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전날 오늘 다음날

2013년 3월 1일 금요일

[(자) 사순 제2주간 금요일]

TV매일미사 업로드 준비중 입니다.

굿뉴스 추천 성가

굿뉴스 추천 성가
입당 성가 116번 주 예수 바라보라 영성체 성가 160번 하느님의 어린양
예물준비 성가 212번 너그러이 받으소서 499번 만찬의 신비
340번 봉헌 152번 오 지극한 신비여
파견 성가 202번 구세주의 성심이여

입당송

시편 31(30),2.5
주님, 제가 당신께 피신하오니,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숨겨진 그물에서 저를 빼내소서. 당신은 저의 피신처이시옵니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거룩한 참회 생활로 깨끗하여지고, 다가오는 축제를 성실한 마음으로 준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야곱은 늘그막에 얻은 요셉을 다른 어느 아들보다 더 사랑하였다. 이를 두고 그의 형들은 요셉을 질투하고 증오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다가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결국 요셉은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려 이집트로 가게 된다(제1독서). 포도밭 주인이 정성껏 가꾼 포도밭을 소작인들에게 믿고 맡겼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의 은혜를 잊고 그 밭을 차지할 욕심으로 주인이 보낸 종들뿐 아니라 그 아들까지도 살해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과 당신을 외면하고 박해하였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을 나무라신다(복음).

제1독서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7,3-4.12-13ㄷ.17ㄹ-28
3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4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12 그의 형들이 아버지의 양 떼에게 풀을 뜯기러 스켐 근처로 갔을 때,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네 형들이 스켐 근처에서 양 떼에게 풀을 뜯기고 있지 않느냐? 자, 내가 너를 형들에게 보내야겠다.” 17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뒤따라가 도탄에서 그들을 찾아냈다.
18 그런데 그의 형들은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그가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19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20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21 그러나 르우벤은 이 말을 듣고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낼 속셈으로,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하고 말하였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다시 말하였다.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 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 르우벤은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내어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낼 생각이었다.
23 이윽고 요셉이 형들에게 다다르자, 그들은 그의 저고리, 곧 그가 입고 있던 긴 저고리를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졌다. 그것은 물이 없는 빈 구덩이였다.
25 그들이 앉아 빵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보니, 길앗에서 오는 이스마엘인들의 대상이 보였다. 그들은 여러 낙타에 향고무와 유향과 반일향을 싣고,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26 그때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27 자, 그 아이를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 버리고,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자. 그래도 그 아이는 우리 아우고 우리 살붙이가 아니냐?” 그러자 형제들은 그의 말을 듣기로 하였다.
28 그때에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다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었다. 그들은 요셉을 이스마엘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겼다. 이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5(104),16-17.18-19.20-21(◎ 5ㄱ 참조)
◎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 그 땅에 기근을 불러일으켜, 양식을 모두 끊으셨을 때, 한 사람을 그들 앞에 보내셨으니, 종으로 팔려 간 요셉이라네. ◎
○ 사람들이 그의 발에 족쇄 채우고, 목에는 쇠사슬 옭아매었네. 마침내 그의 말이 들어맞아서, 주님 말씀이 그를 보증하셨네. ◎
○ 임금이 사람을 보내 그를 풀어 주고, 민족들의 통치자가 그를 놓아주었네. 그를 왕궁의 주인으로 내세워, 모든 재산을 다스리게 하였네. ◎

복음 환호송

요한 3,16 참조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3-43.45-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45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46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기도

하느님, 자비를 베푸시어, 주님의 종들인 저희가 이 거룩한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고, 그 신비를 믿음과 선행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순 감사송: 304면 참조>

영성체송

1요한 4,10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영원한 구원의 보증을 받고 비오니, 저희가 주님의 뜻을 성실히 실천하여 약속하신 구원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 나오는 소작인들의 폭력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라는 책의 내용을 통해 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인간의 만남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곧 ‘나와 그것’의 만남과 ‘나와 너’의 만남입니다. ‘나와 그것’의 만남이란 비인격적인 만남입니다. 필요에 따라 이용하고자 갖게 되는 만남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용 가치가 없으면 사라지게 되는 만남입니다. 이를테면 학생이 볼펜을 만났을 때 그것은 ‘나와 그것’의 만남이 됩니다. 이와 반대로 ‘나와 너’의 만남은 인격적인 사랑의 만남입니다. 함부로 상대를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사랑을 주고받음으로써 그 만남이 풍요롭게 되고, 발전하며, 아름다워져 가는 경우입니다. 이를테면 부모와 자식, 연인들의 만남은 ‘나와 너’의 만남입니다.
오늘날 참으로 불행한 것은 ‘나와 너’의 만남이 점점 더 ‘나와 그것’의 만남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돈 버는 기계로, 자식을 공부하는 기계로, 엄마를 밥해 주는 기계로 생각하여 상대를 이용 가치에 따라 만나는 풍토로 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소작인들에게 주인은 ‘너’가 아니라 ‘그것’입니다. 이들은, 포도밭을 애지중지 가꾸어 그들에게 믿고 맡긴 주인의 그 마음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다만 포도밭을 차지할 욕심에 주인도, 주인이 보낸 종들도, 그 아들까지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삼을 뿐입니다. 이들의 폭력은, 바로 인격적인 만남을 바라는 주인과는 달리 비인격적으로 주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주위의 사람들을 ‘너’가 아니라 ‘그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