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와 주교 교계(敎階:Hierarchia, Hierarchy) 교계란 가톨릭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의 가시적인 사회로 구성되고 조직되어 베드로의 후계자와 또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을 통하여 다스려지는 위계(位階) 조직으로서 주교, 신부, 부제로 구성됩니다. 일반적으로 한 종교계라는 의미로 그리스도교 세계를 가리킬 때에 쓰이는 '교계'(敎界)와 전혀 다른 말입니다. 흔히 교계 구조, 교계 조직이라는 말과 더불어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다스림"이라는 본래의 뜻에 따라, 주교 이상의 고위 성직자들을 집합적으로 가리킬 때에도 '교계'라고 합니다. 교회 문서에서 '교계'라는 말은 성직자들의 위계를 가리킬 때보다 바로 주교들을 가리킬 때에 더 많이 쓰입니다. 라틴어로 Hierarchia라는 낱말은 그리스어의 hieros(?ερο? : 거룩하다, 신성하다)와 archein(αρχειν:다스리다, 명령하다)이 합쳐진 말로서, 교회의 통치 권력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6세기에 위 디오니시오가 "천상의 위계"(Coelestis Hierarchia)라는 말로 교회의 권력을 성화한 이래, 이 말은 거룩하고 신성한 사물을 돌보고 다스리는 "거룩한 다스림" 또는 거룩하게 다스리는 사람을 일컬어 왔습니다. 다스림에는 필연적으로 위계가 있게 마련이어서, 이른바 천사들의 위계를 따라 성품의 품계를 나누기도 하였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전례와 성사를 거행하는 성품의 위계를 주교, 신부, 부제로만 구분하고 있습니다. 주교(主敎, Episcopus, Bishop) 주교는 사도들의 지위를 계승하는 교회의 목자입니다. 주교는 하느님의 백성을 대사제로서 거룩하게 하고 스승으로서 가르치고 통치자로서 다스리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 사도에게 맡기신 임무가 그 후계자들에게 계승되어 영속하듯이, 교회를 사목하는 사도들의 임무도 주교들의 거룩한 직위를 통하여 영속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우신 제도에 따라 성령께서 뽑으신 주교들은 영혼들의 목자로서 사도들의 후계자이므로, 교황과 더불어 교황의 권위 아래 영원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사업을 영속할 사명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주교들은 개별적인 사도들의 후계자들이 아니고 단체로서 사도들의 후계자들이 됩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고 가르치고 다스리는 주교의 삼중 임무는 그 본성상 주교단(Collegium Episcoporum)의 단장과 그 단원들과 이루는 교계적 친교 안에서만 수행할 수 있습니다. 주교단은 오로지 "베드로와 함께 베드로 아래에서"(Cum et sub Petro) 존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어떤 지역의 주교들을 집합적으로 일컫는 Episcopatus(Episcopate)를 '주교단'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주교님들의 공동 사목 교서나 성명서 등에는 '한국 주교단'이라는 말 대신에 '한국의 주교들'이나 '한국 주교회의'라고 써야 할 것입니다. 주교단과 주교회의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합니다. 주교라는 말은 그리스어 επισκοπο?를 옮긴 말로,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감독관, 지방 장관, 치안관, 목민관, 사제장, 종교 단체의 장을 가리키던 용어였습니다. 초창기 교회가 이 용어를 사도들의 후계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채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전례에서 쓰고 있는 공동 번역 성서는 이 말을 "감독", "감독자", "지도자", "보호자"라는 말로 옮기고 있습니다. 성서를 보면, 교회 초창기에 성령께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여 각 사람에게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은총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사도가 가장 으뜸 가는 직분이고, 그 다음에 말씀을 전하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 병 고치는 능력을 받은 사람, 신령한 말을 하는 사람, 예언하는 사람, 봉사하는 사람, 남을 도와주는 사람, 자선을 베푸는 사람, 격려하는 사람, 지도하는 사람, 전도자, 목자, 교사, 보조자, 원로, 감독 등의 직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직분들 가운데에서 은사에 따른 것들은 후대에 교회의 공직에서 자취를 감추고, 사도직에 관련된 감독(Episcopus), 원로(Presbyter), 보조자(Diaconus) 등의 직무들이 차츰 제도화되고 계승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서를 보면, 사도들은 여러 협조자들을 통하여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먼저, 교회 살림을 맡긴 보조자들이 있었는데, 우리가 '부제'(Diaconus)라고 하는 이 보조자들이 사도들에게 임명을 받은 최초의 교역자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또한 선교 활동의 영역을 확대하면서 선교 여행 때에 제자들이나 협조자들을 동반하고, 여러 교회에 협조자들을 파견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도들과 그 제자들은 여러 교회를 순방하면서 그 교회의 원로들과 감독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아 신자들을 가르치고 다스렸습니다. 협조자들의 직무는, 사도들의 명령에 따라 사도들을 대신하여, 신앙 교리를 가르치고 교회 집회를 주관하며 신자들을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초창기에는 원로(πρεσβυτερο?)와 감독(επισκοπο?)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대개는 원로들 가운데에서 재정을 맡는 사람을 감독이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유다교의 회당 제도에 영향을 받던 교회가 점차 다른 민족들에게 전파되면서 그리스와 로마의 사회 제도와 문화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사회의 원로원은 집단 지도 체제였으며, 원로란 신분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감독은 단독으로 수행하는 직책을 의미하였습니다. 선교 여행을 계속하던 사도들은 한 교회의 원로들 가운데에서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이에게 감독을 맡겼고, 감독이 원로단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사도들과 그 직제자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원로단의 대표인 감독이 사도들의 사목 직무(목자의 임무)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교'라는 용어를 두고 말할 때에, 주교는 감독의 임무를 수행하는 목자이므로 '감목'(監牧)이라는 말이 본래의 뜻에 더 어울린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교회가 오랜 역사를 거쳐 발전하는 과정에서 주교직의 유형도 여러 가지로 나누어지고, 총대주교, 대주교, 부교구장 주교, 보좌 주교 등 그 관할권에 따른 위계도 다양해졌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 달에 하겠습니다. 주교 선임(主敎 選任) 어떤 교구가 공석이 되었을 때에, 누가 다음 주교가 될 것인지 몹시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반 교우들의 성당 이야기에서도 가끔 그런 궁금증이 드러납니다. 서울대교구 시노드에서도 주교 선출 문제를 논의해 보자는 제안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 달 로마에서는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제10차 정기 총회(2001년 9월 30일-10월 27일)가 "세상의 희망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주교"라는 주제로 열릴 것입니다. 새 천년기, 새 시대의 주교는 누구인가, 그 사목 임무는 무엇인가를 논의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150항에 이르는 기다란 [의안집](Instrumentum Laboris)에서, 주교 임명에 관하여는 단 한 줄로 "협의의 문제"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주교 시노드에서 주교 선임에 관한 제도가 크게 바뀔 여지는 거의 없으므로, 현행 규정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교회법에 따르면, "교황이 주교들을 임의로 임명하거나 합법적으로 선출된 자들을 추인"합니다(제377조 1항). 그러나 처음에는 사도들과 그 제자들이 주교를 선임하였고, 그 뒤에는 이웃 주교들과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주교를 뽑았습니다. 그러나 4세기 이후에는 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주교 선출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으며, 11-12세기에는 게르마니아 황제들과 교황 사이에서 이른바 "서임권 투쟁"이 일어나고 황제가 대립 교황을 세워 교회를 어지럽히기도 하였습니다. 나라마다 서로 다른 전통과 관행이 있었지만, 14세기부터 주교 선임권이 교황에게 유보되는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뒤에 주교 선임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개입은 전혀 허용되지 않고 있습니다(주교교령, 20항; 교회법, 제377조 5항 참조). 교황청 외무평의회(현재 국무원 외무부)의 규범(Episcopis facultas, 1972년 3월 25일)과 교회법 제377조와 제364조 4항에 따른 주교 선임 절차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교들은 평소에 주교가 될 만한 후보자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자기 교구만이 아니라 다른 교구나 수도회 신부들 가운데에서 적절한 주교 후보자들을 사도좌에 알릴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주교들은 관구별로 회합을 갖거나 정기적으로 열리는 전국 주교회의에서 비밀 회의(Conclave)를 갖고 후보자들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자격을 심사한 다음에 비밀 투표를 하여, 후보자 명단을 작성합니다. 의장 주교는 이 회의록과 후보자 명단을 교황 사절을 통하여 사도좌에 제출합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새로운 주교 임명이 필요하지 않을 때에도 해마다(교회법에는 적어도 3년마다) 하여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 주교회의도 정기 총회에서 콘클라베(참관인은 물론 사무처 신부들까지 다 내보내고 주교들만 참석하는 비밀 회의)를 갖기는 하지만, 그 회의에 관련된 기록이나 내용은 25년 동안 흔적조차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교구장 주교나 계승권을 가진 부교구장 주교를 임명할 때에, 교황 사절은 교구장 주교나, 교구장 서리, 교구장 직무 대행 또는 참사회 대표에게 교구 현황과 필요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요구하고, 이에 관하여 성직자, 평신도, 수도자 들에게 의견을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각 후보자들에 대한 의견을 주교회의 의장, 해당 관구장과 관하 주교들의 의견은 물론 해당 교구의 참사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의 의견까지도 비밀히 수집하여, 3인 후보 명단(terna)을 사도좌에 제출합니다. 보좌 주교를 임명할 때에는 해당 교구장 주교가 3인 후보 명단을 작성하여 교황 사절에게 제시합니다. 사도좌의 주교성(한국 교회는 인류복음화성)은 정례 회의에서 교황 사절이 보내 온 명단과 관련 자료들을 검토하고 토론을 한 다음에 주교성의 판단을 덧붙여 교황에게 제출합니다. 교황은 대개 주교성의 판단에 따르겠지만, 이 명단에 없는 인물이라도 주교로 임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교 선임 과정에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참여한 모든 사람은 (비밀을 누설하면 사도좌에 유보된 자동 처벌의 파문 제재를 받는) 이른바 "교황 비밀"(Secretum Pontificium)을 지켜야 합니다. 주교 후보자들의 자격 요건을 말하자면, 확고한 신앙, 방정한 품행, 신심, 영혼에 대한 열정, 지혜와 인간적인 덕행에 뛰어나고 주교 직무를 완수할 역량을 갖춘 사람으로서 좋은 평판을 지니고 적어도 35세가 넘고 탁덕품을 받은 지 5년이 지난 신부, 그리고 성서학, 신학, 교회법학의 박사 학위나 적어도 석사 학위를 받았거나 적어도 이러한 학문에 정통한 신부여야 하지만, 그 적격성에 대한 결정적인 판단은 사도좌의 소관이라고 합니다(교회법, 제378조). 그리고 앞에서 말한 주교 임명에 관한 규범 제6조는 착한 목자와 신앙의 교사로서 지녀야 할 자격을 살필 때에, 정확하고 현명한 판단력, 정통 신앙과 사도좌와 교도권에 대한 충성, 사목적 열성과 희생 정신, 충분한 지도력, 지적 능력, 학력, 사회 의식, 대화와 협력의 정신, 시대 감각, 공평 무사, 가정 환경, 연령, 유전적 특징 등도 고려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질들은 주교들이 관구 회의나 주교회의에서 토론할 때에 충분히 논의하지만, 교황 사절이 후보자들에 대한 조사를 할 때에 주로 사용하는 설문지에도 상세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교도권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신부들은, 이를테면 인공 피임이나 여성 사제 서품을 지지하는 글을 썼다든지 그러한 강연을 하였다면, 이러한 조사에서 곤경을 치를 수도 있습니다. 교황 사절의 이러한 설문 조사나 협의에 응답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성실하게 답변하여야 우리 교회에 참으로 필요한 훌륭한 목자를 모실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교황 사절이 주교 임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주교들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게 반영된다고 봅니다. 교황 사절과 의견이 다를 때에, 지역 주교들은 교황청에 직접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평신도들은 주교 후보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부족하다 하더라도, 평신도들이 바라는 주교상을 제시하고 교구의 소망을 밝힘으로써 우리의 목자를 찾는 일에서 중요한 몫을 해낼 수 있습니다. 주교 선임 과정이 민주적인 절차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는 광범위하고 심층적으로 협의하여 하느님 백성의 선익을 위한 참 목자를 찾는 효과적인 제도입니다. 민주적인 절차로는 참 목자를 찾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목자의 자질을 여러 차원에서 깊이 있게 실질적으로 검증하는 일은 어느 나라에서든 민주적으로 이루어지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보다 더 훌륭한 제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하더라도, 모든 관련자는 지금 시행되고 있는 이 모든 과정이 충실하고 진지하게 이루어지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사목, 2001년 9월호, 강대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행정실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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