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 사랑의 공동체] 혼인 그리고 무효 장애
우리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든지 교회 공동체 앞에서 서로 혼인동의를 나누어야만 교회법에서 말하는 합법적인 부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려는 신자는 혼인 전 진술서를 작성하려고 미리 본당신부님을 찾게 됩니다.
저도 본당 사목자의 한 사람이기에 결혼식을 위해 저를 찾는 젊은 남녀를 만나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이때, 제 나름대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짓궂은 질문 하나를 그들에게 던집니다. “두 사람은 도대체 왜 결혼을 하려고 합니까?”
어떤 이는 놀라움과 당혹감이 엇갈린 눈으로 저를 빤히 쳐다보기만 합니다. 이 질문에 제가 원하는 답을 내놓는 이도 있지만 많은 이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사랑’이란 말을 꺼냅니다. “당연히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죠. 무슨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한가요?”
‘네가 너무 좋아서’
사실 저는 그 질문에 대해서 이미 답을 갖고 묻는답니다. 결혼을 결심한 당사자들 입에서 ‘상대가 너무 좋아서 결혼하려고 합니다.’란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결혼식을 서로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 아닌, 서로 너무 좋아하는 남녀가 사람들 앞에서 약속을 거행하는 예식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바로 서로 좋아하는 만큼 일평생을 함께 살자며 지인들 앞에서 서약하는 것이 결혼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좋아서 함께 생활하는데 가까이 함께 있다 보니 상대가 싫은 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좋다.’의 반대말이 ‘싫다.’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좋아서 결혼식을 했다면, 함께 생활하면서 그 사람이 미운 만큼 싫은 느낌을 겪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혼인생활입니다.
그래서 저는 혼인에 대한 미래를 이렇게 봅니다. 두 사람이 혼인생활을 통해 서로 약속만 이행하다 끝낼 수 있는가 하면, 두 사람이 진정 사랑을 느끼고 누구에겐가 그 의미를 전할 수 있는 멋진 보금자리로 남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 결말의 의미는 오직 혼인생활을 통한 두 남녀의 몫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혼인 강론에서
신학교 시절 은사 신부님이셨던 정달용 요셉 신부님의 혼인 강론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교회는 이제 두 분이 서로 갈릴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를 속박하는, 우리에게 짐스러운 가르침이 아니라, 바로 혼인생활에서 오는 불안을 해소시켜 주고 우리를 안심시켜 주는 고마운 가르침입니다. 또한 서로가 몸과 마음을 온통 상대편에게 의탁하는 것이 결혼이라면, 헤어질 수 없다는 것은 백번 지당한 것입니다.”
더 이상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대가 좋아서 한 결혼인 만큼 함께 살면서 싫어질 수도 있기에 그러한 불안으로부터 혼인법은 하나의 안정장치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법에서 말하는 혼인
혼인을 다루는 교회법 가운데 저로서는 수용하기 힘든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개인 생각에, 결혼이라면 당연히 사랑이란 단어를 빼고서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교회 혼인법에서는 사랑이란 단어를 전혀 찾을 수 없으니, 모든 상황에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막상 논문 주제로 혼인법을 선택한다면 ‘과연 사랑이란 단어를 언급하지 않고서 혼인의 의미를 다룰 수 있을까?’라는 좀 바보 같은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교회법 제1057조는 합법적인 혼인이 성립되려면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제1항에서는 “혼인은 법률상 자격 있는 사람들 사이에 합법적으로 표명된 당사자들의 합의로 이루어지며, 이 합의는 어떠한 인간 권력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고 천명합니다. 이어 제2항에서는 “혼인 합의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혼인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철회할 수 없는 서약으로 서로 자기 자신을 주고받는 의지 행위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혼인은 교회법에서 말하는 자격을 갖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주고받는 합의에 의해서 성립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혼인 합의
이미 ‘합의’란 단어를 썼습니다만 개인적으로 ‘동의’란 표현을 더 좋아합니다. 결혼이란 의미에는 동(同)이 갖는 ‘한가지’, ‘함께’란 뜻이, 합(合)에서 말하는 ‘합하다’, ‘모으다’보다는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번역된 「교회법전」에서는 합의(合意)로 표기하고 있는데, 합의가 좀 더 법률적인 단어라서 그런 겁니다. 특히 교회법 제1055조에서 말하는 “평생 공동 운명체를 이루는 것”이 혼인이라면 ‘함께’, ‘더불어’란 뜻을 더 나타내는 동(同)이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교회법전」은 혼인에 대한 내용에서 ‘합의’에 총체적인 관심을 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혼인법에선 어떤 상황에 놓인 사람이 혼인 합의를 할 수 없는지 분명하게 명시했고, 이를 ‘장애’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장애에 놓인 신자는 교회에서 요구하는 합법적인 혼인을 맺을 수 없습니다. 설령 그러한 사람이 누군가와 혼인 합의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교회의 혼인이 될 수 없는 ‘그 자체로 무효’인 것입니다.
이혼, 조당 그리고 혼인무효
교회가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 가톨릭 신자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신자들 사이에 혼동하는 부분이 있어서 조금 언급하고자 합니다.
먼저 교회는 혼인에 대한 근본적인 특성으로 ‘단일성과 불가 해소성’을 말합니다(교회법 제1056조). 이 말은 교회가 혼인에 추문이 되는 중혼(重婚)을 결코 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것입니다.
그럼 이혼이 왜 중혼이 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이혼을 정의할 때 “이미 부부가 된 두 사람이 합의 또는 국가 재판에 의하여 혼인 관계를 인위적으로 소멸시키는 일”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혼은 교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불가해소성’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혼 뒤 또 다른 혼인을 시도한 신자는 예전에는 ‘혼인 조당자’라 불렸습니다.
한편 혼인 조당은 혼인 때문에 성사(聖事)생활이 ‘막혔다.’ 또는 ‘가려졌다.’라는 의미로 쓰였는데, 오늘날의 ‘혼인장애’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이혼한 어떤 신자가 더 이상 혼인을 시도한 사실이 없다면 신자로서의 성사생활을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이혼한 신자가 무효소송을 통해 교회법원에서 무효 판결을 받았다면 교회의 성사생활을 누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이혼이 전 혼인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반면, 법적인 근거에 따른 혼인무효는 전 혼인 사실을 공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혼과 혼인무효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교회법 안에서 혼인이 무효가 되는 장애는 다음과 같습니다.
혼인에 대한 무효 장애
무효 장애를 말하기에 앞서 우리 가톨릭 신자는 모두 교회법 제113조와 제204조에 따른 법인(法人)으로서의 자격을 지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교회법상 의무와 권리의 주체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법전에서 말하는 무효 장애를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법전」 제1073조부터 제1094조까지는 혼인의 무효 장애를 말하고 있는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제목이 붙은 것처럼 한 부분은 ‘무효 장애 총칙’을 또 다른 부분은 ‘무효 장애 세칙’에 관한 것입니다. ‘무효 장애 총칙’에 해당하는 교회법 제1073조에서 제1082조까지는 교계제도 안에서 무효 장애에 관한 설정이나 관면(허가)의 권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교회법 제1083조에서 제1094조까지는 혼인이 무효가 되는 장애를 알렸는데, 결혼 적령 미달에 대한 규제와 혈족 사이의 혼인 금지, 그리고 성교 불능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또한 신자와 비신자와의 관면(寬免) 없는 혼인을 문제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결혼을 희망하는 두 남녀에게 미리 혼인 전 진술서를 꼭 작성하게 합니다.
혼인 전 진술서의 질문 내용
진술서에는 여러 가지 질문 사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당신은 전에 혼인한 일이 있습니까?”란 질문이 있는가 하면, “당신과 혼인할 사람은 전에 혼인한 일이 있습니까?”란 질문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신체에 관한 질문도 이어집니다. “당신에게 부부생활에 중대한 문제가 되는 성적 결함이 있습니까?” “당신은 상대방에게 숨긴 신체적, 정신적 악성 질병이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어떤 조건을 전제로 이 혼인을 하는 것입니까?”란 질문도 던집니다.
그런데 결혼을 앞둔 사람들에게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많은 사람이 의문을 가집니다만,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만일 당사자들이 위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면 혼인 무효 사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이런 유머를 보았습니다. 제목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로,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릴 때 결혼해서 50년을 함께 살아온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워낙 무뚝뚝해서 지금까지 할머니께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그 말을 들어보지 못한 것이 평생 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는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는 순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할아버지 할머니 차례가 되어 ‘사랑한다고 말해보라.’는 사회자의 강한 권유에 한참을 망설이던 할아버지가 어렵게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사회자를 향해 “지도 알끼~다.”라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수업시간에 들었던 어느 교수님의 질문을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법이 우리 사람에게 봉사하는 게 무엇인가?”란 물음입니다. 한참 침묵이 흐른 뒤 그 선생님은 ‘정의’라고 짧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든 가정이 ‘정의’로 보호받으며 ‘사랑’을 체험하는 보금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오철환 바오로 - 대구 고성본당 주임신부로, 대구대교구 교구법원 법원장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8월호, 오철환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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