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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 왕피리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왕피천이 시작하는 곳에 세워진 교우촌
지번주소 경상북도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 374 부근 
전화번호 (054)683-2105
팩스번호 (054)683-2106
홈페이지 http://cafe.daum.net/yuongyangcatholic
관련기관 영양 성당    (054)682-1758
관련주소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영양창수로 35-1

복자 김강이 시몬(1765?-1815년)

‘여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강이(金鋼伊) 시몬은 충청도 서산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성격이 고상하고 용맹한 데다가 재산도 많았다. 그러나 입교한 뒤에는 재산과 종들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아우인 김창귀 타대오의 가족과 함께 전라도 고산 땅에 가서 살았다.

1795년 초여름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고산을 방문하자, 김 시몬은 여러 차례 신부의 처소로 가서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다. 또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1년 동안을 피신해 다녀야만 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1년 동안 옥살이를 한 끝에 많은 돈을 쓰고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

박해가 끝난 뒤 김 시몬은, 등짐장사를 하면서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데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온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장사를 그만두고 경상도 진보의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리)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일구었다. 이후에도 그는 다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강원도 울진(현, 경북 울진군)에 가서 정착하였다.

경상도에서 1815년에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김 시몬은 옛 하인의 밀고로 아우인 김창귀 타대오와 조카 김사건 안드레아와 함께 체포되어 경상도 안동에 수감되었다. 이때 김 시몬은 용감하게 관장 앞으로 나아가 포졸들이 빼앗은 자신의 재물을 돌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그의 요청을 순순히 들어주었다. 보기 드문 일이었다. 김 시몬은 다시 찾은 재물을 굶주리고 있는 옥중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김 시몬은 안동에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그해 5월에는 아우와 함께 자신이 살던 강원도의 수부(首府)인 원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도 다시 문초와 형벌은 이어졌고, 그러면서 그의 아우는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김 시몬은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다.

김 시몬이 보여준 열렬한 신앙과 인내는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러자 감사는 결코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사형을 선고한 뒤, 임금의 윤허를 받고자 그 내용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때 원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김강이는 비밀리에 신자들에게 천주교 서적과 소식을 전해 왔으며, 여러 해 동안 천주교 교리를 외우고 익혀서 온몸으로 깊이 빠져 있습니다. 이에 합당한 법률을 시행토록 허락해 주십시오.”

임금은 곧바로 사형 집행을 윤허하였다. 그때 김강이 시몬은 이미 형벌의 상처가 아주 심한 데다가 옥중 생활에서 얻은 이질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 결과 김 시몬은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기도 전에 옥사하고 말았으니, 그때가 1815년 12월 5일(음력 11월 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이상이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강이 시몬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김사건 안드레아(1794-1839년)

충청도 서산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사건(金思健) 안드레아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교리를 배웠다. 1815년에 유배형을 받은 김창귀 타대오는 그의 아버지였고, 그해 강원도 원주에서 옥사한 김강이 시몬은 그의 큰아버지였다.

본디 김 안드레아의 집안은 부유하였으나, 부모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부터 재산을 버리고 이곳저곳으로 이주해 다닌 탓에 가난하게 되었다. 그의 가족이 피신해 다닌 곳은 전라도 고산, 경상도 진보, 강원도 울진 등지였다. 그러다가 김 안드레아는 1815년의 을해박해 때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참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여기면서 가끔 당시의 일을 후회하곤 하였다.

아버지가 유배를 간 뒤 김 안드레아는 경상도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기도와 전교, 성경 읽기에 많은 시간을 바치면서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또 신자 가정을 찾아 교회 서적과 성물을 전해 주거나 교리를 가르쳐 주었고, 죽을 고비에 있는 비신자 자녀들에게는 대세를 주었다. 그러면서 김 안드레아는 다시 순교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1827년에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김 안드레아는 체포될 것으로 짐작하고 천주의 섭리를 잘 따르고자 많은 기도를 드렸다. 실제로 얼마 안 있어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러 왔고, 그는 이내 상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교우들을 밀고하라.’는 관장의 명을 거부하고, 오히려 천주교의 주요 교리와 십계명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화가 나서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는 다리뼈가 허옇게 드러났지만, 마음이 약해지기는커녕 기쁜 마음으로 이를 참아 내었다.

며칠 뒤 김 안드레아는, 경상도의 수부인 대구로 압송되어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그는 전주로 이송되어 포졸들이 교우들에게서 빼앗은 성물에 대해 답변을 한 다음, 다시 대구로 끌려오게 되었다.

대구 옥에는 형벌을 이겨 낸 많은 교우들이 김 안드레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들과 함께 12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다시 한 번 배교 여부를 묻는 문초가 있었는데, 이때 임금에게 올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김사건은 천주를 공경하여 받들었고, ‘그 묘미를 깊이 깨달아 비록 죽을지라도 여한이 없다.’고 하였으니,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김사건 안드레아는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포졸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한 뒤 예를 다하여 장사를 지내 주었으며, 신자들은 오랫동안 그를 특별히 공경하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사건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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