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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 진안리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선종한 곳
지번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진안리 92-6 
전화번호 (010)9944-0145
홈페이지 http://cafe.daum.net/Mawon.Jinan
관련기관 마원진안 성지 담당    
관련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청운로 95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1861년)


탄생과 성장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는 1821년 3월,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에 있는 새터 교우촌에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던 부친을 따라다니다가 경기도 부평을 거쳐 안양에 있는 수리산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 수리산 마을은 그 뒤 신자들이 하 둘 모여들면서 비밀 신앙 공동체로 변모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 대목구의 전교를 위임받은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는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파견하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경 감시가 심한 데다가 박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서양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난관을 극복하고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는 프랑스 출신의 성 모방 베드로 신부였다.

1835년 말, 조선 천주교회에서 파견한 밀사들의 안내로 입국한 모방 신부는 곧바로 전국의 신앙 공동체들을 순회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초에는 부평에 있는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최양업 토마스를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5세였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 토마스는 1836년 2월 6일 서울의 모방 신부 댁에 도착하여 라틴어 수업을 받았다. 이어서 모방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한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3월 14일에, 김대건 안드레아가 7월 11일에 각각 도착하여 함께 생활하였다.

마카오 유학과 부제 서품

최 토마스는 1836년 12월 2일,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성경에 손을 얹고 순명을 서약하고, 다음 날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다음 해 6월 7일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으며, 이때부터 그곳에 임시로 설립된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마카오에서의 유학 생활은 1842년까지 계속되었는데, 1837년 11월에는 동료인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고, 1839년에는 마카오의 소요 때문에 필리핀의 마닐라로 장소를 옮겨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같은 해 말에 마카오로 돌아왔다.

그러나 신학생 최 토마스는 아직 공부가 끝나기도 전인 1842년 4월에 마카오를 떠나게 되었다. 한국과 통상 조약을 원하는 프랑스 함대에서 통역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때 극동 대표부의 장상인 리브와(Libois) 나폴레옹 신부는 박해로 끊어진 조선 천주교회와 연락을 기대하고 최 토마스와 김 안드레아를 각각 다른 프랑스 함대에 승선토록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남경에 도착한 다음에 더 이상의 북진을 원하지 않게 되자, 최 토마스와 김 안드레아는 프랑스 함대에서 내려 요동으로 가게 되었다. 조선으로 들어가고자 입국로를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최양업 토마스는 만주의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인 페레올(Ferreol) 요한 주교에게 계속 수업을 받았고, 1843년에는 리브와 신부를 통해 프랑스 파리의 무염 성모 성심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조국에서 일어난 박해와 순교자들의 소식을 들었다. 이때 그는 프랑스로 귀국해 있던 스승 르그레즈와(Legregeois) 베드로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였다.

“저는 우리 부모님과 형제들을 따라서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의 그처럼 장열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신부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노고와 저의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워,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신학 수업을 계속하던 최양업 토마스는 1844년 12월 10일경에, 동료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사제품을 받고서 페레올 주교, 성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 있으면서 매스트르(Maistre) 요셉 신부와 함께 귀국로를 찾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사제 수품과 귀국

귀국로를 탐색하는 동안 최 토마스 부제는 조선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1846년의 박해와 동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조국의 애통한 소식을 알렸다.

“마침내 지루했던 기나긴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고, 저의 동포들한테 영접을 받으리라 희망하면서 크게 기쁜 마음으로 용약하여 변문(한중 국경의 성문)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변문에 도착하여 보니, 이 희망이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소식에 경악하였고, 저와 조국 전체의 가련한 처지가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하였습니다. …… 특히 저의 가장 친애하는 동료 안드레아 신부의 죽음은 신부님께도 비통한 소식일 것입니다.”

조선 천주교회 밀사들의 만류로 귀국을 포기한 최 토마스 부제는 극동 대표부가 이전해 있던 홍콩에 도착한 뒤에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귀국로 탐색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847년 8월에는 프랑스 군함을 타고 조선의 해안에 도달하였지만 밀사들을 만나지 못하여 귀국에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상해로 거처를 옮긴 최양업 토마스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마침내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이때 그에게 사제품을 준 사람은 예수회원으로 강남 대목구장으로 있던 마레스카(Maresca) 주교였다.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그해 5월에 상해를 출발하여 중국 요동 지방으로 가서 성 베르뇌(Berneux) 시메온 신부 아래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1월에 매스트르 신부를 다시 만나 귀국을 시도한 끝에, 12월 3일 조선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이때 매스트르 신부는 발각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였다.

사목 활동과 선종

귀국하자마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뒤,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 시작하였는데,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 도와 5천여 리를 걸어다니며 3,815명의 신자를 방문하였다. 이후, 진천 배티를 사목 중심지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사목 활동은 11년 6개월여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휴식 기간을 이용하여 한문 교리서와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도왔으며,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Penang)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였다.

물론 전국에 산재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도중에 최 토마스 신부는 서양인으로 오인을 받아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포졸들의 습격으로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1859년에는 순방 도중에 발각되어 포졸과 외교인들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고, 주막에서 쫓겨나 반쯤 나체가 된 몸으로 눈 쌓인 밤을 헤맨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신앙과 조국애, 그리고 신자들에 대한 애정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경상남도의 한 모퉁이에 갇혀서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나 다른 선교사들과 연락이 끊긴 채 지내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다시 서한을 보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조선 천주교회를 도와주십사고 부탁하였다.

“우리를 환난에서 구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시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높은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저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다행히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갇혀 있던 곳을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다 마친 다음,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다. 그러나 과로에다 장티푸스까지 덮쳐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선종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 교장인 알브랑(Albrand)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신심과 열심, 그리고 평소에 보여 준 사제로서의 분별력을 칭송하고, 동시에 그를 잃은 아쉬움을 표시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신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과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에서는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유일한 한국인 신부 최 토마스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은 성사 집행 뒤에, 내게 자신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에 오던 중, 지난 6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착한 신부가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한 소식을 맨 처음 받은 푸르티에(Pourthie) 신부는 그에게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있을 만큼 일찍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 가는 그의 입술에서 아직 새어 나오는 말이 단지 두 마디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 …… 최 토마스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저를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이 서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배론 신학교에서 170-180리 지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 당시 신학교에 있던 푸르티에 신부가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곧장 최 토마스 신부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아주 열성적으로 부르는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뿐이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선종 뒤, 5개월이 지난 다음, 베르뇌 주교의 주례로 최 신부의 장례가 성대하게 치러졌고, 그의 시신은 배론 신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땀의 순교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1821-1861년)


두 번째 한국인 신부. 세례명 토마스. 양업(良業)은 아명(兒名)이고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본관은 경주. 충청도 다락골[일명 대래골, 현 靑陽郡 化成面 禮岩里]에서 출생.

1. 생애 : 최양업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 최경환(崔京煥)과 이성례(李聖禮)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과 신앙생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가족은 이미 증조부 때 이존창(李存昌)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했었다. 본시 서울에서 살았는데 조부 때 박해를 피해 낙향, 당시 홍주(洪州) 땅인 다락골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출생하였다. 최경환은 이성례와 결혼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일가와 친척관계를 맺게 되었다(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 6촌간).

다락골에서 점차 생활이 넉넉해지고 또 외교인 친척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신앙생활이 해이해지자 최경환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형제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같이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3년만에 천주교 집안인 것이 탄로되어 서울을 떠나야 했는데 이 때 최경환은 과천(果川)의 수리산 뒤듬리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그는 산지를 개간하며 연명해 나아갔는데, 틀림없이 이 곳 수리산에서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발탁되었을 것이다.

1836년초 입국에 성공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즉시 방인(邦人)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생 선발에 착수했는데, 맨 먼저 최양업이 발탁되었고, 이어 최방제(崔方濟)와 김대건이 발탁되었다. 최양업 등 세 소년은 서울의 모방 신부 곁에서 라틴어를 배우며 출발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모방 신부는 그들을 국외로 내보내어 성직자로 양성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세 소년은 마침내 그해 12월 3일 마카오로 가기 위해 의주(義州)를 향해 서울을 떠났다. 이들은 출발에 앞서 그 전날 모방 신부 앞에서 소명(召命)에 충실하고 장상들에게 순종할 것을 선서하였다.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유지 교우들이 그들을 동행했는데 이들은 세 소년을 변문(邊門)까지 인도하고 거기서 새 선교사를 맞아들이게 되어 있었다. 일행이 12월 28일 변문에 도착한 후, 세 소년은 중국인 안내원을 따라 중국 대륙을 횡단, 이듬해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경리부 책임자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는 경리부 안에 임시로 조선신학교를 세워 조선인 신학생 3명을 교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르그레즈와 신부 책임 하에 경리부 차장 리브와(Libois) 신부가 주로 그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후에 조선 선교사로 부임한 메스트르(Maistre)와 베르뇌(Berneux) 신부처럼 선교사들이 마카오에 체류하는 기회에 그들의 교육을 돕기도 하였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아편전쟁을 전후해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民亂)으로 인하여 두 번이나 마닐라로 피난해야 했고, 또 최방제와 1년여만에 사별(死別)하는 등 그들의 유학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나 그래도 1842년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1842년 그들은 아직 수학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실(Cecille) 함장이 마카오의 경리부를 찾아와 조선원정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1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줄 것을 요청했고, 경리부장 리브와 신부는(그간 르그레즈와 신부는 파리본부로 전임되었다) 벌써 몇 년째 조선교회와 소식이 끊겨져 있었으므로 세실의 요청을 하느님의 섭리처럼 생각하고 쾌락했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의 종말이 가까워지자 프랑스 정부는 중국에서 어떤 이득을 얻어 보려는 심산에서 군함 2척, 즉 에리곤호와 파보리트호를 파견했었는데 세실은 에리곤호의 함장이었다. 리브와 신부는 건강이 약한 김대건을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먼저 에리곤호에 태워 보냈다(2월 15일). 한편 최양업은 파보리트호로 떠나게 되어 있었는데 입항(入港)이 늦어져 7월 17일에야 요동(遼東)교구 선교사 브뤼니에르(Bruniere) 신부와 같이 마카오를 출항하였다.

8월 23일 오송(吳淞)에 이르러 최양업은 먼저 떠난 김대건과 만났다. 그런데 세실은 남경조약이 체결되자(8월 29일) 더 이상 북상(北上)하기를 포기했으므로 두 신학생은 프랑스 군함에서 하선하고 다른 방법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행히 강남(江南)교구장의 주선으로 중국배 한 척을 얻어 우선 요동을 떠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배로 10월 2일 상해(上海)를 떠나 10월 23일 요동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은 그 곳에 남아 입국을 시도하였고, 최양업은 몽고땅 팔가자(八家子)로 가서 페레올(Ferreol, 高) 신부와 합류하였다.

최양업은 소팔자가(小八家子) 교우촌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하였다. 한편 김대건은 입국에 실패했으나 그간의 조선교회 소식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1839년 기해박해로 3명의 선교사를 위시하여 그의 부친 최양업의 부모 등이 순교한 소식에 접하게 되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최양업은 오히려 그들의 순교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는 동안 페레올 신부가 제3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843년 12월 31일 개주(蓋州)에서 주교성성식을 갖게 되었다. 성성식에 참석한 후 최양업은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소팔가자로 돌아왔고, 얼마 뒤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도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간 김대건은 다시 한 번 훈춘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었다.

1844년 최양업과 김대건은 소정의 신학과정을 끝내고 연말에(늦어도 12월 15일 이전)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까지 받았으나 교회법이 요구하는(만 24세) 연령 미달로 사제품까지 받지는 못하였다. 최양업 부제는 계속 소팔가자에 남아 있었다. 한편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 주교와 같이 입국을 시도한 끝에 성공하지만 주교를 대동하지는 못하였다.

최양업은 1845년 한 해를 기다림 가운데 허송한 뒤 1846년초에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두만강 쪽을 통해 처음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최양업은 요동교구의 베르뇌 신부의 사목활동을 도우며 1846년을 보냈다. 1846년 말 변문을 통해 두 번째 입국을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이 때 그는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소식을 들었다. 이제 최양업은 육로(陸路)로의 입국을 단념하고 해로(海路)로의 입국을 시도하고자 홍콩의 경리부로 갔다(그간 경리부는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이전되어 있었다).

1847년 초에 홍콩에 도착한 최양업은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페레올 주교가 보내온 한국순교자전기를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겼다. 드디어 입국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라피에르(Lapierre) 함장이 조선정부로부터 회답을 받기 위해 조선해안으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1년 전 세실은 조선 서해안에 나타나 1839년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책임을 묻는 서한을 조선정부에 보내면서 1년 후 그 회답을 받으러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왔었다.

라피에르 함장은 메스트르 신부, 최양업 등과 같이 군함 2척을 이끌고 1847년 7월 28일 마카오를 떠났다. 그러나 두 군함은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러 완전히 난파하였다. 상해로부터 구조선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최양업은 육지로 잠입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부득이 구조선을 타고 상해로 돌아와야 하였다. 난파된 군함의 잔해(殘骸)를 거두러 갈 것이 거의 확실시 되었으므로 그 기회를 기다렸으나 그것도 프랑스의 국내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 1848년도 지나가 버렸다.

1849년 최양업은 백령도를 통해 입국을 네 번째로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상해로 돌아온 그는 4월 15일 강남교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로부터 숙원인 사제품을 받고 동료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신부가 되었다. 최 신부는 다시 육로 입국을 시도하고자 5월 요동으로 떠났다. 연말을 기다리며 7개월 동안 베르뇌 부주교를 도우며 사목경험을 쌓았다. 12월 변문으로 떠났고, 이번에는 입국에 성공했다. 그러나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입국하지는 못했다. 실로 입국길에 오른 지 7년 6개월, 입국의 시도를 거듭하기 다섯 번만의 성공이었다.

2. 사목활동 : 귀국하자 최양업 신부는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5개 도를 두루 다니며, 그것도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없는 산간벽지만을 찾아다니며 교우들을 심방하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1년간 7천여리를 찾아다니며 4,000여명의 고해를 들었다. 그는 건강한 편이었으나 워낙 그가 맡고 있던 지역이 넓고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어서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철종년간(1850∼1863)은 천주교가 묵인되던 때여서 정식 박해는 없었으나 소위 사군난(私窘難)은 그칠 날이 없었다. 사군난은 그의 전교여행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외교인들의 습격을 받으며 체포될 뻔도 했고, 추방되고, 관가에 고발되는 등 도처에서 중대한 위험을 겪어야 하였다. 그러나 최 신부는 이같이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궁핍 가운데서도 많은 개종과 용감한 입교자들 앞에서 위로와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최 신부는 이같이 바쁜 전교활동 중에서도 신학생을 선발하여 페낭 신학교로 보냈고 또한 선교사들의 입국을 주선했으며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과 자료까지 수집하는 등 지칠 줄 모르는 열성을 보였다.

최 신부 혼자만도 1,000여명의 예비자를 기록함으로써 개종운동이 그 절정에 달했을 때 뜻밖에 1859년말에 박해가 일어났다[庚申迫害]. 이 박해로 인해 최 신부는 경상도의 한 공소에서 여러 달 동안 외부와 완전히 소식이 두절된 채 갇혀 지내야 하였다.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선생신부들에게 고별편지를 쓰고 순교까지 각오하였다.

그러나 박해는 다행히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최 신부는 다른 선교사들과 같이 중단되었던 전교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개종운동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최 신부는 박해 때문에 밀린 공소를 너무 무리하게 추진시켰다. 그는 하루에 80리 내지 100리를 걸었고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다른 공소로 떠났다. 그러면서 그는 한 달 동안 나흘밤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성사집전을 끝낸 그는 주교에게 보고차 상경하던 중 1861년 6월 과로로 경상도 문경(聞慶)[충청도 鎭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에서 쓰러져 장티푸스로 보름만에 사망하였다. 최양업 신부 집안에 전해지는 구전에 의하면, 쇠고기에 체해 사망했다고 하는데 아마 처음의 식중독이 겹친 과로로 합병증을 일으켜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 같다. 최 신부는 이렇게 사목활동 12년 만에 기진맥진한 끝에 순직하였다.

장례식은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배론 신학교에서 장엄하게 거행되었고, 신학교 산기슭에 매장되었다. 최 신부의 사망은 조선교회를 위해 그가 유일한 한국인 신부였고, 열렬한 선교열에 학덕을 겸비한 모범적 사제였다는 점에서 당장은 그 무엇으로써도 보충하기 어려운 가장 큰 손실이었다. 교구장을 위시하여 선교사들이 한결같이 그의 유덕을 추모해 마지않았다.

3. 저술활동 : 최양업 신부는 19통의 라틴어 서한[그 중 1통은 遺失]을 남겼다. 그는 라틴어를 정확하게 말하고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미사여구를 구사할 정도였다. 또한 그는 라틴어 작문 2통을 남겼다. 최 신부의 서한들은 최 신부 자신에 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한국교회사 연구에 필요불가결의 기본자료이고 또한 한국 근세사 연구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최 신부는 그의 부모의 순교사적을 위시하여 한국 순교자에 관한 증언과 자료도 수집했는데 다블뤼(Daveluy, 安敦尹) 보좌주교는 그것을 그의 비망기(備忘記)에 수록했고, 달레(Dallet)는 그것을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수록하였다.

최 신부는 또한 ≪한국순교자전≫을 번역했는데 그 제목은 이러하다. “1839년과 1846년에 조선왕국에서 발발한 박해 중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전기. 현 가롤로와 이 도마 수집. 벨리나 주교의 프랑스 원문으로부터 최 토마스 부제 번역”.

최 신부는 또한 보다 완전하고 보다 정확한 교리문답의 출판을 준비했는데, 이것이 1864년 목판본으로 간행된 ≪성교요리문답≫이었을 것이고, 주요 기도서도 번역했는데, 그것은 틀림없이 같은 해 간행된 ≪천주성교공과≫였을 것이다.

최 신부는 또한 사향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 많은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저술했다고 하는데 그 확실한 저자성(著者性)에 관해서는 좀 더 객관적이고 서지학적(書誌學的)인 연구의 뒷받침이 있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4. 사상과 영성(靈性) : 그의 성성(聖性)은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보좌주교의 찬사에서처럼 굳건한 신심, 드문 덕행, 구령(救靈)을 위한 불같은 열심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의 덕행 중에서 첫째로 그의 겸덕(謙德)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 겸덕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순명을 기다리는 것이었고(이것은 그의 7여년에 걸친 입국시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대인(對人)관계에서는 인간을 인간의 존엄성에서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의미하였다.

영혼을 구하기 위한 최 신부의 지칠 줄 모르는 열성은 그의 12년간의 사목활동에서 여실히 입증되었다. 그의 동료 김대건 신부의 성성이 한마디로 피의 증거(순교)였다면 최신부의 일생은 땀의 증거(순교)였다.

최 신부의 선교정책은 세 가지 점에서 매우 예언자적인 것이었다. 첫째로 그는 교회와 국가의 장래를 위해 양반제도의 폐지를 주장해 마지않았다. 양반제도는 모든 악의 근원으로서 교회 내에서는 분열을 초래하여 교회에 큰 손실을 가져오고, 국가를 위해서는 인재등용에서 인권이 무시되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선교사에 관해 최 신부는 그들이 사전에 조선의 실정과 풍속을 익혀야 할 것을 주장했고, 셋째로 한국적인 선교대책으로서 조속한 종교자유의 획득과 이를 위한 프랑스 정부측으로부터 조선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崔奭祐)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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