는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약해진 그의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음력 2월 14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마지막 형벌 때에 그는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조용삼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는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을 전후하여 한양의 송현으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의 순교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서사촌(庶四寸) 동생이요, 홍필주 필립보와 이현 안토니오의 장인이다.
홍 안토니오는 1785년에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는 김범우 토마스를 찾아가 교회 서적을 빌려 읽었으며, 이승훈 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는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연구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다만,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폐지할 생각을 가졌으나, 주변 환경 탓에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1796년 홍 안토니오는 사위인 홍 필립보의 집에서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운 뒤, 자주 신부를 방문하여 성사를 받았다. 또 가까운 신자들과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 활동을 도왔으며, 때때로 주 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였다. 당시 그의 집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하부 조직이요 집회소였던 ‘6회’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홍 안토니오는 안산과 여주로 피신해 다녔다. 그러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문초 과정에서 홍 안토니오는 교우들을 밀고하고 천주교를 배교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체포된 교우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이때 그가 재판관들 앞에서 대답한 내용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 있었다.
“저는 제가 지은 죄가 용서받기 어려운 것임을 스스로 알면서도, 몇 달 동안 도망을 다니다가 비로소 체포되었습니다. ……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으니,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죽음밖에는 따로 진술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증언한 홍익만 안토니오는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 새남터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이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홍익만 안토니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