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항상 건강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할 때도 있습니다. 몸이 아프면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약을 먹거나 병원에서 치료를 받습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한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로써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이후에도 악으로 이끌리는 경향은 그대로 계속 남아서 또다시 죄를 짓게 되어 영혼의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영혼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지은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데 바로 이를 위해서 고해성사가 있 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루가 15,11-32)가 감동적으로 표현해 주듯이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는 분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은 집을 떠나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는 아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마르 2,10)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루가 7,48 )고 선언하시면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예수께서는 이와 똑같은 용서의 선언을 고해성사 중에 사제를 통해서 우리 각자에게 전해주십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살피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참으로 허물이 많고 자주 잘못을 범하며 산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용서가 없다면 누적된 허물과 잘못의 짐을 지고 허덕이면서 힘겹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용서는 이런 무거운 짐을 벗겨주어 가벼운 마음으로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줍니다. 마치 예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새 출발의 기회를 주셨듯이 말입니다(요한 8,11 참조)
개신교 신자들은 물론 가톨릭 신자들 중에서도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에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죄를 직접 고백하고 용서를 받으면 됐지 왜 인간인 사제에게 죄를 고백해야 하는가?'' 물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에게 죄를 고백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즉 예수께서 당신의 사죄권을 당신 제자들에게 위임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들에게 위임해주신 사죄권은 다시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과 그의 협력자인 사제들에게 계승됩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 들어 있는 "저희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마태 6,12)라는 표현을 통해서 드러나듯 신자들 서로가 죄를 용서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도 "누가 누구를 탓할 것이 있다해도 서로 참고 서로 은혜로이 용서하시오"(골로 3,13)라고 권고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교회의 이름으로 공적으로 죄를 사하는 권한은 교회를 이끌고 대표하는 사도들과 그의 후계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은 죄를 짓게 되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죄의 용서는 사제를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은 물론 하느님이십니다.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또 다른 이유는 죄의 특성에 있습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딸로 새롭게 태어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은 우리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고 하느님과 교회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교회의 일원으로서 교회에 누를 끼치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하느님과의 화해뿐만 아니라 교회와의 화해도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이중의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대리하는 동시에 교회를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제에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학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이유에서도 고해성사는 인간에게 진정 도움이 되는 제도입니다. 죄를 짓고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면 누구에겐가 얘기함으로써 후련함을 느끼게 됩니다. 경찰을 피해서 도망 다니던 살인범이 자수를 해서 모든 것을 다 실토하고 나니까 그제서야 불안에서 해방되어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었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혼자서 가슴속에 묻어두고 괴로워하던 죄를 사제에게 고백하면 내적인 해방감을 얻게 되고 사제의 사죄경을 통해서 자신의 죄가 정말로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 중에는 가톨릭의 고해성사 제도가 심리적으로 아주 훌륭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은 어느 정도 죄를 예방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사제에게 죄를 고백함으로써 재차 같은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알게 된 모든 내용에 대해 절대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교회법 983, 984조 참조). 이것을 고해의 비밀이라고 하는데, 교회 역사를 보면 이를 지키기 위해 사제가 목숨을 바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신부님이 혹시 나의 죄를 기억하고 나를 꺼려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첫 째, 자기 죄를 알아내야 합니다. 조용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지난번 고해성사를 받은 후에 무슨 죄를 지었는가 찬찬히 알아내야 하는데, 이를 교회용어로 ''성찰''(省察)이라고 합니다. 많은 경우에 십계명에 따라서 자신의 죄를 성찰하기도 합니다 .
둘 째,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해서 진정으로 뉘우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즉 내가 지은 잘못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내가 되는 데에 얼마나 해가 되었는지, 또 다른 사람에게 영신적, 물적으로 어떤 피해를 입혔는지,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얼마나 많이 상해드렸는지 등등을 곰곰히 헤아려 보면서 죄를 아파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통회''(痛悔)라고 하는데, 고해성사에서 가장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더라도 죄에 대해서 통회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면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통회가 부족하지 않은가 하며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한 후 나머지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맡기도록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지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다시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할 것입니다. 이것을 ''정개''(定改)라고 합니다. 요약하면 고해실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은 죄를 알아내는 성찰, 뉘우치는 통회,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정개입니다.
죄의 성찰과 통회는 어둡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새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자신의 죄와 잘못을 성찰, 통회하면서 자신을 쥐어뜯거나 자학할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배우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잘못하고 죄짓는 사람을 너무 쉽게 비난하고 손가락질하지만 살다 보면 자신도 똑같은 잘못과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자신이 결코 남보다 잘나지 않았음을 깨닫고 좀 더 겸손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내 자신이 잘못을 범해서 마음이 아팠다면 다른 사람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잘못하는 사람에 대해서 비난을 앞세우기보다는 가능한 한 관대하게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잘못과 죄를 성찰, 통회, 정개하면서 스스로 좀더 겸손해지고 이웃에 대해서 관대해질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새사람이 되는 길 아니겠습니까?
우선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고해실에서 주로 남의 잘못만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잘하려고 했는데 다른 이들이 잘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다''는 식의 고백은 옳지 않습니다. 또 죄를 짓게 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좋지만 죄를 극구 변명하려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두 경우 다 성찰과 통회가 부족하다고 하겠습니다.
고해실에서는 성찰을 통해서 알아낸 자신의 죄를 모두 고백하면 됩니다. 중대한 죄, 즉 대죄는 반드시 고백해야 하고 가능한 한 그 죄의 종류와 횟수까지 고백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일 자신의 중대한 죄를 알아내고서도 일부러 숨긴다면 자신이 범한 죄의 중대성을 올바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하느님께 불성실한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큰 잘못으로서 모고해(冒告解)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다 알고 계시지만 우리 자신이 내적으로 제대로 치유될 수 있도록 죄의 고백을 원하십니다. 환자가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고 숨긴다면 아무리 훌륭한 의사라도 그를 도울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미처 알아내지 못한 대죄를 고백하지 못했다고 해서 잘못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죄는 다음 고해성사 때에 고백하면 됩니다. 일상적인 잘못, 즉 소죄는 꼭 고백하지 않아도 됩니다. 소죄는 고해성사를 통하지 않고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사를 시작하면서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바치는데, 이때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빌면 죄의 사함을 받습니다. 또 독서와 복음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서도 소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소죄도 고백하기를 권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의무는 아니라고 해도 소죄를 고백함으로써 악으로 흐르는 나쁜 경향과 싸우며 양심을 더 건강하게 닦을 수 있기 때문입 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이 말해주듯이 작은 잘못이라고 성찰을 소홀히 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나중에 아주 큰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일상에서 쉽게 범하는 소죄라도 고백하는 것이 좋다는 교회의 권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 받기 이전에 범한 죄나 한 번 용서받은 죄에 대해서는 다시 고백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례나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받은 과거의 죄를 재차 고백하는 것이 무조건 경건과 열심의 표시는 아닙니다. 하느님은 범한 죄에 대한 통회를 촉구하시지만 그렇다고 죄스러운 과거에 발이 묶이는 것을 원하시지는 않습니다. 이미 용서받은 죄에 마음을 두는 것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현재를 살고 착한 행실로 미래를 여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더 부합하는 것입니다.
죄는 어떤 방식으로든 흔적을 남깁니다. 즉 죄는 죄를 범하는 사람 자신에게 내적으로 상처를 입히고 나약해지게 하며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에 해를 끼칩니다. 그런데 죄는 용서를 받더라도 이런 죄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습니 다. 벽에 잘못 박은 못을 빼더라도 못이 박혔던 자국은 남아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죄의 결과를 적절한 방법으로 보상하거나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이 갚음을 ''보속''(補贖)이라고 합니다. 고해사제는 고백자의 개인적인 상황을 참작하고 가능한 한 지은 죄의 경중과 특성을 고려해서 그의 영신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보속을 줍니다. 보속의 종류는 기도, 자선행위, 이웃을 위한 봉사, 절제, 희생 등입니다. 또한 고백자 자신이 누구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알기에 자신에게 바람직한 보속을 자발적으로 정해서 고해사제에게 제안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보속을 하지 않는다고 고해성사가 무효가 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참회자의 통회와 사제의 사죄경으로 죄의 사함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진정 통회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죄가 끼친 악영향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해보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죄의 결과를 보상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용서의 은총에 진정 감사하는 사람이라면 보속을 기꺼이 하지 않을까요? 혹시 보속을 실천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한다면 예를 들어서 평일 미사에 참여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사람이 평일 미사 참례를 보속으로 받았다면 다음 고해성사에서 사정을 말씀드리고 다른 보속으로 바꿀 수는 있습니다. 이 경우 꼭 먼저번의 고해사제가 아닌 다른 사제라도 무관합니다.
죄는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에 해를 끼칩니다. 예를 들어서 이기심, 무관심, 악의, 비겁함 등의 죄가 이웃사람에게 어떤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하느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이렇게 죄는 이웃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를 파괴하지만 반대로 죄의 용서는 파괴된 관계를 회복시켜줍니다.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자신의 이기심과 욕심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겠다고 결심할 것이고, 그 뜻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이렇게 고해성사는 하느님과의 화해, 이웃과의 화해를 이루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문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해성사를 받는 신자들은 하느님께 끼친 모욕에 대한 용서를 자비로우신 하느님께로부터 받으며, 동시에 범죄로 상처를 입혔던 교회, 사랑과 모범과 기도로써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노력하는 교회와 다시 화해하는 것이다"(교회헌장 11항)
모든 신자는 적어도 일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해야 하는데(교회법 989조 참조) 통상적으로 부활시기에 이행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 시기를 재의 수요일부터 삼위일체 대축일까지로 연장하고 있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 시기에 성사를 받지 못한 신자는 성탄시기나 다른 때에 받으면 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는 부활시기와 성탄시기에 판공성사를 마련하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의 횟수가 ''적어도 일년에 한 번''이라는 의무 조항에 국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큰 잘못이 있으면 빠른 시일 내에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또 큰 잘못이 없다고 해도 중요한 시기에, 예를 들어 자신의 생일이나 영명축일을 맞이해서, 혹은 결혼이나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고해성사로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구한다면 좋지 않을까요?
개별적으로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것이 중죄의 사함을 받기 위한 정상적인 방식입니다. 그러나 중대한 사유가 있을 경우에는 개별 고해 없이 한꺼번에 여러 참회자들에게 일괄적으로 사죄가 베풀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법에서는 일괄 사죄가 가능한 두 가지의 경우를 제시합니다(교회법 961조 1항).
첫째로 죽을 위험이 임박했는데 한 사제나 여러 사제들이 참회자들의 개별적인 고해를 들을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입니다. 둘째로 침회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적절한 시간 안에 각자의 개별 고해를 올바로 듣기에는 고해사제의 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참회자들이 자기들의 탓 없이 오랫동안 고해성사의 은총을 받을 수 없게 되거나 영성체를 못 하게 될 때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큰 축제나 순례 때 단지 신자들이 많이 모였다는 이유만으로 일괄 사죄를 베풀 수 없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는 부활, 성탄 판공이 이에 해당되는 상황이라고 보기 때문에 일괄 사죄가 허락되지 않고 있습니다. 일괄적인 사죄가 베풀어질 수 있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에 해당하는 상황인지의 여부는 교구장이 판단합니다. 그리고 일괄 사죄를 유효하게 받기 위해서는 참회자가 합당한 참회를 해야함은 물론이고 당장에 개별적으로 고해할 수 없는 중죄를 적절한 때에 개별적으로 고해하겠다는 결심을 해야만 합니다(교회법 92조 1항)
컴퓨터 통신이나 인터넷, 전화를 이용해서는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아주 중대한 일이고 중대한 일은 본인이 직접 나서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사랑을 고백하는 데에 컴퓨터나 전화를 이용한다면 성의가 없다고 하지 않을까요? 직접 만나서 얼굴을 마주하고서 비록 떨리고 더듬거리는 말로라도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사랑을 고백 하는 데에 가장 성실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죄를 고백하고 그분에게서 용서를 받는 고해성사의 경우도 이와 비슷합니다 .
고해성사는 그리스도와의 참된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러나 본당에서 판공 때나 주일에 많은 신자들이 제한된 시간 내에 고해 성사를 받아야 하기에 성사가 너무 형식적, 기계적으로 이루어져서 인격적인 만남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신부님과 개별적으로 시간 약속을 해서 좀더 여유를 갖고 상담식으로 고해성사를 받는 것도 권장할만 합니다.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고백하는 신자들은 고해 사제에게 자기 반성의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신자들이 저렇게 진지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사제인 나는 과연 얼마나 열심히 살고자 했는가?'' 하고 말입니다. 또한 고해성사를 보기 전에는 자신의 죄의 무게에 눌려 침울한 얼굴을 하고 축 처진 모습이었던 신자들이 죄의 용서를 받고는 날아갈 듯 기쁜 얼굴로 돌아갈 때 사제는 하느님이 주시는 용서의 은총을 생생하게 체험합니다. 사제에게 고해소는 그야말로 은총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장소입니다.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 부담스럽게 여겨지는 신자들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사제 자신이 배우고 체험하는 바가 적지 않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부담이 덜해질 것입니다.
중죄를 짓고도 고해성사를 받지 않으면 미사에 참여해서도 영성체를 못하지요. 그러면 자연히 미사에 참여하고픈 마음도 없어질 것이고, 그래서 한두번 미사에 불참하다 보면 냉담신자가 되는 경우를 주위에서 종종 보게 됩니다. 이런 것을 고려해서 큰 잘못이 있을 때는 빠른 시일 내에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앞에서 주일 미사를 궐하면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지요. 왜 그럴까요? 먼저 주일 미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신자들은 주일 미사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생활을 돌이켜보고, 그리스도의 성체를 영함으로써 살아나갈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사람이 삼 시 세 끼 법을 먹어야 육신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듯이 영신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씀과 성체라는 생명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주일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의무로 부과하였고, 이를 어기면 큰 잘못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하지만 주일 미사를 궐했다고 해서 무조건 다 큰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서 입원한 사람이라든가, 상을 당해서 빈소를 떠날 수 없는 이들이 주일 미사에 참여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주일 미사에 참여할 수 없는 신자들은 공소예절이나 묵주기도, 성서 봉독, 선행, 주님의 기도 서른 세번 등으로 주일의 의무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사목 지침서 제74조 3-4항). 그렇게 했다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낸 것이므로 고해성사를 볼 의무는 없습니다.
세례는 다른 모든 성사를 받기 위한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받지 않고서는 고해성사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제는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신앙과 인생에 관해서 상담, 조언 그리고 기도를 해줄 수 있습니다.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자신의 잘못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는 것으로도 내적인 치유를 얻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고해성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일찍이 루터는 모든 죄를 용서하는 세례성사를 기억함으로써 죄의 사함을 받는다고 하면서 고해성사를 거부했습니다. 오늘날 개신교에서 죄의 고백과 죄사함을 위한 청원은 교역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 갈려나간 정교회나 성공회에서는 지금도 고해성사를 인정하여 실행하고 있습니다. 정교회에서 사용되는 사죄경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였을 때 예언자 나단을 통하여 그를 용서하셨으며, 베드로가 슬피 울었을 때 그를 용서해 주셨고, 창녀가 당신 발에 눈물을 쏟았을 때 그를 용서해주셨으며, 바리사이파 사람과 탕자를 용서해주셨으니 하느님께서 죄인인 나를 통하여 이 세상과 내세에서 그대를 용서하시어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 대전에 섰을 때 그대를 단죄하지 않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세세에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아멘."
죄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름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에 상처를 입히거나 파괴하는 것입니다. 아담에 의해서 인간이 본래의 거룩함과 의로움을 잃은 죄의 상태가 인간 개개인에게 전해 내려옵니다. 이 죄의 상태를 원죄라 하고, 원죄를 가진 인간 각자가 스스로 범한 죄를 본죄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과 맺은 사랑의 관계에 상처를 주거나 파괴하는 행위를 죄라고 합니다.
소죄는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장애를 주거나 교란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계를 아주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죄는 고해성사 없이도 영성체로 사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더 큰 자비를 얻기 위하여 고해성사 때 고백해야 합니다.
대죄는 우리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하느님을 배반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즉, 영혼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을 떠나 다른 것에 마음을 쓰고 있는 죄인을 지켜보며 화해와 용서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큰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빨리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1.아침, 저녁기도, 삼종기도 등 일상기도 생활에 충실 했는가?
2.기도할 때에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한 적은 없는가?
3.미신행위를 하거나 믿은 적은 없는가?
4.예수님이나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맹세한 적은 없는가?
5.일부러 미사에 빠지거나, 늦게 오거나 마치기 전에 나간 때는 없는가?
6.미사에 와서 기도문의 뜻을 생각하며 기도하려고 하지 않고, 예의 없는 태도는 안 했나?
7.부모님이나 웃어른의 말씀을 거역한 일은 없는가? 말대답을 한 일은 없는가?
8.웃어른을 업신 여기거나 놀린 일은 없는가?
9.누구를 미워한 적은 없는가? 업신여긴 적은 없는가?
10.성을 낸 적은 없는가? 또 욕설을 한 적은 없는가?
11.말다툼하거나 싸운 적은 없는가?
12.다른 사람이 잘못되기를 바란 적은 없는가?
13.고의로 유산 시킨 적은 없는가?
14.사람을 간접 또는 직접 죽이려고 마음 먹었거나 행하지는 않았는가?
15.자신의 몸을 일부러 상해하거나, 자살하려고 하지는 않았나?
16.다른이를 죄짓게 하지는 않았는가?
17.몸의 순결을 거스르는 말을 하거나, 음란한 책이나 그림을 호기심을 가지고 보거나, 이야기하거나, 듣기를 좋아하지 않았나?
18.음란한 생각을 일부러 즐겨 했거나, 혼자서 또는 남과 음란한 행동을 한 적은 없는 가?
19.남의 것을 훔친 일은 없는가?
20.내 물건이 아닌 것을 아직도 그대로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21.고의로 또 부주의로 남의 제물에 피해를 끼친 것은 없는가?
22.거짓말을 하여 타인에게 손해 끼친 것은 없는가?
23.이유없이 남을 의심하거나 나쁘게 밀할 때는 없는가?
24.교회에 대한 본분을 성의껏 잘 했는가?
25.교회법이 명하는 성사를 잘 받았는가?
고백을 위한 성찰(II)
1.덕행과 선행의 길로 나아가려고 힘쓰지 않았다
2.대죄가 없는 데도 영성체 하기를 게을리 하였다.
3.정기적으로 (적어도 연 2~3회) 고백성사를 보지 않았다.
4.어려움 중에 주님께 의탁하며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였다.
5.일상생활 속에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6.버릇이 되었다고 충고 받은 죄를 다시 지었다.
7.내 능력에 맞도록 가정에, 생활 능력에 맞도록 생활 하지 않았다.
8.들뜬 마음으로 헛된 시간을 보내며 행동 했다.
9.시간 관념에 불충실 했다.
10.감정 때문에 흥분해서 주어진 일을 못 했다.
11.사람들이 나를 알아 주고, 칭찬 받기를 원했다.
12.야심을 가지고 돈과 재산을 탐했다.
13.사치를 좋아해서 신분에 맞지 않게 돈과 필수품을 낭비했다.
14.그리스도 신자로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15.마음이 약해서 남의 좋은 의견을 배신했다.
16.무엇을 얻으려고 돈 있는 이에게 아첨했다.
17.내 것이 아니라고 남의 물건을 함부로 사용했다.
18.절제가 없어서 자신과 물건에 절도를 잃었다.
19.자녀들의 잘못을 방관 했다.
20.주어진 일을 아무렇게나 무질서하게 해 치웠다.
21.생각 없이 함부로 약속 했으며, 약속을 지킴에 허술했다.
22.내 부주의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를 생각치 않았다.
23.어려움이나 나의 실수 때문에 지나치게 좌절감 속에 실망했다.
24.합당한 이유없이 하던 일을 중간에 그만두었다.
25.일을 더 잘하려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26.어려움이나 나의 실수 때문에 지나치게 좌절감 속에 실망했다.
27.교만과 허영 때문에 말과 행동에 있어서 속임수도 있었고 교만했다.
28.남이 나를 알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행동했다.
29.나는 내 생각, 내 행동만을 언제나 옳다고 생각했다.
30.모르면서 아는 체하며 말했다.
31.거만하게 말하며 남을 업신 여겼다.
32.어떤 일을 나만이 알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경솔한 말과 행동을 했다.
33.정상적으로 내 육신을 잘 보살피지 않았다.
34.지나치게 내 몸을 돌봄으로써 시간을 낭비했다.
35.내 구미에 맞는 음식에 지나치게 마음을 두고 양보 없이 과식 했다.
36.좋지 못한 쾌락을 바랐거나 행동했다.
37.가끔 술을 취하도록 마셨고 타인에게 불편을 주었다.
38.남을 질투했다.
39.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중히 여겼다.
40.공동의 행복을 위해 남과 더불어 일하기를 피했다.
41.남의 비참한 환경에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고, 당연한 결과라고 외면했다.
42.음란한 쾌락을 정당한 사이가 아닌 다른 이와 하기를 바랐거나 행하였다.
43.결혼하지 않은 몸으로 순결을 범했다.
44.남의 걱정거리를 무관심하게 그대로 지나쳤다.
45.남에게 모욕을 주었다.
46.무식한 사람이나 어려운 사람을 경멸하였다.
47.남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남의 사정은 이해조차 하지 않았다.
48.위험 중에 있는 이를 도와 주지 않았다.
49.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만을 사귀고 사랑했다.
50.남의 마음을 상하도록 심하게 말했다.
51.사실이든, 거짓이든 필요 없이 남에 대한 말을 했다.
52.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 하지 않았으며, 교리에 반대되는 주장을 고집하거나 태도를 취하였다.
53.말과 행동으로 남에게 나쁜 표양을 주었다.
54.말을 해야 할 때, 겁 때문에 할 말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55.남을 도와 주고 착하게 잘 하려고 하는 이를 비웃었다.
56.주어진 자기 본분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
57.일꾼에게 합당한 보수를 제 때에 주지 않았다.
58.빌린 것을 필요 없이 오래 가지고 있으므로 불편을 주었거나 또는 잃어버렸다.
59.갚을 생각 없이 돈을 꾸고 또 주지 않았다.
60.남의 것을 내 것인 양 사용했다.
61.남의 물건에 손해를 끼쳤다. 또 피해를 기워 갚지 않았다.
62.자기에게 필요한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욕심으로 가지고 있기를 좋아했다.
63.하느님께서 명하신 부부생활을 잘 하려고 노력 했는가?
64.부모님의 일을 가정에서 돌보아 주지 않았다.
65.집을 나와 방황했으며, 또는 허락 없이 나와 다님으로써 부모님께 괴로움을 끼쳤다.
66.연구하고 알아보지도 않고 교회의 가르침을 비난했다.
67.자기에게 능력이 있으면서도, 학교 봉사단체나 교회단체에 봉사하기를 피했다.
68.기도할 시간을 찾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시간을 아까와 했다.
69.억지로 미사에 참례했거나, 어떤 때 는 하지도 않았다.
70.부모님과 웃어른을 존경하며 사랑 했는가? 또 하려고 애를 썼는가?
71.자기 집안을 가난 때문에 부끄러워 했는가?
72.어려움이 닥쳤을 때 부모님의 충고를 받으려고 했으며, 겸손되이 받아들였는가?
73.부모님께 거짓말을 했는가?
74.부모님을 도우려고 애썼는가?
75.식구들과 형제 자매들을 이해하려고 노력 했는가?
76.다른 형제들 보다 내가 먼저 어렵고 궂은 일을 하려고 노력 했는가?
77.여러 식구 중에서 어떤 아이만 호사 시키지 않았는가?
78.가정의 성화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 했는가?
79.자녀들의 결점을 고쳐 주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80.자녀들에게 재산, 학식 뿐 아니라 구원의 말씀을 심어 주고 자라게 하기 위해서 어떤 표양을 (기도, 교리공부등) 주었는가?
81.형제 자매들을 질투 하지 않았는가?
82.선생님에게 존경과 성실을 보여 드렸는가?
83.스승이 안 보이는 데서 비난하고 없는 사실까지 붙여서 말한 적은 없는가?
84.스승을 괴롭히고 놀리기 위하여 동급생들과 작당하지 않았는가?
85.자기의 의무와 본분에 정성을 다 기울였는가?
86.그 외의 자기 가정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주님의 계명을 어기었거나, 더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은 것은 없는가?
더 깊이 자신을 살펴, 새 사람이 되기 위한 마음의 다짐을 뉘우침 속에서 결심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