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전날 오늘 다음날

2009년 5월 2일 토요일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TV매일미사 업로드 준비중 입니다.

굿뉴스 추천 성가

굿뉴스 추천 성가
입당 성가 132번 감사의 송가를 영성체 성가 152번 오 지극한 신비여
예물준비 성가 511번 미약하온 우리 제물 156번 한 말씀만 하소서
157번 예수 우리 맘에 오소서
파견 성가 239번 거룩한 어머니

오늘 전례

아타나시오 성인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에 착실했던 그는 사제가 되어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하여, 공의회가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하는 데 큰 몫을 하였다. 이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지만 아리우스파의 반발로 유배되기도 했던 아타나시오 주교는 평생을 아리우스 이단과 투쟁하는 가운데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언제나 교회의 정통 교리를 따르도록 교우들을 이끌었고, ‘아타나시오 신경’을 남겼다.

입당송

집회 15,5 참조
주님이 그를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회중 가운데에서 그의 입을 열어 주시고, 영광의 띠를 둘러 주셨네. 알렐루야.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복된 아타나시오 주교를 보내시어 성자의 신성을 확고히 변호하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의 가르침과 보호로 기뻐하며, 하느님을 더욱 깊이 깨닫고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베드로는, 중풍에 걸려 팔 년 동안 누워 있는 병자를 방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낫게 한다. 사람들은 놀란다. 주님의 권능이 그와 함께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죽은 여인까지 살렸다. 그녀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 실천한 의인이었다. 이제 베드로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제1독서). 예수님의 말씀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영적인 말씀이 싫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도 떠나고 싶은지 물으신다. 베드로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답한다(복음).

제1독서

<교회는 굳건히 세워지고,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9,31-42
그 무렵 31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32 베드로는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다가 리따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가게 되었다. 33 거기에서 베드로는 애네아스라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중풍에 걸려 팔 년 전부터 침상에 누워 있었다. 34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그러자 곧 애네아스가 일어났다. 35 리따와 사론의 모든 주민이 그를 보고 주님께 돌아섰다.
36 야포에 타비타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이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카스라고 한다. 그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37 그 무렵에 병이 들어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어 옥상 방에 눕혀 놓았다.
38 리따는 야포에서 가까운 곳이므로, 제자들은 베드로가 리따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사람 둘을 보내어, “지체하지 말고 저희에게 건너와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9` 그래서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갔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를 옥상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러자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에게 다가가 울면서, 도르카스가 자기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었다.
40 베드로는 그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시신 쪽으로 돌아서서, “타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가 눈을 떴다. 그리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41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다시 살아난 도르카스를 보여 주었다.
42 이 일이 온 야포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6(115),12-13.14-15.16-17(◎ 12)
◎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또는 ◎ 알렐루야.)
○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 름 부르리라. ◎
○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 나의 서원 채우리라. 주님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당신 눈에는 참으로 소중하네. ◎
○ 아, 주님, 저는 당신의 종. 저는 당신의 종, 당신 여종의 아들이오니, 당신이 제 사슬을 풀어 주셨나이다. 주님께 감사 제물 바치며, 당신 이름 부르나이다. ◎

복음 환호송

요한 6,63ㄷ.68ㄷ 참조
◎ 알렐루야.
○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 다.
◎ 알렐루야.

복음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60-69
그때에 60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기도

주님, 복된 아타나시오를 기념하여 봉헌하는 제물을 굽어보시어, 저희가 그를 본받아 온전한 신앙을 고백하고, 주님의 진리를 증언하여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부활 또는 성인 감사송 참조>

영성체송

1코린 3,11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으니,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도 복된 아타나시오와 함께 성자를 참하느님으로 굳게 믿어 고백하오니, 이 성사로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너무나 직설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적나라한 말씀으로 당신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만큼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수군거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신앙은 양보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조금씩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분위기가 썰렁해지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도 질문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베드로는 단호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힙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현실과 다르다’고 떠나야 할는지요? 우리는 끊임없이 유혹받고 있습니다. ‘주님 기준’이 아니라 ‘세상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유혹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베드로의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비판하던 사람들은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남았습니다. 그들은 애정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다가가면 말씀은 힘이 되지만, 비판으로 다가가면 말씀 자체가 들리지 않습니다.