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성사를 받으면 은혜(효과)를 입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도 사도행전에 잘 요약되어 나옵니다.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2.38) 이 구절은 성령을 받은 베드로 사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는 곧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구세주" 라고 설교하자. 이를 듣고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라고 묻는 청중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이는 세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죄스러운 생활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는 것"(로마 6,1-14 참조) 이라고 합니다. 이런 삶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이고 , 우리 또한 그러한 삶을 살 때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됩니다. 또한 베드로는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라고 권유합니다.
즉 세례를 통해서 죄의 사함이 이루어집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세례를 통해서 원죄와 본죄 모두를 사함 받는다고 합니다. 원죄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명령을 어겨서 지은 죄로서(창세기 3장)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죄입니다. 본죄란 인간 각자가 지은 죄입니다. 그런데 원죄이든 본죄이든 죄의 본질은 하느님을 멀리하고 자신에게 집착하는 이기주의입니다.
세례를 통해 모든 죄의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신만을 바라보며 이기적인 삶을 살아온 것을 불문에 부치시고,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와 이웃을 사랑하며 새롭게 살 수 있는 은총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세례 예식 중에 물로 씻는 것도 이렇게 과거의 죄를 용서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세례를 통해서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세례를 통해서 우리 안에 성령께서 머무르시게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 각자는 고유한 은사를 받게 됩니다(1고린 12,1-11 참조) 그러나 각자가 받은 고유한 성령의 선물은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합니다(1고린 4,1-25 참조). 그러므로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새로운 삶에로 탄생하게 되고, 모든 죄를 용서받으며,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되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베드로의 설교 후에 3천 명이 세례를 받고 새로운 신도가 되어서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2 , 41 -42)라고 합니다. 즉 세례를 받고 교회 공동체에 귀속되어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는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肢體)가 됩니다. 교회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머무르시면서 신자들을 통해 자신의 구원사업을 계속하신다는 의미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됨으로써 모든 신자들은 동등한 품위를 지니게 됩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갈라 3,26-28).
세례를 통해서 원죄와 본죄가 사함을 받기 때문에, 만일 누가 세례 받은 후 즉시 죽으면 천당에 가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받고 즉시 죽어서 천당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바라기보다는 세례를 통해서 죄를 용서해주시고 새로운 삶에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그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으려고 성실히 살아가고자 다짐하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세례성사를 받고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 참된 의미와 보람에 가득 찬 길이라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증거함으로써 그들도 하느님을 믿고 함께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천당에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만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는 천당이라면 기쁨이 덜하지 않겠습니까?
한 번 세례 받은 것은 취소할 수 없습니다. 세례는 복음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응답이지만, 동시에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택은 결코 취소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인호(印號)가 새겨진다는 말을 합니다. 영혼에 인호가 각인되는 세례를 한 번 받게 되면 결코 취소할 수 없습니다. 신자생활이 자신 없을수록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께 도움을 청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간절히 구하는 바를 분명히 들어주십니다.
부모는 아기의 출생 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세례를 받게 해야 하고 100일을 넘기지 않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사목지침서 제47조 참조). 특히, 죽을 위험이 있으면 지체없이 세례를 받게 해야 하며, 아기의 부모가 가톨릭 신자가 아니거나 원치 않더라도 세례를 받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버려진 아기나 주운 아기가 세례 받은 사실이 불확실하면 이때도 세례를 받게 해야 합니다(사목지침서 제48,49조). 또 유산된 태아가 살아 있으면 기형이나 형태를 갖추지 못했어도 세례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교회법 제871조;사목지침서 제50조 참조).
신약성서에서 언급되는 세례는 전부 성인세례입니다. 세례의 은혜 부분에서 설명했듯이 세례는 앞서 선포된 복음에 대한 응답이며 회개의 표시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것이 바로 신앙이고, 이런 의미에서 세례는 신앙의 표시입니다.
언제부터 유아세례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신약성서에도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에 대해서 확실히 전해지지 않습니다. 단지 "온 집안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는 구절(1 고린 1, 16 ; 사도 16 , 15 ; 16 , 31.33) 이 나올 뿐인데, 집안 사람에는 아이들도 속한다는 것을 미루어 유아세례가 실행되지 않았겠는가 하고 추정할 뿐입니다. 어린이세례에 관한 기록은 215년경에 저술된<사도전승>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전교지역은 성인세례가 대부분입니다만, 유럽은 그리스도교가 널리 전파된 1천년대 이후로는 유아세례가 대부분이었고, 성인세례는 예외에 속하였습니다. 성인세례나 유아세례의 효과는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유아세례의 경우에 어린이 자신이 직접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므로 부모나 대부모가 어린이를 대신해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아이가 신앙을 키워가도록 돕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나중에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기회를 갖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견진성사입니다. 이렇게 볼 때 어른은 우선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지만, 아이는 부모와 대부모의 신앙고백으로 세례를 받고 나중에 스스로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아이가 철이 들어서 스스로 판단하여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세례를 미루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신이 판단해서 소중한 가치라고 여겨지는 것이면 어려서부터 자식에게 가르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 귀중하다고 확신한다면 마땅히 어려서부터 자식에게 전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성서의 배경이 되는 근동지방에서는 이름을 바꾼다는 것이 새로운 직책을 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원래 아브람이었으나, 모든 민족의 아버지가 된다는 의미에서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습니다.(창세 17 , 5 참조). 또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으뜸이며 초대 교황인 베드로의 이름은 원래 시몬이었으나, 교회의 기초가 되라는 뜻에서 반석이라는 의미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습니다(마태 16 , 18 참조).
교회는 이런 관습을 이어받아 교황이 선출될 때 혹은 수도자가 허원을 할 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해서 새로운 직책과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런 맥락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묵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이 된다는 의미로 세례명을 받습니다. 세례명은 교회 역사상의 많은 성인(聖人)들 중에서 한 분의 이름을 따서 짓는데, 이름을 따온 성인을 주보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세례는 영신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혼자 힘으로 살 수 없고 부모의 도움과 보살핌이 필요하듯, 신앙의 첫걸음을 걷는 이에게도 다른 사람의 도움과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천주교회에서는 세례 받을 때 대부(代父), 대모(代母) 를 정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대부모의 의무와 자격에 대해서는 교회법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부모의 소임은 세례 받을 어른을 그리스도교 입교 때 도와주고, 세례 받을 아기를 부모와 함께 세례에 데려가며 또한 세례 받은 이가 세례에 맞갖은 그리스도인 생활을 하고 이에 결부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도록 돕는 것이다" (872조). 대부모는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만 16세가 넘은 사람이어야 하고, 견진을 받은 가톨릭 신자로서,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874조 참조). 또한 세례 받은 이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니어야 합니다.
용서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과 용서하려는 마음은 있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다릅니다. 후자의 경우라면 세례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용서의 마음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면 됩니다. 용서가 예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이지만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고, 그러기에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는 세례로써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이지 신앙생활의 종착점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세례 받으면서 용서 안 되는 일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체험과 깨달음을 통해서 서서히 용서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랄 때에는 부모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지만 결혼해서 스스로 자식을 낳아 키우다 보면 차차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감사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용서가 안되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많은 용서를 받았고, 계속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진정으로 남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미운 감정이 자주 들더라도 의식적으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용서하자''는 결심을 한다면, 용서는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머리(의지적 차원)에서 시작된 용서가 가슴(감정의 차원)에까지 이르러야 하겠지만 이것은 하나의 긴 과정일 수 있습니다. 머리와 가슴 사이는 물리적으로 두 뼘 남짓하지만 어쩌면 내면적으로는 가장 먼 거리인지도 모릅니다. 의지적 차원에서라도 용서하려고 다짐하였다면 이미 용서는 시작된 것이고, 시작된 용서는 우리의 노력과 하느님 은총에 의해서 완성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뉘우치면 그 죄를 기꺼이 용서해주십니다. 하느님은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마태오 복음 18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비유의 말씀이 이를 잘 드러냅니다. 이 비유에서 왕은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에게 전 재산을 팔아서 당장 빚을 갚으라고 독촉합니다. 그러나 종은 조금만 참아달라고 하소연을 하고, 왕은 그를 가엽게 여겨 빚을 모두 탕감해줍니다. 여기서 왕은 하느님이고 일만 달란트라는 많은 돈을 탕감받은 종은 큰 죄를 용서받은 죄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통회하는 죄인에게 그가 지은 죄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십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궁지에 몰려서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배반한 즉시 눈물로써 진실되게 통회하였기에 예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양떼를 돌보라는 큰 사명을 맡기십니다(요한 21 , 15 -19 참조). 그런데 아무리 큰 죄라도 기꺼이 용서해주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오직 하나, 우리가 당신을 본받아서 서로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점은 마태오 복음 18장의 비유 후반부에서 잘 드러납니다. 여기서 많은 빚을 탕감방은 종은 자신에게 얼마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서 빚을 갚으라고 독촉합니다. 조금만 참아달라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빚을 악착같이 다 받아냅니다. 그러자 이것을 본 다른 종들이 분개하여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왕은 악한 종을 다시 부릅니다. 왕은 "이 몹쓸 종아,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라고 그를 꾸짖고는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도 형제 자매들의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큰 죄가 세례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을까 마음 졸이기보다는 용서해주시는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고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너그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 라는 신학적 물음의 형태로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입장은 제 2차 바티칸공의회의 문헌에서 분명하게 표명됩니다. "사실, 자기의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교회헌장 16항). 중세의 신학에서는 세례 받지 않은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화세(火洗)와 혈세(血洗) 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화세란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진실하게 통회를 하고 세례성사를 받을 지향을 가질 때 세례성사의 은총을 받는다는 가르침입니다. 혈세란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은 세례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제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화세와 혈세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목헌장 22항에서는 "하느님께서만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에 참여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다소 막연하게 표현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는,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달린 것으로서 어떤 사람의 구원 여부에 대해서는 우리가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겸손을 담은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세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도움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시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너무 골똘히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고 착하게 살면 됐지 무엇하러 세례 받고 성당에 나가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몰론 하느님을 인정하고 착하게 살려는 마음은 좋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확실히 어떤 분이고, 그분의 뜻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가장 분명하게 알려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은 바로 교회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만 믿으면 됐지 교회에는 안 가도 된다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필요성을 확신시켜주기 위해서는 말만으로는 안 됩니다. 신자들이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기는커녕 신자들이 세례받지 않은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악하고 못되게 산다면, 교회가 필요 없다는 사람들의 주장을 더 견고하게 할 뿐입니다. 비폭력으로 인도의 독립을 얻어낸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교도였는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싫어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너무나도 다르게 살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것 입니다. 간디의 이 말을 깊이 새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임종세례는 죽을 위험 중에 있는 사람이 받는 세례로서 세례성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간략한 세례라는 뜻입니다. 죽을 위험 중에 있는 어른이 세례받을 수 있는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임종자가 의식이 있는 경우에는, 첫째 세례 받을 의사를 확인하고, 둘째 적어도 기본 교리(하느님의 존재, 삼위일체, 강생구속, 상선벌악)와 할 수 있으면 성체교리를 설명하여 그 믿음을 확인하고, 셋째 죄를 뉘우치도록 인도하고 세례를 줍니다.
2) 임종 때나 죽음이 가까워져 시간이 없을 경우에는 다른 예식을 다 생략하고 축성된 세례수가 아니더라도 자연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병자의 이마를 씻으며 세례형식의 말마디만 외웁니다.
3) 임종자가 의식이 없는 경우, 평소에 세례 받을 의사가 있고 죄를 뉘우치는 마음이 추정되면 조건부로 세례를 줍니다.
4) 그리고 임종세례자가 건강을 회복하는 경우는, 교리교육을 실시하고 세례 보충예식을 거행하여 다른 성사도 받게 합니다(사목지침서 제55조 참조).
신체 장애인에게는 될 수 있는 대로 필요한 교리교육을 실시한 후 세례를 받게 해야 하며, 정신장애인 중 전면적 정신장애인에 대한 세례는 어린이의 세례에 준하며, 부분적인 장애인은 될 수 있는 대로 교리교육을 실시하고 의사표시가 있은 다음 세례를 받게 해야 합니다(사목지침서 제56,57조 참조)
가톨릭 교회에서는 원칙적으로 가톨릭이 아닌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받은 세례도 인정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거행된 세례성사의 효력은 세례를 베푼 사람의 능력이 아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능력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비가톨릭 교회에서 세례 받은 개종자들에게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조건부''로 세례를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만, 1983년의 새 교회법은 이를 폐지하였습니다. "비가톨릭 교회 공동체에서 세례받은 이들은 조건부로 세례 받지 아니하여야 한다. 다만 그 세례 수여 때 사용한 재료(질료)와 말의 형식을 조사하고 또한 세례 받은 어른 본인과 세례를 준 교역자의 의향을 검토한 후 세례의 유효성에 대하여 의심할 만한 중대한 이유가 있으면 그러하지 아니한다"(869조 2항). 간단히 얘기하면, 비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가톨릭 교회에 입교할 경우, 이전에 받은 세례에 중대한 결함이 발견되어 유효성에 의심이 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례를 다시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성공회의 성직자가 집전한 세례만 유효하다고 인정합니다. 기타 개신교 교파의 교역자가 집전한 세례는 유효성이 의심되기 때문에 일단 심사를 거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부 교파에서는 세례성사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교역자가 세례성사를 올바로 집전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59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