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이영덕 막달레나(Magdalena)는 외교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고, 1840년 1월에 순교한 이인덕 마리아의 언니이며, 그녀의 어머니는 조 바르바라(Barbara)이다. 원래 명문가의 자녀로 태어났다고 하나 그 가족의 내력은 알 수 없으며, 더욱이 체포 당시에는 곤궁한 지경에 있었다 한다. 어려서부터 막달레나는 어른처럼 점잖고 성품이 매우 온화하였으며, 외할머니가 열심한 교우였으므로 천주교의 진리를 쉽게 배워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천주교를 몹시 꺼리던 아버지 때문에 모든 것을 비밀리에 진행해야 하였다. 그러던 중에 교리를 가르쳐 주던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가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 틈을 타서 막달레나는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몰래 성세성사를 받았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더욱 더 천주교를 미워하고 반대했기 때문에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막달레나가 나이 스무 살이 되자 부친은 혼기를 놓칠세라 어떤 비신자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동정을 지키려고 하였기 때문에 꾀병을 부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런 핑계에 넘어가지 않고 엄하게 다루면 복종하리라 생각하여 딸을 매우 학대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의 완고함을 꺾어보려고 혈서를 써서 부친에게 드렸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막달레나와 아버지의 갈등은 거의 10여년이나 계속되었는데, 그녀는 혼인을 모면할 아무런 방법도 발견하지 못하게 되자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에게 집을 떠날 허락을 청하였다. 앵베르 범 주교는 “그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요. 집에 남아 있는 것이 더 좋겠소. 하지만 아버지가 원하는 혼인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집에 머물러 있었지만, 몇 달 후에는 혼인을 해야 할 급박한 상황에 직면하였기 때문에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집을 몰래 빠져나와 친한 신자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앵베르 주교는 아직 조선 풍속을 잘 몰랐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양반집 부인이나 처녀들이 집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주교는 그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고 회장들에게 부탁하여 이 일을 잘 해결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 막달레나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은 조그마한 집에 살면서 굶주림과 추위로 많은 고생을 하였지만, 이제는 마음 놓고 천주교를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곤궁과 고통을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막달레나는 주님께 감사하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동정을 지키며 살았는데, 기해년 7월경에 그들은 살던 집에서 체포되었다. 포도청에 붙잡혀 온 이 막달레나는 주리를 틀리고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시달렸으며 옥중의 모든 고초를 당해야만 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자기와 같은 옥에서 고초를 당하던 어머니가 결국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드디어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바라던 순교의 복된 영광의 날이 다가오자, 이 막달레나는 안온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해 순교하였다. 때는 1839년 12월 29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28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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