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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 건학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학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형상의 교우촌
지번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 845(건학마을 입구) 
전화번호 (054)553-8190
팩스번호 (054)553-8193
홈페이지 http://cafe.daum.net/jcccda
관련기관 점촌동 성당    (054)553-8194
관련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점촌5길 39-9
복자 박경화 바오로(1757-1827년)

‘도항’라는 관명(冠名)으로도 잘 알려진 박경화 바오로(朴甫祿)는, 1757년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33세 무렵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본디 그는 제법 재산이 있는 데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까지 받는 몸이었다고 한다. 1839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사의 안드레아가 그의 아들이다.

박 바오로는 입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박해로 체포되었으나,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의 배교는 오히려 열심을 배가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더 철저하게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고,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산중으로 이주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박 바오로는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교회 서적을 열심히 읽고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노력하였으며,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자녀들이 열심히 덕행을 닦을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 주었다.

60세가 지나서 박 바오로는 가족을 데리고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라는 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교우들을 안심시킨 뒤, 경상도 상주의 멍에목으로 이주하였으며, 4월 그믐에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되었다.

상주로 끌려가는 동안 박 바오로는 기쁨에 넘쳐 “우리가 오늘 가는 길에 대해 천주께 감사를 드리자.”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었고, 다른 교우들보다 더 많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신앙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형벌을 받는 동안에도 그는, “내 육신은 관장에게 맡기지만, 영혼은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소리쳤다. 게다가 옥중에서는 늙은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보다, 먼저 교우들을 격려하거나 보살펴 주었다.

상주 관장은 도저히 박 바오로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대구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이때 그의 자식들도 굳게 신앙을 증언한 뒤에 모두 대구로 끌려갔는데, 장남인 박 안드레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되었다.

대구 감사는 연 3일 동안 박 바오로에게 혹형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이 조금도 바뀌지 않자, 사형을 선고한 뒤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이후 언젠가 그는 관장의 명령에 따라 한 승려와 교리에 대해 토론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의 설명에 막힘이 없는 것을 본 관리들이 ‘천주교는 참된 종교’라고 하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박 바오로는 새로 감사가 부임한 뒤 다시 옥에서 끌려 나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노령에다가 여러 차례의 형벌 때문에 더 이상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에 그는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알고는 아들과 교우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당부하였다.

“이 옥을 복락소(福樂所)로 생각하시오. 밖에 있는 가족들 때문에 분심을 갖지 말고 내 뒤를 따르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오.”

그런 다음 박경화 바오로는 평온한 기색으로 자신의 영혼을 천주께 드렸으니, 그때가 1827년 11월 15일(음력 9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5개월 뒤에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이장하고자 발굴하였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모습이 평소같이 평온해 보였다고 한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박경화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박사의 안드레아(1792-1839년)

‘사심’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는, 1827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의 아들로,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의’는 그의 관명(冠名)이다.

박 안드레아가 태어났을 때 이미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에 입교해 있었으며, 따라서 그는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박 안드레아의 신앙심은 깊어져만 갔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은 주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특히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이웃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 뒤 박 안드레아는, 가족과 함께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라는 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이곳에서도 얼마 안 되어 그의 신심과 효성, 애긍 생활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그의 가족은 고향의 재산을 버리고 온 터라 가난하였지만, 교우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모두가 이를 마다하지 않고 정성껏 대접하였다.

1827년의 정해박해가 발생한 뒤, 박 안드레아는 가족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해 4월 그믐경에 그의 가족은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상주로 끌려간 박 안드레아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인내와 용기를 보여 주었다. 그는 어떠한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한 뒤 대구로 압송되었다.

대구 감영에서도 박 안드레아는 여러 차례의 형벌을 신앙의 힘으로 참아 내었다. 반면에 노령인 아버지는 차츰 쇠약해지게 되었고, 이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몹시 아플 수밖에 없었다. 이에 그는 관장에게 아버지를 보살펴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관장은 이러한 효성에 감동하여 그들 부자를 함께 신문하였고, 옥에서도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가 옥중에서 보여준 효행은 모든 이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후로도 박 안드레아는 수많은 형벌과 옥중에서의 고통을 신앙의 힘으로 참아 냈다.

당시 조정에서는 대구 감사의 사형 선고문을 받고서도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박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다시 한 번 배교 여부를 묻는 문초가 있었는데, 이때 임금에게 올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박사의는 천주교 교리를 배워 익혔으며, 마음을 다하여 이를 깊이 믿어 왔으므로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박사의 안드레아는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포졸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한 뒤에 예를 다하여 장사를 지내 주었으며, 신자들은 오랫동안 그를 특별히 공경하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박사의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이 시몬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올 때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중인(中人) 집안의 구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오랫동안 회장직을 맡아 훌륭하게 교회에 봉사하였고 그도 부친의 뒤를 이어 회장이 되었다. 그는 충청도에서 살다가 칠곡 한티로 피난 가서 살았으며,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대구 부근의 달비골(달서구 상인동)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건학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며 아내와 세 자녀와 더불어 조용히 살았다. 이 시몬은 여우목 교우촌의 회장인 성 이윤일 요한의 아들로 3대째 구교우 집안이며 고향은 충청도 내포 지방의 홍주이다. 중인(中人) 집안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이며, 벌써 3명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은 순교자 가문의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은 병인박해 시작된 1866년 1월 27일(음력 1865년 12월 11일) 여러 교우촌을 두루 다니며 신자들의 재산을 약탈하던 예천의 황가라는 사람에 의해 포졸에게 체포되어 관아로 끌려갔다가 공주 감사에게 압송되어 배교할 것을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옥중에서 교살당하여 순교하였다. [출처 : 안동교구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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