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사적지 목록

교구 성지명     지역명     내용 검색

전주교구 > 여산 순교성지(숲정이)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숲은 비록 들판으로 바뀌어도
지번주소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295 
전화번호 (063)838-8761
팩스번호 (063)838-8764
홈페이지
관련기관 여산 성당    
관련주소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영전길 14
문화정보 전라북도 기념물 제125호
김성첨 토마스(?-1868년)

김성첨의 본관은 선산 김씨이며 함양 출신으로 언젠가는 알 수 없어도 넓은 바위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던 중 1866년 1월 고산 관아의 포졸들이 이곳을 수색하여 신도들을 체포해 갈 때 그의 사촌인 김 프란치스코를 대신해서 끌려갔다가 석방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1868년 9월 10일이었다. 여산 포교 일행 28명이 넓은 바위를 덮쳐 그를 체포하려 하자 그는 여산 포교들은 해당 고을의 사법권이 없다 하며 완강하게 저항하므로 포교들은 할 수 없이 물러갔다. 그런지 4일 후 여산 포교들은 고산 포교들을 앞세우고 다시 찾아와 그를 체포하여 고산 관아로 끌고 갔다.
 
고산 현감은 김성첨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고산 주민들에게도 김성첨은 알려진 인물이었다. 고산 현감은 김성첨에게 나라에서 금한 천주학을 믿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 죄상을 꾸짖으며 개과하여 배교한다면 여산 부사에게 상신하여 석방해 주겠노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김성첨은 만 번 죽을지라도 배교는 천만부당한 일이라면서 여산 부사에게 이첩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여산은 고산과 진산을 관장하였고 영장(營將)이 있어 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

김성첨은 다른 10명의 신도들과 여산으로 압송되어 와서 영장으로부터 심문을 받게 되었다. 영장은 사학(邪學)의 괴수로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가르쳤으며, 마을에서 발견된 천주학의 서적과 상본들은 모두 네가 준 것이 사실이며 그 출처를 밝히라고 닦달했다. 그는, 본래 대대로 내려오는 천주교 가정이어서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부모가 돌아가신지 오래되어 그 출처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신도 일당을 불라 하면서 혹독하게 형벌하는 바람에 자기와 함께 끌려온 신도가 전부라고 둘러댔다. 그러나 영장은 더욱 분노하며 혹독하게 형벌을 내렸지만, 얼굴빛 하나 변하기는커녕 태연자약하자, 초죽음이 되도록 매질을 해서 옥에 가두었다.

옥에 갇힌 신도 죄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무엇보다 굶주림이었다. 그들의 집에 남은 가족들은 너무 가난해서 옥바라지를 해 줄 처지가 못 되었다. 그런데 김성첨과 함께 갇힌 신도들 중 다섯 명은 그의 종질과 재종손이었다. 김성첨과 함께 일가족 6명이 옥고를 치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혹형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며 신음하는 신도들에게 위로하기를, “우리가 (치명할) 이때를 기다렸는데 천당진복을 누리려 하는 사람이 이만한 고통도 참아 받지 못하겠느냐. 부디 감심으로 참아 받으라” 하며 격려했다.

김성첨은 신도들과 함께 아침저녁 기도 등을 공동으로 합송하며 기도의 힘으로 고통을 견디었다. 신도들에게 옥은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신앙의 수련장이었다. 이러한 신도들의 기도생활을 보고 옥을 지키던 군인들은 능욕하기를, “저놈들은 죽어 가는 주제에 무엇이 즐거워 배가 고픈 줄 모르고 천주학만 한다” 하며 비아냥거렸다.

김성첨과 함께 끌려간 신도들은 그해 10월 21일(양력 12월 4일)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으나, 김성첨은 그의 종손 마티아와 함께 11월 10일(양력 12월 23일) 교수형을 받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2세(어떤 기록은 57세)였다. [출처 : 여산 성당 홈페이지]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