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정순매 바르바라(鄭順每, Barbara)는 열여덟 살 되던 해인 1795년에 오빠 부부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오빠는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Jacobus) 신부를 도와 교회 일에 참여한 정광수 바르나바(鄭光受, Barnabas)였고, 올케는 유명한 교우 집안 출신인 윤운혜 루치아(尹雲惠, Lucia)로, 모두 1801년에 순교하였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자마자, 정 바르바라는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또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려고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뒤, 주변 사람들에게는 ‘허가와 혼인하였다가 과부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과부로 행세하였다. 정 바르바라는 이후, 서울로 올라가 생활하면서 오빠 부부를 도와 교회 서적과 성물을 신자들에게 보급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윤점혜 아가타(尹占惠, Agatha)가 회장으로 있던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공소 예절을 치를 때면 언제나 정성을 다해 모든 것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1800년에 세례를 받았고, 이후로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착한 일을 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정순매 바르바라는, 문초와 형벌을 겪으면서도 아주 뛰어난 용덕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한 사람의 교우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여러 차례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러므로 관장은 그녀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지만, 자신이 원하던 것을 전혀 얻어낼 수가 없었다. 마침내 정 바르바라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고향으로 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명령에 따라 여주로 이송되었다. 그런 다음 1801년 7월 3일(음력 5월 23일), 또는 7월 4일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당시 그녀는 24세의 나이로 동정녀였다. 정순매 바르바라가 사형 판결을 받기 전에 말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포도청에서 모진 형벌을 받고 형조에서 엄한 문초를 당하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저는 천주교 신앙을 너무나 좋아하여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정순매 바르바라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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