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성사는 교회생활의 핵심이며 정점인 미사(=성찬례)를 말합니다. 미사 거행은 언제나 하느님 말씀의 선포,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신 모든 은혜, 특히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신 데 대한 감사, 빵과 포도주의 축성, 그리고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모시는 영성체(領聖體)를 포함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48항 참조). 미사의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빵이 축성되어 예수님의 거룩한 몸, 성체(聖體)로, 포도주가 축성되어 예수님의 거룩한 피, 성혈(聖血)로 변하기 때문에 미사를 성체성사(聖體聖事)라고 합니다.
미사는 에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하신 마지막 식사, 즉 최후만찬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예수께서는 만찬을 시작하시면서 "빵을 들어 감사기도를 올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날 무렵에 "또 그와같이 잔을 들어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루가 22,19-20)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라 최후만찬을 기념하는 미사(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최후만찬을 기념하는 예식인 성체성사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성체성사는 성부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입니다. 미사중에 예수께서 빵을 들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최후만찬을 기념하면서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 하느님 아버지의 창조업적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업 그리고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화(聖化)에 대해서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둘째, 성체성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당신을 희생하신 것을 기념하는 제사입니다. 예수께서는 최후만찬에서 당신 몸도 빵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찢겨지고 붉은 포도주처럼 피를 쏟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히브리 말에서 몸이란 바로 그 사람 자신을 뜻하는 것으로서, 몸을 내어준다는 것은 곧 남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피 역시 몸 속에 흐르는 혈액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을 말하며, 피를 흘린다는 것은 극도에까지,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 헌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이 모든 이를 위한 헌신의 죽음, 희생의 제사라는 것을 설명해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헌신과 희생의 죽음을 기념함으로써 그 구원의 죽음이 가져다 주는 효과를 나누어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미사 중에 우리에게 오시어, 당신이 십자가상에서 실현하신 자기 헌신에 참여하도록 부르십니다(요한 13,14-17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이 되도록 다짐해야 합니다. 이렇게 교회 공동체가 미사중에 예수님의 자기 헌신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우리 스스로를 헌신한다는 의미에서, 미사는 교회가 드리는 희생제사이기도 합니다.
셋째, 우리가 미사중에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을 기념하는 가운데, 예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현존하시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현존하시는 빵, 즉 성체를 영함으로써 그분과 긴밀히 일치하게 됩니다(요한 6,56 참조). 세례성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예수님과의 일치가 영성체를 통해서 더욱 굳건해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예수님과의 굳건한 일치를 이루면서 우리는 그분의 크나큰 사랑 안에 머물게 되고, 이 사랑은 우리의 신앙 여정에 필요한 힘과 희망을 선사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든 사랑을 받아야 정신적, 영신적으로 잘 성장할 수 있습니다. 육적인 생명은 밥을 먹어야 유지되지만 영신적인 생명은 조건 없는 사랑을 통해서 양육됩니다. 예수께서는 성체 안에 현존하시면서 바로 이런 조건 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기에 성체는 우리 영혼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영성체로써 당신과의 일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체(神秘體)인 교회의 일치도 굳건하고 깊게 만드십니다(1고린 10,16-17 참조). 그래서 성체성사는 교회 공동체의 일치와 친교를 표현하고 실현하는 성사라고 합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그리스도의 자기 헌신을 기억하고 스스로도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되기를 다짐한다면, 이를 통해서 이웃과의 일치와 친교가 굳건해지고 깊어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웃과의 친교와 일치를 무시한채 영성체를 한다면 이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입니다(1고린 11,17-29 참조).
영성체가 그리스도와의 친교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친교를 실현한다는 것은 미사 예식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시작 예식에서 형제 자매들에게 자신이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다고 고백하는 참회, 도움이 필요한 형제 자매들을 위해 바치는 보편 지향 기도, 서로에게 예수님이 주신 평화를 기원하는 평화 예식 등입니다.
이렇게 미사 중에 드러난 교회 공동체의 친교는 미사가 끝난 후에도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많은 성당에서 미사 후에 즉시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는 신자들의 모습은 성체성사의 본래 정신에 맞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이미 많은 본당에서 부활 대축일이나 성탄 대축일 때 실천하고 있듯이, 주일 미사 후에 간단한 음료나 음식을 마련해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친교시간을 가진다면 영성체로 맺어진 신자들간의 일치가 아름답게 표현될 뿐만 아니라 더욱 돈독해지지 않겠습니까?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몸이란 바로 그 사람 자신을 뜻하는 것으로서, 몸을 내어준다는 것은 남을 위해서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피를 흘린다는 것은 그 헌신이 극도에까지, 즉 죽음에까지 이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죽기까지 헌신하신 예수께서 현존하시는 표징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궁극적으로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성령 안에서 이루시는 크나큰 신비로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완전히 파악하고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단지 비유를 들어 설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꽃집에는 거의 같은 모양의 장미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장미 한 송이를 사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의 징표로 선사한다면 그 장미는 본질적으로 다른 무엇이 됩니다. 즉 장미를 선사하면서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 자기 자신을 선사하기에 장미는 장미의 가치 그 이상의 것으로,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는 아주 귀중한 표징으로 변하게 됩니다. 미사 때 축성되는 빵과 포도주도 이와 비슷하게 변화합니다.
예수께서는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몸 바치시고 피 흘리신 당신 자신을 선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빵과 포도주는 그 이상의 것이 되지요. 물론 빵과 포도주의 겉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선물해준 장미가 장미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선물 받은 사람에게 그 장미는 보통의 장미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 사랑을 담은 표징이 되는 것이지요. 이와 비슷하게 미사에서의 빵과 포도주도 그냥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표징, 즉 그분 자신을 담은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미사에는 비신자나 예비신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체는 세례를 받은 신자만 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체를 영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신앙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제가 성체를 나누어 주면서 "그리스도의 몸" 하면 신자들은 "아멘" 하고 응답하는데, 이 말마디는 히브리 말로서 `참으로 그렇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사제가 `이 작은 밀떡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계십니다.'' 하고 말하면 신자들은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고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지요.
예수께서는 최후만찬 때 누구에게나가 아니라 당신을 믿고 따르던 열두 제자에게만 빵과 포도주를 나눠주셨습니다. 이는 성체를 받아모시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 대한 분명한 신앙이 요구되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의 경우는 적정한 나이가 될 때까지 영성체를 유보합니다. 즉,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스스로 받아들여 믿음과 경건한 마음으로 성체를 영할 수 있을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 비로소 첫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나이를 10세 전후로 보고 있습니다. 각 본당에서는 매년 이 나이에 해당되는 어린이들을 모아 일정 기간 동안 교육시키고 첫 고해성사를 거친 후에 첫영성체하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시기를 놓치지 않고 제 때에 첫 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할 것입니다. 영성체 때 부모의 품에 안겨서 혹은 부모의 손을 잡고 나온 어린아이가 자신도 성체를 영하겠다고 떼를 쓰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래서 몇몇 본당에서는 아직 첫영성체를 하지 않은 어린이에게는 성체 대신에 과자를 나누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자칫하면 어린이가 성체를 마치 과자처럼 오해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린이에게 과자를 주기보다는 사제가 강복해주는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즉 부모와 함께 나온 아이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얹거나 이마에 작은 십자표를 그으면서 말없이 혹은 "예수님이 너에게 축복하시기를" 이라는 말로써 강복하는 것입니다. 과자보다는 사제의 축복이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더 잘 전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정신적인 장애인이나 치매 노인의 경우에는, 적어도 성체를 보통 빵과 구별할 수 있고 성체께 대한 존경심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어야만 영성체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병자나 노인 등 거동이 불편해서 미사에 참여할 수 없는 신자들은 자기가 거주하는
집이나 병원, 양로원 등에서 성체를 영할 수 있습니다. 사제는 이런 신자들에게 성체를 모셔가 영해주는데, 이를 봉성체(奉聖體)라고 합니다.
미사에 참여할 수 없는 병자나 죽어가는 이들을 방문해서 성체를 영해주는 것은 고대 교회 때부터 실행되어온 관습입니다. 바로 이런 목적에서 미사 때 축성된 성체를 감실에 보존하는 관습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중세 이후에는 이런 목적 이외에도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흠숭하기 위해서 감실에 성체를 모셔놓았습니다. 거의 모든 성당에서는 정기적으로 봉성체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집안에 병자나 노약자가 있어서 봉성체를 원한다면 미리 소속 본당에 알려서 정해진 날짜에 준비를 하고 사제를 기다리면 됩니다. 갑작스러운 병이나 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경우에는 병원 내 원목실에, 원목실이 없다면 소속 본당 혹은 가까운 본당에 알려서 봉성체를 청하면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성체를 영하면 주님을 모독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각 사람은 자신을 살피고 나서 영성체하라고 권했습니다(1고린 11.27-29 참조). 그래서 중대한 잘못(=대죄)이 있으면 성체를 영하기에 앞서 반드시 고해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일상적인 잘못, 즉 소죄가 있는 경우에는 꼭 고해성사를 보지 않고서도 성체를 영할 수 있습니다.
미사 시작에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바치면서,혹은 독서와 복음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겠노라 다짐하면 죄의 사함을 받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공복재(空腹齋)를 지켜야 합니다. 공복재 혹은 공심재(空心齋)란 성체께 대한 존경과 영성체를 준비하는 마음에서 성체를 영하기 전 한 시간동안 음식물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영성체 전에 음식이나 음료의 섭취를 삼가하는 관습은 초기 교회부터 있어왔으나, 교회법으로 규정된 것은 중세 후기에 이르러서입니다. 하지만 물과 약은 언제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또한 노인이나 병약자, 병자를 간호하는 사람들은 공복재 규정을 지키지 않고서도 성체를 영할 수 있습니다.
교회 규정상으로 이상의 두 가지 사항이 영성체를 준비하는 데 요구되는 조건입니다. 그렇지만 성체를 영하기 전에 죄의 용서를 받고 공복재를 지키는 것은 단지 최소한의 요구 조건입니다. 성체를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제대로 체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요구 조건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좀더 적극적인 마음가짐과 준비자세를 갖추어야 하겠지요. 미사 전에 한 주일간 주님께 받은 은혜를 헤아리며 감사드리고 마음을 정리하는 조용한 시간을 갖는다면 미사와 영성체가 훨씬 더 의미 있게 느껴질 것입니다. 또한 그 주일 독서와 복음 말씀을 미리 읽고 묵상하고 미사에 참여한다면 영성체를 통해서 주님을 더욱 가까이 느낄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을 보고서 절망하여 길을 떠나던 두 제자는 낯선 나그네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다가오신 주님께로부터 성서를 설명해 주시는 말씀을 듣고서 뜨거운 감동을 느낍니다(루가 24,32). 그리고 저녁식사 중에 낯선 나그네가 그들에게 빵을 떼어줄 때 비로소 눈이 열려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알아보게 됩니다(루가 24,30-31).
길에서 나그네가 성서를 설명해주는 것은 `말씀 전례''를, 빵을 떼어주는 것은`성찬 전례''를 암시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잘 준비되었기에 성찬 전례 때 주님을 제대로 체험하게 된 것이지요. 많은 분들이 영성체를 하면서도 주님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미사 전에 내적인 준비가 부족했거나 독서와 복음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고 마음에 새기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라디오 주파수를 제대로 맞추어야 원하는 방송을 들을 수 있듯이, 마음을 온전히 하느님께 기울여서 그분 말씀으로 준비된 사람만이 성체 안에 오시는 주님을 제대로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나름대로 성실하게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복잡한 마음이 정리되지 않는다고 해서 성체 영하기를 꺼려합니다. 이런 경우라면 성체를 영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노력을 거듭해도 마음이 마치 뒤엉킨 실타래와 같아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질수록 주님의 힘에 의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애로운 부모라면 자녀들이 자신의 어려움 속에서 헤어나려고 마냥 혼자 발버둥치는 것보다는 함께 해결의 길을 찾고자 부모에게 의탁해오는 것을 더 기뻐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을 끌어안고 혼자서만 고민하는 것보다는 당신과 함께 해결해나가기를 바라십니다. 자신의 힘으로 너무 벅찰 때일수록 `주님. 혼자 힘으로는 안 됩니다.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면서 성체를 영하는 것이 오히려 주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는 길입니다.
교회법은 적어도 일년에 한 번, 가능한 한 부활시기에 고해성사로 준비를 하고 성체를 보실 것을 의무 규정으로 정하였습니다(제920조 참조). 그러나 교회는 신자들에게 주일과 의무 축일에, 나아가서는 더 자주, 매일이라도 성체를 모실 것을 간곡히 권고하고 있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389항 참조).
성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견고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가능한 한 자주, 아니 매일 성체를 영하고자 원하지 않을까요? 같은 날 여러 대의 미사에 참여하는 경우에는 두 번까지 성체를 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본당 미사에 참여해서 성체를 영하고 같은 날 장례나 혼인 미사 등 다른 미사에 참여하게 된 경우, 그 미사에서도 성체를 영할 수 있습니다.
최후만찬 때 제자들은 예수께서 건네주시는 빵을 손으로 받았고, 초대교회의 신자들도 손으로 성체를 받아서 영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흐르면서 성체께 대한 경외심과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함부로 다루지나 않을 까 하는 염려에서 사제가 신자들의 입에 직접 성체를 넣어주었습니다. 실상 성체를 마치 복을 가져다 주는 영물(靈物)처럼 생각하여 영하지 않고 집에 가져와 모셔두는 잘못된 행동을 하는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는 다시 성서와 초대교회의 실천으로 돌아가서 손으로 성체를 받아 영하게 되었습나다.
이렇게 영성체 방법을 변경한 데에는 위생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성체를 입에 영해줄 때 신자들의 침이 사제의 손가락에 묻기 쉽습니다. 침을 일일이 닦을 수 없는 사제로서는 침 묻은 손가락으로 계속 성체를 영해주어야 하는데, 이것은 위생 문제와 직결됩니다. 이 과정에서 자칫 잘못하면 병을 옮길 위험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체를 손으로 받아 영하는 것이 성서와 초대교회의 관습에 더 가깝고 위생적인 측면에서도 합당하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손으로 성체를 받아 영하는 것은 성체께 대한 공경심을 손상하는 큰 잘못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전하면서 무릎을 꿇고 입으로 영하기를 고집합니다. 교회 교도권이 정당하다고 허락한 사항에 대해 반기를 드는 이런 행동이야말로 잘못된 것입니다. 성체 신심을 이유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거나 단죄한다면 이것이 오히려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가 아닐까요?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 분(루가 23,34참조) 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단, 성체를 손으로 받아 모시는 결정을 거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 성체께 대한 존경심의 표시로 성체를 입으로 영하기를 원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최후만찬에서 예수께서 분부하신 말씀을 충실히 따라 미사를 거행하면서 성체와 성혈을 영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11세기까지 양형 영성체(성체와 성혈을 다 받아모시는 것)가 지켜졌으나, 12세기 말에 이르러 단형 영성체(성체만 영하는 것)가 우세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우선 실천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시대나 초기 교회에서는 주로 가정집에서 작은 공동체 단위로 미사를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나 313년 박해시대가 끝나고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신앙의 자유를 얻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이와 함께 공동체의 규모도 커졌습니다. 또한 큰 성당에서 미사에 참여한 수백 명의 신자들이 모두 성체와 성혈을 영하자니 전례시간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바로 이런 실천적인 이유에서 신자들은 단형 영성체, 사제는 양형 영성체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단형 영성체는 신학적으로 뒷받침 되었습니다. 즉 성체 안에는 예수님의 살만 존재하고 성혈 안에는 예수님의 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체에도 예수님이 온전히 계시고 성혈 안에도 예수님이 온전히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이 발전하게 됨으로써 성체만 영해도 예수님을 온전히 모실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항상 양형 영성체를 하는 동방 교회에서 가톨릭 교회의 단형 영성체의 관행을 반박하자 이에 대한 콘스탄티노플공의회(1414-1418년)에서는 양형 영성체를 금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평신도에게도 양형 영성체를 허락할 수 있다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전례헌장 55항 참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전례개혁에서도 신자들이 양형 영성체를 할 때 미사의 본 의미가 더 잘 드러나게 된다고 천명하였습니다(미사경본 총지침 240-252항 참조). 양성 영성체가 최후만찬을 더 가깝고 실감나게 기념하도록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신자들 이 양형 영성체를 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권장 사항에 속합니다. 단지 위에서 언급한 실천적인 이유에서 양형 영성체를 하지 않을 뿐입니다. 소공동체 미사나 피정 등과 같이 소수의 인원이 참석한 가운데 드리는 미사 때는 양형 영성체를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체는 성직자(주교, 사제, 부제)만 분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직자를 도와서 수녀님과 평신도들도 성체를 분배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성찬의 봉사자''라고 부르는데, 일정 기간의 교육을 받은 다음에 성체분배의 직무를 맡게 됩니다. 유럽이나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최근까지 평신도는 남자들에게만 성체분배를 허락하였습니다. 아마도 여성들이 공적인 자리에 나서는 것을 꺼려하는 한국의 독특한 상황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천 교구에서는 수년 전부터 여성들에게도 성찬 봉사의 직무를 맡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자들은 미사 때 영성체하러 나가다가 평신도나 수녀님이 성체를 분배하면 줄을 바꿔 사제에게 가서 성체를 받아모시는데, 이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는 성직자가 분배하는 성체만이 진정한 성체이고 평신도가 분배하는 성체는 뭔가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직자가 분배하든 평신도가 분배하든 성체는 같은 성체입니다. 평신도나 수도자 성체분배자를 피해가면서 영성체를 한다면 결국은 그분들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성체는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성체를 하면서 내 형제 자매를 무시한다면 이는 영성체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행동일 뿐만 아니라 결국 사랑이신 주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가 아닐까요?
성체조배란 성체를 모셔둔 감실 앞에서 성체를 경배하면서 그 신비를 깊이 묵상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체조배에는 특별히 정해진 양식이 없고 침묵 중에 성체를 경배하거나 혹은 성체조배를 도와주는 책자나 기도문을 읽으면서 묵상하면 됩니다.
감실에 모셔둔 성체를 현시하고 사제가 성체를 높이 들어 신자들에게 강복하는 것으로 끝맺는 성체조배를 성체강복이라고 합니다.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좀더 깊이 체험하고 감사하기 위해서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성체조배를 한다면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중세 때 신령성체(神領聖體) 교리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교리는 준비가 부족하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실제로 성체를 영하지 못하는 경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성체를 모시고자 하는 원의를 지닌다면 성체성사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중세 때의 유명한 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세례성사에서 세례가 가능하지 않을 경우 세례에 대한 원의가 이 성사의 효과를 보완하는 것처럼, 성체성사에 있어서도 성체에 대한 원의로써 이 성사의 효과를 이룰 수 있다."
트리엔트리공의회(1545-1563년)는 이 견해를 수용해서, 눈앞에 놓인 성체를 영하고자 원하면서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갈라 5,6) 안에서 성체성사의 효과를 얻는 신령성체를 인정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사제가 없어서 미사를 거행하지 못하고 단지 말씀 전례만 거행할 경우라든가, 병고나 다른 여러 가지 이유에서 미사를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 혹은 혼인 조당으로 지속적으로 성체를 영하지 못하는 경우 등에 신령성체를 통해서 예수님과 마음으로 일치를 이루라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하신 최후만찬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교회는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라서 최후만찬을 기념하는 성체성사를 거행해왔고, 교회가 존속하는 한 계속 거행할 것입니다.
최후만찬은 유다인들의 식사 순서에 따라서 진행되었습니다. 이 식사는 우선 가장이 식구들이 먹을 빵을 손에 들고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드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즉 "우리 하느님이시고 온누리의 임금이시며 땅에서 빵을 생산하시는 주님, 찬양받으소서" 하고 감사의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칠 무렵에 가장이 ''축복의 잔''이라고 부르는 포도주잔을 들고 장엄하고 긴 찬양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기도는 일반적으로 음식에 대한 감사, 구원에 대한 감사, 간청 및 찬양의 내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신약성서가 전하는 것을 보면 최후만찬 역시 이런 순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1고린 11,24-26).
최후만찬과 초기의 미사는 이렇게 유다인들의 식사 순서대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50년대에 씌여진 고린토서간(1고린 11,17-34)을 보면 미사의 순서가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서간에서 사도 바오로는, 일찍 온 사람들이 늦게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자기들이 가져온 음식을 먹어치우고 술에 만취하는 반면 나중에 온 사람들은 굶주리게 되는 식사 관행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성찬 예식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질책하였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점은 고린토 교회는 식사를 하고 나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순서로 성찬 예식을 거행했다는 것입니다. 즉 초기의 빵을 들고 감사한 후 나눔 식사. 포도주잔을 들고 감사한 후 나눔의 순서로 거행되던 미사가 식사를 하고 나서 빵과 포도주잔을 나누는 순서로 변형되었습니다. 이러한 식사(아가페, 애찬) 성찬의 순서는 70년경에 완전히 정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2세기 초엽에는 적어도 일부 지역에서는 성찬 예식과 식사가 완전히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성찬 예식 앞의 식사가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 유다인들의 회당 예배를 닮은 말씀의 전례가 미사의 고정 요소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155년경에 유스티노 성인이 이교도인 안토니우스 황제에게 보낸 <호교론>에서 이러한 미사의 절차를 상세하게 서술하였습니다.
"그리고 ''태양일''이라고 하는 날(주일)에는 도시와 시골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집회를 열고 사도들의 회고록이나 예언자들의 글을 시간이 허용하는 데까지 읽습니다. 독서가 끝나면 그 다음에 주례자는 방금 들은 아름다운 교훈들을 우리 생활에서 본받도록 권고하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나서 함께 일어나 기도를 바칩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기도를 끝낸 후에 빵과 포도주와 물을 가지고 옵니다. 주례자는 온갖 정성을 다해 기도와 감사송을 바칩니다. 그러면 회중들은 ''아멘''이라고 큰 소리로 응답합니다. 그 다음에 감사의 기도를 바친 그 음식을 분배하여 참석자가 각기 그것을 받아모시며 참여치 못한 이들에게는 부제들을 통하여 그것을 보냅니다.(호교론 1권67장).
이 문헌을 보면 그 당시의 미사가 독서(사도들의 회고록이나 예언서), 강론 공동기도(보편 지향 기도), 성찬 전례 순으로 거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현재의 미사 순서는 이미 2세기 중반에 형성된 것입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안에서 산다."(요한 6,53-56)
"우리가 감사를 드리면서 그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고린 10,16-17)
"우리 구세주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 최후의 만찬중에, 당신의 살과 피로써 감사의 제사(미사성제)를 제정하셨으니, 이는 당신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십자가의 제사를 세세에 영속화하고, 또한 당신의 사랑하는 신부인 교회에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기념제를 위탁하시기 위함이었다. 이 제사는 자비의 성사요, 일치의 표징이요, 사랑의 고리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받아모시게 하여 마음을 은총으로 충만케 하고, 우리에게 장래 영광의 보증을 주는 파스카 잔치이다."(전례헌장 47항)
"다른 성사와 교무직무와 사도직 활동은 모두 성체성사와 연결되고 성체성사를 지향하고 있다. 실제로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재산이 내포 되어 있다. 즉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그 안에 계신다."(사제직무교령 5항)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모시는 거룩한 영성체는 주님께 대한 일치를 증대시키며, 소죄를 사해주고, 대죄에서 보호해준다. 성체를 모시는 사람과 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사랑의 유대가 굳건해지므로, 영성체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일치도 강하게 해준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416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