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에우페미아는 288년경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Bithynia) 지방의 칼케돈(오늘날 튀르키예의 이스탄불[Istanbul]에 속한 카드쾨이[Kadikoy]의 고대 도시명)에서 로마(Roma) 출신 원로원 의원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이교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며 하느님을 섬기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봉헌한 동정녀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 재위)의 박해 초기에 칼케돈의 총독 프리스쿠스(Priscus)는 모든 주민에게 그리스 전쟁의 신인 아레스(Ares) 앞에 희생 제사를 바치라는 법령을 반포했다. 복자 야고보 데 보라지네(Jacobus de Voragine, 7월 13일)가 편집한 “황금 전설”(Legenda Aurea)에 따르면, 총독의 명령을 거부하고 체포된 많은 그리스도인이 다양한 고문을 받고 무참히 살해되는 광경을 목격한 성녀 에우페미아가 곧장 총독 앞으로 가서 자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고 체포되었다. 총독은 귀족 출신인 그녀가 직접 보는 앞에서 다른 그리스도인을 고문해 두려움에 신앙을 포기하도록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성녀 에우페미아는 그런 총독의 처사가 불의하다며 왜 다른 이들이 먼저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광에 이르도록 하냐며 따져 물었다. 결국 총독은 그녀를 감옥에 가두고 다양한 고문으로 누구보다 더 혹독하게 괴롭혔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성녀 에우페미아는 총독의 포고령을 무시하고 집에 숨어서 하느님을 흠숭하던 49명의 그리스도인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며칠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성녀 에우페미아는 어리고 귀족이라는 이유로 따로 겁을 주어 회유하기도 했으나 그 또한 소용이 없었다. 폰투스(Pontus) 지방 아마시아(Amasya)의 주교인 성 아스테리오(Asterius, 10월 30일)가 남긴 기록과 옛 “로마 순교록” 9월 16일 목록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성녀 에우페미아는 실로 다양한 고문을 당한 후 순교하였다. 감옥에 갇혀 매를 맞고, 겁탈의 위협을 당하고, 바퀴에 불타는 석탄이 가득한 형틀에 묶여 살이 찢기고 불태워지거나, 커다란 맷돌 사이에 집어넣어 짓이기거나, 굶주린 야수 사이에 던져 넣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으나 천사의 도움으로 모든 시련을 이겨냈다. 옛 “로마 순교록”은 그녀가 주님께 자신을 바치는 기도를 드렸을 때 비로소 짐승 중 하나가 그녀의 몸을 물고 나머지는 그녀의 발을 핥았다며 그녀의 순교 장면을 전해주었다. 다른 기록에서는 모든 고문이 무위로 돌아가자 결국 칼로 찔러 그녀의 숨을 끊었다고 한다. 성녀 에우페미아의 순교 이후 그녀는 동방과 서방 교회 모두에서 높은 공경을 받았다. 박해가 끝난 후 칼케돈에는 그녀를 기리는 웅장한 성당이 세워졌고, 그녀의 유해를 황금 석관에 넣어 그곳에 안치하였다. 이 성당은 384년에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면서 쓴 “에게리아/에테리아 순례기”(The Pilgrimage of Egeria/Etheria)에도 등장한다. 451년에 이곳에서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說, Monophysitis)을 주장한 에우티케스(Eutyches) 이단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칼케돈 공의회가 열렸다. 이 공의회에서 단성론 이단을 단죄하고 오늘날과 같은 ‘신인양성’(神人兩性)의 그리스도론을 확정한 ‘칼케돈 신조’가 발표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때 단성론과 양성론을 주장하는 이들 간의 합의가 어려워지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두 가지 안을 작성해서 성녀 에우페미아의 무덤에 넣자고 제안했고, 황제는 이를 봉인하고 군인들을 시켜 지키도록 했다. 3일 동안 양측의 기도 후에 무덤을 열었을 때 성녀 에우페미아의 오른손에 정통 신조가 적힌 두루마리가 있었고, 발밑에 단성론자들의 두루마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기적은 공의회에서 교황 성 대 레오 1세(Leo I, 11월 10일)에게 보낸 편지에도 기록되어 전해졌다. 칼케돈 공의회 이후 성녀 에우페미아에 대한 공경은 더욱 활발해졌고, 많은 순례자가 찾는 순례지가 되었다. 617년 페르시아에 의해 칼케돈이 정복된 후 그녀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에 그녀를 기념해 새로 건립한 성당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성상 파괴 논쟁이 일어난 8세기에는 바다에 던져지는 위기를 겪었는데, 정통 신앙을 가진 선주에 의해 건져져 지역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8세기 말에 성상 파괴 논쟁이 해결된 후 비밀리에 지하 묘지에 숨겨두었던 성녀 에우페미아의 유해가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성녀 에우페미아는 특별히 동방 정교회에서 큰 공경을 받는데, 그녀가 동정 순교자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정교회의 신앙을 올바르게 확립하고 강화한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방 정교회에서는 9월 16일에 그녀의 순교를 기념할 뿐 아니라 7월 11일에도 칼케돈 공의회의 기적을 기념하며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16일 목록에서 오늘날 튀르키예에 속한 칼케돈에서 동정 성녀 에우페미아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프리스쿠스 총독 치하의 박해 때 그리스도를 위해 수많은 고문을 이겨내고 영광의 월계관을 얻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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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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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에우페미아(9. ...] | 성인 이름에 담긴 뜻: 에우페미아(Euphemia) | 주호식 | 2025/05/06 | 21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